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8.31 07:19최종 업데이트 26.08.31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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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박진만
국가대표 박진만2000년부터 2008년까지, 국가대표 주전 유격수는 박진만이었다. 그 시간 동안 한국인들은 박진만과 함께 긴장된 순간들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다.연합뉴스

IMF 경제위기와 함께 기나긴 해태 타이거즈의 왕조 시대가 막을 내렸다. 그리고 좌초한 해태, 쌍방울의 선수들을 게걸스럽게 쓸어 담은 재계의 공룡 삼성과 현대가 야구장에서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양대 재벌 라이벌전의 시대가 얼마간 이어졌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 시대에 삼성이 현대를 압도한 적은 없다. 현대는 1998년 창단 3년 차에 첫 우승을 차지했고, 2000년과 2003년, 2004년까지 네 차례 한국시리즈를 제패했다. 반면 삼성은 꾸준히 가을야구에 진출했지만 번번이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다. 2004년에는 현대와 폭우 속 진흙탕에서 뒤엉키는 한국시리즈 9차전까지 가는 혈투를 벌이고도 준우승에 머물렀다.


삼성이 현대를 누르기 시작한 것은, 현대그룹이 좌초하고 자금난에 빠지는 뜻밖의 기회를 틈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거액이었던 99억 원을 쏟아 부어 맞은 편 현대의 심정수와 박진만을 끌어들인 2005년이었다. 그중에서도 60억이 심정수의 몫이었지만 화룡점정은 박진만이었다. 4년의 계약기간 중 2년간 대활약했지만 나머지 2년을 통으로 날린 심정수가 아쉬운 대로 밥값 정도 했다면, 박진만은 이적 2년 차인 2006년에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며 삼성의 연속 우승을 이끌었고, 4년 내내 기대를 넘치게 채우고 한 번 더 FA 계약을 맺었다.

그렇게 박진만의 손에서 야구의 시대가 바뀌었다. 박진만은 2003년부터 2006년까지 4년 연속 우승을 경험했다. 그중 앞의 두 번은 현대에서, 그리고 뒤의 두 번은 삼성에서였다. 현대 왕조의 마지막과 삼성 왕조의 시작을 박진만이 지탱했다.

선수 하나가 시대를 바꾼다는 말은 과장이다. 하지만 박진만은 시대전환의 상징성을 가진 선수다. 그때 현대에서 삼성으로 옮겨간 것은 단순한 유격수 한 명이 아니라, 야구의 주도권을 한 도시와 구단에서 다른 도시와 구단으로 넘기는 전령이었다.

강심장 소년, 전설을 만나다

1996년 인천고를 졸업한 박진만은 인천에 입성한 현대 유니콘스의 고졸 우선지명을 받고 그 팀의 창단멤버가 됐다. 그리고 마침 그 해 42세의 나이에 창단감독으로 깜짝 발탁된 전설적 유격수 김재박의 지도를 받으며 한국 최고의 유격수로 성장했다. 수비수로서 가지고 있던 재능이 지체 없이 만개했고, 데뷔 시즌 내내 2할대 후반을 유지한 타격도 더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가장 큰 재능은 큰 경기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심장이었다.

"현대 창단 첫해에 한국시리즈에 나갔는데, 물론 2년 전에 한 번 경험한 선수들이 꽤 있긴 했지만 신인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지. 이긴다면 인천의 첫 우승이니까. 심지어 청소년대표 때나 연세대 시절에 큰 경기를 많이 경험했다는 박재홍도 바짝 얼어 있더라고. 그런데 신기한 게 세 살 더 어린 박진만은 그게 없었어. 얘는 도대체 왜 긴장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반응이더라고." (김경기, 전 SK 코치)

'인천의 아들'이라 불리던, 당시 현대 유니콘스의 주장이자 4번 타자로서 선수단의 중심이던 김경기의 회상이다. 큰 경기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사람이 되지 않는 것. 관중이 많아지고, 상대가 강해지고, 경기의 승패에 걸린 것이 많아지더라도 연습장에서 하던 야구를 그대로 하는 것. 그것이 박진만의 특별한 점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수비에는 얼핏 불가사의한 구석이 있다. 그는 스승 김재박을 비롯해 이종범, 류중일, 혹은 유지현이나 김민호, 김민재 같은 한국 유격수의 계보에 이름을 올려온 전설적인 유격수들과 비교할 때 어깨도 약하고 발도 느린 데다, 특별히 번뜩이는 재치나 파격적인 창의력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그는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움직임으로 공을 잡아 가장 필요한 지점으로, 딱 필요한 만큼의 속도와 강도로, 실수 없이 던지는 선수였다. 그래서 그의 수비는 화려함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어려운 타구를 처리하는 과정을 전혀 어렵지 않게 보이게 만드는 수비수였다. 그래서 그의 수비에 관한 기억은, 특별한 장면들이 아니라 그 순간을 지켜보며 내내 편안했던 이들의 마음과 연결되어있다.

