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스틸 주한 미국 대사가 지난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조정식 국회의장과의 접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주한 미국대사는 미국 대통령과 정부를 대표해 미국의 국익을 실현하는 외교관이다. 따라서 한국인의 혈통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해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대사가 양국 간 모든 현안을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도 없다. 중요한 외교·안보 정책은 백악관과 국무부, 국방부, 에너지부, 의회 등 미국의 복잡한 정책 결정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사의 역할을 단순한 연락책으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 대사는 주재국의 여론과 정서, 전략적 가치를 본국에 정확히 전달하고, 양국의 이해가 충돌할 때 접점을 찾아내며, 정상 간 합의가 실무 단계에서 이행되도록 촉진하는 핵심 외교 창구다. 특히 대통령과 의회, 행정부에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를 가진 정치인 출신 대사는 주요 현안을 공론화하고 정책 결정의 속도를 높이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미셸 스틸 주한 미국대사의 부임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스틸 대사는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을 거쳐 미국에 정착한 뒤 캘리포니아주 조세형평위원, 오렌지카운티 슈퍼바이저, 연방 하원의원을 지냈다. 이민자이자 아시아계 여성으로서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극복하고 미국 정치의 중심에 진입한 그의 삶은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스틸 대사는 연방 하원의원 재임 중 세입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조세·통상·경제정책을 다뤘다. 공화당 지도부와 행정부는 물론 양당 의원들과도 폭넓은 관계를 형성했다. 한미관계에서 안보뿐 아니라 관세, 투자, 조선업 및 원자력 협력이 중요한 의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이러한 의회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다.
남편 숀 스틸 역시 미국 정치권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인물이다. 변호사인 그는 캘리포니아주 공화당 의장을 지냈으며, 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해 왔다. 미국 대통령 선거와 연방·주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당 조직과 정치인들을 연결해 온 만큼 공화당 지도부와 연방 및 캘리포니아 정치권에 상당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부부가 함께 축적한 의회·행정부·정당 내 인맥은 한미 현안을 미국 정치의 중심부에 신속하게 전달하고 지지를 모으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다. 숀 스틸은 부인인 스틸 대사와 함께 활발한 서울 생활을 보내고 있다. 물론 배우자가 공식 외교정책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 정치권의 분위기를 이해하고 우호적인 공감대를 조성하는 데에는 간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스틸 대사는 한국계로서는 성 김 대사에 이어 두 번째, 한국계 여성으로는 최초의 주한 미국대사라는 점에서도 상징성이 크다. 미국에서 성공한 뒤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 미국을 대표하는 대사로 부임했으니 말 그대로 '금의환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중요한 것은 화려한 이력과 상징성을 넘어 임기 중 어떤 실질적인 성과를 남기느냐이다.
역사에 남을 활약을 한 주한 미국대사들
과거에도 한미동맹이 중대한 고비를 맞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한 주한 미국대사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재임한 필립 하비브 대사다. 주한미군 감축과 북한의 군사적 위협 등으로 한미관계가 불안정했던 시기에 그는 한국의 안보 우려를 워싱턴에 적극적으로 전달하며 동맹의 균열을 막는 데 힘썼다.
박정희 정권의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구출에도 적극 참여한 그는 레바논 마론파 혈통으로 한국에 많은 이해를 보였다. 훗날 미국의 대표적인 분쟁 조정 외교관으로 평가받은 하비브는 대사가 본국의 지시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장의 위험을 정확히 판단해 본국의 정책에도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재임한 제임스 레이니 대사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제1차 북한 핵 위기가 한반도를 전쟁 직전까지 몰고 갔던 시기에 한미 양국 지도부 사이의 소통을 강화하고 긴장을 관리하는 데 기여했다.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싸고 한미 간에 견해 차이가 나타날 때에도 양국 정부가 동맹의 신뢰를 유지하도록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두 사람의 사례에서 보듯 역사에 남는 대사는 본국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하면서도 주재국의 전략적 가치와 절박한 안보 우려 해소, 민주적 가치의 구현 필요성 등을 본국에 설득력 있게 전달한 사람이다.
조선업 협력: 양국에 정당한 기회가 돌아가는 상호이익 모델

▲지난 3월 12일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의 모습. 양국의 협력은 미국 해군력과 해양산업 기반을 재건하는 동시에 한국 조선업에 새로운 시장을 열어주는 상호보완적 사업이 될 수 있다.
연합뉴스
스틸 대사 역시 한국계라는 상징성을 넘어 한미동맹의 새로운 장을 연 대사로 역사에 남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 세 가지 역점 과업을 당부하고 싶다.
첫째는 한미 조선업 협력을 실질적인 상호이익의 사업으로 발전시키는 일이다. 현재 미국의 급박한 사정 등을 감안할 때 미국이 가장 원하는 경협 사업은 조선 분야다. 현재 미국은 상선과 군함 건조 능력의 약화로 심각한 공급망 문제에 직면해 있다. 반면 한국은 세계적인 조선소와 숙련 인력, 우수한 설계·건조·정비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양국의 협력은 미국 해군력과 해양산업 기반을 재건하는 동시에 한국 조선업에 새로운 시장을 열어주는 상호보완적 사업이 될 수 있다.
