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0일 더불어민주당 제20대 대통령 후보에 선출된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SK올림픽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린 서울 합동연설회에서 수락연설을 하고 있다.
남소연
"문제는 리더입니다. 뚜렷한 철학과 비전, 굳건한 용기와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득권의 저항을 돌파하는 강력한 추진력이 있어야 합니다. 국민을 믿고, 국민과 함께, 국민을 위해 가시덤불 헤치며 새 길을 개척하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저 이재명이 하겠습니다."
2021년 10월 10일, 이재명 대통령이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한 말이다. 요즘 대통령의 지지율은 연일 내리막이고, 레임덕 위기를 거론하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 그 와중에 이 말이 다시 떠올랐다.
떨어지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한국갤럽 8월 둘째 주 조사에서 긍정 평가는 44%로 취임 후 최저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부정 평가에 역전당했고,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6주 연속 하락 끝에 40.2%까지 내려앉았다. 일부 조사는 이미 30%대를 가리킨다. 이대로면 남은 4년이 너무 힘들다는 말이 지지층 안에서도 더 확산하고, 총선도 대선도 장담하기 어렵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민주·진보 진영의 연대와 결속을 바라는 이들 사이에 처방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필자의 답은 이재명 대통령이 자신이 해왔던 말, 지지자들의 마음을 울렸던 바로 그 발언들이 지향한 가치와 원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재명의 대리인론
이재명 대통령 정치철학의 원형은 대리인론이다. 2021년 12월 대선 후보 시절 그는
전북 군산 유세에서 "국민이 동의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 그게 지배자가 아닌 일꾼인 대리인의 자세"라고 말했다.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는 정책이라도 국민이 동의하지 않으면 접겠다고 했고, 실제로 기본소득과 국토보유세 공약을 그 논리로 거둬들였다. 위임의 방향은 아래에서 위로 흐르며, 대리인은 주인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 이 철학의 뼈대다.
"국민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아닌 주권자를 대리하는 일꾼으로서 저 높은 곳이 아니라 국민 곁에 있겠습니다. 어려울 땐 언제나 맨 앞에서 상처와 책임을 감수하며 길을 열겠습니다."
2021년 7월 1일 대선 출마선언문의 한 대목이다. 이 추상적 원칙에 피와 살을 입힌 것이 2022년 1월 24일 성남
상대원시장 연설이었다. 그는 "여기가 바로 이재명과 그의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청소 노동자였던 아버지, 공중화장실을 지키며 10원, 20원을 받던 어머니와 여동생의 이야기를 꺼내며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 서민들의 삶과 이재명의 참혹한 삶이 투영되어 있습니다"라고 오열했다. 아마도 무수히 많은 이들이 같이 울었을 것이다. 그 여동생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이재명은 실신할 정도로 울었다고 하지 않던가.
빈말이 아니었다. 교복을 입어보지 못한 그는 시장이 되어 무상 교복을 만들었고, 버린 과일을 주워 먹던 그는 아이들에게 신선한 과일을 챙겼다. 학원비를 걱정해야 했던 그는 청년 배당을 만들었고,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며 겪은 아픔은 성남시의료원 설립으로 이어졌다. 정책마다 상처가 하나씩 박혀 있었다.
2024년 3월 총선 유세에서 그는 "주인에게 대드는 머슴은 해고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당시 비판 대상은 윤석열 정권이었다. 하지만 원칙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주인의 뜻을 묻지 않는 머슴, 주인의 살림보다 제 세력을 챙기는 머슴은 해고감이다. 그 원칙은 지금의 이재명 대통령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래야 대통령 말의 영(令)이 서고 지지자들을 넘어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명심'이 기준이 되는 순간

▲2025년 12월 18일 이재명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대전 충남 국회의원 오찬 간담회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리인론의 시각으로 지난 1년여의 당내 정치를 되짚어 보면, 주인과 대리인의 자리가 뒤바뀌었다. 주요 자리는 번번이 이재명 대통령의 의중이 갈랐다. 정치권은 이를 '명심'이라 불렀다.
이런 '명심' 논란은 당 대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2024년 전반기 국회의장 경선은 입법부 수장을 뽑는 자리였음에도 명심 경쟁으로 치러졌고, 석 달 뒤 전당대회에서는 '이재명 팔이 척결' 발언을 한 정봉주 후보가 선두를 달리다 강성 당원 표 이탈로 탈락했다. 그래도 그때의 명심은 추정의 영역에 있었다. 집권 뒤에는 추정조차 필요 없어졌다.
올해 5월 후반기 국회의장 경선이 그랬다. 대통령 정무특별보좌관을 지낸 조정식 의원이 특보직을 내려놓은 지 열흘 만에 경선에 나섰다. 이번 경선은 의원 투표 80%에 권리당원 온라인 투표 20%를 합산하는 새 방식이었다.
당원 투표 첫날, 대통령은 선호투표제의 취지를 설명하는 글에 조 의원을 찍었다고 인증한 지지자의 글을 함께 공유했다. 당내에서는 이를 사실상의 지지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조 의원은 결선 없이 과반으로 후보가 됐고, 6월 5일 본회의 표결을 거쳐 입법부 수장에 올랐다.
