▲20세기 초 기계 앞에 선 호주 노동자. 산업혁명 당시 영국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오히려 하락했고 60~70년 후에야 회복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과거 노동자들은 자동화 직후에는 오히려 고통이 컸다. AI 자동화에 대해서도 비슷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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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희소성 유토피아'와 '엔드게임', 두 개의 얼굴, 하나의 시나리오
이러한 비관적 전망을 반박하기 쉽지 않은데도 왜 전 세계는 준비도 없이 AI 혁명으로 달려가는 것일까. 한 가지 이유는 AI가 가져올 '탈희소성 유토피아'에 대한 기대일 것이다. 인간의 욕망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원이 부족한 상태를 뜻하는 '희소성'이 AI 시대에는 크게 완화될 수 있다.
AI를 탑재한 로봇까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 노동비용, 거래비용, 정보비용 등이 감소하면서 공급 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더 높은 성장이 모두에게 풍요를 가져다주고, 노동과 여가의 구분이 사라지는 시대를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AI 혁명을 향한 질주가 이런 낙관적 비전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AI를 쓰지 않으면 나만(혹은 우리나라만) 뒤처진다는 공포가 이 질주를 부추기고 있다. 우리가 경쟁의 마지막 국면이라는 뜻의 '엔드게임(endgame)'에 이미 들어섰기 때문이기도 하다.
낙관과 비관의 이 두 시나리오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AI로 비용을 낮춰야 값싼 공급이라는 시나리오가 가능해지는데, 그 비용 절감은 기업이 고용을 늘리거나 임금을 높게 유지해서는 달성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회를 고임금-고물가로 유지하는 방안도 있겠지만, 세계화된 규모로 경쟁이 이뤄지는 AI 중심 경제에서 현실적인 방안이 되기는 어렵다.
이렇게 두 시나리오를 연결해 보면 문제점이 분명하게 보인다. 기술 발전과 생산성 증가가 과연 모두의 풍요와 여유로 자연스럽게 이어질까? 새로운 기술과 생산에 대한 거버넌스(governance, 정책 결정과 운영의 체계)나 분배에 관한 제도 개혁이 없다면, 기술 발전은 소수에게만 화성에도 갈 수 있을 만한 천문학적 부를 안겨주는 데 그칠 것이다. 이러한 성장은 다수와는 큰 관계가 없을 수 있다.
모두를 품는 안전망, 기술로 높이는 '사회적 임금'
이 시나리오가 모두의 탈희소성 사회, 모두의 성장이 되려면 체계적인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중 몇 가지만 다뤄보고자 한다. 먼저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위한 제도적 장치다. 고용주들이 새로운 노동자를 채용할 인센티브가 줄어들고, AI가 창업에 드는 비용을 큰 폭으로 낮춰주면서 창업이 새로운 고용 창출의 영역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창업 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실패 확률은 높은데 사회보장제도는 제한적이다. 자영업자의 고용보험 가입률은 0.8%(2024년 말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 청년이 새로운 창업층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그들에게 절실한 육아휴직은 기대하기도 어렵다. 이제 복지국가는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위험에도 보편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다른 제도적 장치는 기술 발전이 개인의 소비를 대체하면서 '사회적 임금'(공공서비스가 개인의 지출 부담을 줄여주는 효과)을 높이는 방안이다. 기술 발전은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을 낮출 수 있다. 한국에서 복지 운용 중 가장 많은 비용이 드는 의료를 비롯해 교육, 돌봄, 교통, AI 이용료나 통신요금 등이 모두 대상이 될 수 있다. 기술 발전이 단순히 산업 진흥의 수단으로 취급되는 것을 넘어, 공공 영역에서의 보편적 활용을 통해 개인의 지출을 어떻게 대체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필수 서비스의 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면 소득 증가 없이도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정책이자 거버넌스다. 기술 개발과 가격 결정을 시장과 기업에만 맡겨두면 결국 소수를 위한 기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국가가 필수 기술 개발을 적극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든 시민이 값싸게 이용할 수 있으면서도 탄소 배출이 최소화된 기술이 되도록 거버넌스 역량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AI로 인한 생산성 증가는 모두의 풍요 보다는 불평등 심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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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분배, 양극화를 막는 마지막 방파제
또 다른 제도적 장치의 핵심은 재분배 기제다. 재분배가 중요한 이유는 앞으로 AI 경제가 극단적인 경제적 양극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기업들의 대규모 성과급을 둘러싼 최근 논란은 시작에 불과하다. 아울러 개인의 과도한 욕망을 제한하고 사회적 관계와 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재분배는 중요하다. 탈희소성 시대라고 해서 욕망이 무한정 충족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충분한 물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소유하기 위해 과도하게 일하며 지쳐가는 누군가를 떠올려보자. 마치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에서 욕심에 눈이 멀어 땅을 넓히려다 탈진해 숨진 농부와 같다. 개인 삶의 지속가능성과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함께 고려하면, 적정하게 욕망을 통제하는 재분배는 우리 행복을 지키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재분배는 세수 확보와 세수 사용이라는 두 가지 제도적 차원에서 논의될 필요가 있다. 보통은 전자를 중심으로 논의되지만, 납세자에게는 자신이 세금을 더 부담했을 때 그것이 어떤 형태로 돌아오는지가 납세 의향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부유세와 부동산 조세, 노동자 1인당 부담하는 사회보험료의 합리적 개혁(고용하지 않는 고용주가 수혜자가 되지 않도록), 금융소득 과세 등 논의할 내용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동시에 세수 사용에서는 민생지원금과 같은 변형된 보편적 기본소득도 함께 논의할 필요가 있다. 임금 증가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이러한 지원금은 사회적 임금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동시에 이 혜택은 불안정 노동자뿐 아니라 자영업자에게도 전달된다. 그렇게 되면 최저임금을 둘러싼 마찰도 줄일 수 있다.
모두의 평안을 위해 논의할 내용은 산적해 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주제는 없지만 뒤로 미룰 주제도 없다. 부지런히 하나씩 진도를 나가보기를 희망한다.
▲최영준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본인
필자 소개 : 최영준은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교수이며, 복지국가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LAB2050과 푸르메재단의 이사이며, 저출산고령사회 민간위원을 맡고 있다. 사회정책, 복지국가, 저출산 및 고령화, 노동시장 등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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