'편안했던 마음'으로 기억하는 유격수

인천으로 돌아온 박진만
인천으로 돌아온 박진만야구선수 박진만은 인천에서 꽃피워 대구에서 전성기를 보냈고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선수 인생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지금은 대구의 팀을 지휘하고 있다.SK 와이번스

그래서 박진만은 한국 야구가 가장 긴장해야 했던 순간 가장 긴장된 자리를 지켰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부터 2008년 베이징올림픽까지, 박진만은 국가대표팀 부동의 유격수였다. 그 시기는 '아마추어 한정'이었던 이전까지의 세계선수권대회의 무대를 넘어 프로를 망라한 모든 나라들이 가진 야구기술 전체가 동원돼 겨루기 시작하던 때였고, 그래서 이미 나라 안에서 압도적인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고 있던 한국 야구가 세계 무대에서 자신들의 수준을 증명해야 했던 순간이었다.

그 거창한 무대의 가장 부담스러운 자리에서 박진만은 역시나 왜 긴장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무심하게 수많은 강습타구와 기기묘묘한 돌발 상황들을 처리하면서, 한국대표팀이 이룬 업적들의 토대를 놓았다.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과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WBC의 1회 4강과 2회 준우승에 이르기까지 그의 수비가 차지하는 지분이 이승엽 이대호 김태균의 홈런보다 적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천고를 졸업하고 현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 고향에 첫 우승을 선물하며 인천 야구의 황금기를 이끈 그는 흔히 '인천 야구의 적자'라 불린다. 하지만 그가 프로선수로서 절정기를 보내며 대구 야구의 중흥기를 이끌었고 감독이라는 귀한 기회를 얻은 곳은 삼성 라이온즈다. 대개 한 지역을 상징하는 인물이 움직일 때는 '배신자'라는 낙인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박진만은 인천과 대구에서 동시에 사랑받은 행운아다.

물론 삼성 유니폼을 입고 뛰던 시절 유독 문학구장에서 실책이 잦아 '인천 스파이'라는 야유를 듣기도 했고 말년을 보내며 '전 같지 않은 몸짓'을 노출하던 SK에선 '대구 퇴물'이라는 비난을 들은 적도 있다. 물론 현대가 인천을 떠나 수원에서 표류하던 시절, 서운해하던 고향 팬들의 시선에 말 못 할 마음고생을 해야 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애정의 다른 표현이었을 뿐, 아주 돌아앉는 이들은 드물었다. 그는 유독 우승에 목말랐던 두 도시 인천과 대구에 우승을 선물했고, 또 가장 긴장된 순간에 편안함을 제공했다. 특별히 접점이 없던 그 두 도시의 팬들이 함께 웃으며 공감을 느낄 수 있는 드문 순간 중 하나가, 아마도 그 두 도시가 나누어 누렸던 박진만이라는 선수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때일 것이다.

인천과 대구의 공감, 박진만과 함께한 행운

박진만 감독과 삼성의 7번 유격수 이재현
박진만 감독과 삼성의 7번 유격수 이재현한국 프로야구에서 등번호 7번은 주전 유격수를 의미한다. 실업야구와 프로야구 초창기에 유격수의 대명사였던 김재박으로부터 시작된 전통이다. 박진만은 그 김재박이 지휘하는 팀에서 7번을 달고 뛰었고, 지금 박진만이 지휘하는 팀의 7번은 이재현이다. 이재현이 보여준 모습보다도 훨씬 더 큰 기대를 모으는 이유다.연합뉴스

아마도 박진만은 한국 야구에서 가장 조용한 거인 가운데 한 명일 것이다. 이승엽처럼 압도적인 홈런 기록으로 시대를 장식한 것도 아니고, 선동열처럼 마운드 위에서 난폭하게 군림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사건이나 말썽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선수도 아니다. 그는 그저 오랫동안 충분할 만큼 좋은 야구를 했다. 어려운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중요한 경기에서 자기 몫을 했다. 그리고 어느새 현대의 우승과 삼성의 우승, 인천의 영광과 대구의 영광 사이에 자신의 이름을 깊이 새겨놓았다.

그래서 박진만을 좋아했던 팬들에게도 그를 크게 외친 기억이 많지 않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도 저것도 그가 있어서 가능했음이 떠오르고, 그래서 '그가 있을 때가 참 좋았다'고 혼잣말하게 된다. "박진만이 있어서 좋았다." 수비수가 팬들의 기억에 남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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