대통령 취임 후 이 구조는 당을 넘어 선거로 확장됐다. 2025년 12월 8일 이 대통령은 X(옛 트위터) 게시글로 성동구 구정 만족도 기사를 공유하며 "정원오 구청장님이 잘하기는 잘하나 봅니다"라고 적었다. 현직 대통령의 이 한 줄에 정 전 구청장은 '명픽'으로 급부상해 서울시장 경선을 통과했다. 경찰은 지난달 공직선거법 위반 고발 사건을 불송치로 종결했다. 법의 선을 넘지 않았다는 판단은 존중한다. 그러나 그의 발언이 세운 기준은 법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그리고 6·3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광역단체장 12곳을 석권하고도 서울을 잃었다. 패인이 명픽 하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정권 심판론도, 후보 경쟁력도, 부동산 민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다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대통령이 사실상 지목한 후보를 최대 승부처의 주인들이 거부했다.
지난 8월 17일에는 이재명 정부 초대 국무총리였던 김민석 의원이 당대표가 됐다. '당정일치'를 주창해 온 그의 취임 일성은 "당은 이재명 대통령과 국민주권정부의 성공을 위해 뛸 것"이었다. 당대표 경선은 이번에도 선호투표제로 치러졌다. 당규를 바꾸면서까지 바꾼 선출 방식이다.
대통령이 "측근"이라 인정해 온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의 당선을 위해 다수의 국회의원이 지지를 호소하고 경선 막판에는 동료 후보 두 명이 사퇴하며 대의원 표를 몰아주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는 낙선했다.
이 체제는 이제 지지자들까지 심사해 맹종과 반역의 이분법으로 갈라치고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과거의 이재명을 열렬히 지지했고 그가 지향하던 가치와 원칙을 믿었던 많은 지지자들이 이젠 '반명'으로 낙인찍히고 있다.
상대원시장의 눈물은 어디에

▲12일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7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7월 15세 이상 취업자는 2913만 6000명으로, 1년 전보다 10만 8000명 증가했지만 15∼29세 청년층 실업률은 5년 6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상승하면서 청년층 고용 부진은 이어졌다. 사진은 이날 서울시내 한 대학교 일자리플러스센터 모습.
연합뉴스
"특권과 반칙에 기반한 강자의 욕망을 절제시키고 약자의 삶을 보듬는 억강부약 정치로 모두 함께 잘 사는 대동세상을 향해가야 합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 그리고 되고 나서도 그가 입버릇처럼 해오던 말이다. 집단지성을 믿는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런 말들은 그가 유권자와 맺은 계약과 같다. 지지자들은 그 말을 믿고 그에게 표를 준 것이다. 지배자가 아닌 대리인이 되겠다는 약속, 약자의 삶을 보듬겠다는 약속, 대동세상을 만들겠다는 약속. 이 계약은 지금도 유효하며, 유효하기에 아프다.
그런데 지금 중산층과 서민의 살림은 그 약속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1분기 가계동향조사에서 가계 실질소득 증가율은 0.4%에 그쳐 사실상 멈췄고, 실질 근로소득은 오히려 1.7% 줄었다. 상위 20% 가구가 쓸 수 있는 소득은 하위 20%의 6.59배에 달했다. 빈부 격차가 6년 만에 가장 크게 벌어진 것이다. 일자리는 더 심각하다. 7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청년 취업자는 1년 전보다 19만 1000명 줄어 45개월 연속 감소했고, 제조업과 건설업 취업자는 각각 25개월, 27개월째 내리막이다.
물론 과거로부터 비롯된 구조적 문제고 하루아침에 해결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약자를 보듬겠다던 정치가 받아 든 성적표로는 분명 초라하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의 마음을 모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상대원시장의 눈물이 가리킨 곳은 우리 사회 가장 어려운 사람들의 삶이었다. 그러나 명심과 명픽이 정치의 기준이 되면 정치 에너지는 필연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후보들은 유권자를 설득하는 대신 대통령, 혹은 그 위세를 빌린 사람들의 눈에 들기 위해 경쟁하고, 공천과 인선의 언어에서 절박한 바닥의 민심은 뒤로 밀린다.
민주적 정치 과정의 당연한 일부분인 쓴소리가 '반명'으로 낙인이 찍히는 정치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과거의 이재명이라면 이 낙인의 정치와 정면으로 부딪쳐 싸웠을 것이다. 낙인을 찍는 것이야말로 그가 절제시키겠다던 강자의 횡포 아니던가. 쓴소리는 반역이 되고, 소위 "묻지마!" 지지만 충성으로 인정받게 되면, 권력은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그 대가는 총선과 대선의 성적표로 돌아올 것이다.
다시 자문해 본다. 머슴론의 저작권자인 과거 이재명의 시각으로 현 상황을 보면, 지금 과연 누가 반명인가. 그렇게 갈라쳐서 정말로 지지자들, 나아가 주권자인 국민의 마음을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채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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