다만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와 기술 제공만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미국 조선소에 한국의 자본과 인력이 투입되는 만큼 한국 기업도 미국 함정의 건조·정비·보수 시장에 공정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관련 법과 제도를 합리적으로 개선하고 공동건조, 공동 기술개발, 인력양성 및 공급망 구축으로 협력의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
미국에는 일자리와 함정 건조 능력을, 한국에는 시장 진출과 기술협력의 기회를 제공하는 진정한 상호이익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스틸 대사가 미국의 요구를 한국에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 조선업에도 합당한 기회와 성과가 돌아오도록 양국 정부와 의회를 연결해 주기를 바란다.
핵추진잠수함: 동맹의 억제력을 극대화하는 방어적 전력
둘째는 한국의 핵추진잠수함 건조를 지원하는 일이다. 백악관과 펜타곤, 서울의 대사관과 주한미군을 잇는 가교 역할이 현재 비어 있다. 북한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과 핵무기 능력을 지속적으로 고도화하고 있고, 중국과 러시아의 수중전력도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디젤 잠수함만으로 북한의 전략잠수함을 장기간 추적하고 광대한 해역에서 해상교통로를 보호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한국이 추진하는 것은 핵무기를 탑재한 전략핵잠수함이 아니라 저농축우라늄을 연료로 사용하는 공격형 핵추진잠수함이다. 이는 핵무장 수단이 아니라 북한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위협을 추적·감시하고 한미 연합억제력을 보완하는 방어적 전력이다. 한국이 더 큰 역할과 책임을 맡게 되면 미 해군의 작전 부담도 줄어든다. 따라서 한국의 핵추진잠수함 확보는 미국의 안보 이익과 배치되는 사업이 아니라 동맹의 역할 분담을 실질적으로 강화하는 사업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핵추진잠수함 건조에는 원자로 기술뿐 아니라 핵연료 확보, 국제원자력기구와의 협의, 한미 간 별도 약정 등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대사가 이 모든 문제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한국의 핵추진잠수함이 미국의 부담을 줄이고 동맹의 해양억제력을 강화한다는 점에 대해 백악관과 국무부, 국방부, 에너지부 및 의회를 설득할 수 있다. 양국 정상의 원칙적 합의가 선언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핵연료 공급과 기술협력 체계로 이어지도록 가교 역할을 해주기 바란다.
원자력 협력: 우라늄 농축·재처리의 제도적 공간 확보

▲새울 3, 4호기 원전 건설 전경. 한국의 높은 기술 수준과 모범적인 비확산 실적을 바탕으로 예측 가능하고 투명한 핵연료주기 협력체계를 구축한다면 한미 원자력동맹은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다.
원자력안전위원회
셋째는 한국의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문제에서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는 일이다. 한국은 세계적인 원전 건설·운영 능력을 보유한 국가이지만 핵연료의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관리에서는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다. 에너지 안보와 원전 수출 경쟁력, 사용후핵연료 문제를 고려하면 현행 한미 원자력협력 체제를 시대 변화에 맞게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한국이 요구하는 것은 핵무기 개발을 위한 무제한적인 권한이 아니다. 한미 원자력협력협정과 국제 비확산 체제,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를 철저히 준수하면서 저농축우라늄의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하고 사용후핵연료를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제도적 공간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일본 등 다른 동맹국과의 형평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높은 기술 수준과 모범적인 비확산 실적을 바탕으로 예측 가능하고 투명한 핵연료주기 협력체계를 구축한다면 한미 원자력동맹은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과업은 서로 분리된 사안이 아니다. 조선업 협력은 양국의 해양산업과 군사력을 함께 강화하고, 핵추진잠수함은 공동의 안보 위협에 대응하며, 농축·재처리 협력은 에너지 안보와 원자력 산업의 미래를 뒷받침한다. 결국 세 과업은 한미동맹을 과거의 군사동맹에서 조선·원자력·첨단기술을 아우르는 미래형 전략동맹으로 발전시키는 하나의 국가적 과제다.
스틸 대사는 한국계라는 점이 입지 확보에 호재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정치적·이념적 공세에 직면할 가능성도 있다. 한국계라는 이유로 한국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는 기대가 제기될 수 있고, 반대로 미국의 국익을 강조하면 한국을 외면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보수와 진보 어느 한쪽의 시각에 서라는 요구도 뒤따를 수 있다. 그러나 대사가 이러한 국내 정치적 논쟁에 휘말려 임기를 소진해서는 안 된다. 한국 정치에 개입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도, 근거 없는 이념 공세에 흔들려 필요한 역할을 주저해서도 안 된다.
스틸 대사가 집중해야 할 것은 특정 정파나 이념이 아니라 한미 양국의 공동 국익이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되 불필요한 진영 논쟁과는 거리를 두고, 조선업 협력과 핵추진잠수함, 핵연료주기라는 세 가지 전략적 과업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비판을 넘어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며, 한국계 미국대사에게 쏟아지는 기대와 부담을 역사적 성취로 바꾸는 길이다.
임기 중 이들 과업의 실질적인 진전에 기여한다면 스틸 대사는 단지 최초의 한국계 여성 주한 미국대사를 넘어 한미동맹의 새로운 지평을 연 역사적인 대사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성공은 미국의 국익과 한국의 국익이 반드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협력을 통해 함께 커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다.
필립 하비브와 제임스 레이니가 한미동맹의 위기 속에서 이름을 남겼듯이, 스틸 대사는 동맹이 새로운 산업·기술동맹으로 도약하는 전환기에 자신의 이름을 새길 기회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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