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9일, 새마을운동중앙회가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개최한 '새마을 외교 그룹(SDG) 제1차 회의'에 참석한 주한 외교사절과 국내외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새마을운동중앙회
반식민주의 철학자인 실비아 윈터는 식민주의 속에서 인간의 표준이란 백인, 그리고 남성 성인을 기준으로 해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식민 지배를 기반으로 그 영역을 확장해 온 '국제보건'은 여전히 그 '표준'을 기반으로 돌봄 받을 권리를 판별한다.
한국은 오랫동안 그 '표준'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 온 나라다. 그리고 이제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엄연히 고소득국가의 반열에 올라선 지 오래다. 많은 한국 시민이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한국의 문화는 세계 시장에서 세련된 상품으로 팔려나가고,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유학생들이 줄을 선다. 그러나 이러한 위치를 차지하기까지는 무엇이 있었을까? 한국의 근대사가 증언하는 것처럼 노동자 탄압, 빈민 강제 이주, 장애인 불임과 차별, 집단학살, 젠더화된 착취와 억압이 있었다.
문제는 한국이 '표준'을 달성하며 이제 한국과 같은 위치 그 자체를 수출하고자 나섰다는 데 있다. 현재 에볼라로 고통받고 있는 콩고에 한국이 지난 20년간 꾸준히 보낸 것은 한국식 근대화의 대표 격인 '새마을운동'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은 새마을 지도자 교육을 통해 이와 같은 근대화의 방식을 수출했고, 2004년에는 수료생을 중심으로 콩고새마을회가 세워졌다. 아프리카개발은행과 한-아프리카 경제협력 신탁기금(KOAFEC)은 에티오피아와 코트디부아르,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새마을운동 모델빌리지' 사업을 벌였다.
미국도, 유럽도 아닌 한국의 사례가 아프리카 국가로 손쉽게 '이식'된 배경에는 후발적으로 근대화를 달성하게 된 한국의 위치, 그리고 '발전'의 이데올로기로 기업의 부를 늘리고자 하는 한국의 소망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은 이제 '규범'을 만드는 권력을 쥐고, 한국이 겪어온 현대사를 국제적으로 확산하기를 꿈꾸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발전'이라는 말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 비판적 발전학 연구자들이 지적해 온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발전 프로젝트'는 1949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저발전 지역'에 대한 기술·재정 원조를 선언하면서 본격적으로 출발했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땅들은 해방된 주체가 아니라 '아직 발전하지 못한' 인구로 다시 분류됐고, 산업화한 국가의 모습이 곧 인류 보편의 도착지로 상정됐다. 발전이란 처음부터 특정한 지식과 감각을 부과하고 다른 것들을 배제하는 담론이었다는 것이다. 발전은 보편적이고 선형적이며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과정으로 자신을 정당화하지만, 실제로는 성장을 영구적 동력으로 삼는 서구적 근대화의 다른 이름이며, 그 과정에서 여성과 지역의 지식을 비가시화한다.
발전의 실패는 언제나 구조가 아니라 '발전하지 못한 이들'의 태도 문제로 번역된다. 근면·자조·협동의 규율을 마을 단위에 심고, 성과를 '모델빌리지'로 전시하는 새마을운동의 문법은 이 담론 구조를 대표적으로 반복하는 사업이다.
그렇다면 한국이 새마을운동을 수출할 때, 한국은 자신이 오랫동안 그 아래 놓여 있었던 위계, 즉 '발전한 자'가 '발전해야 할 자'를 정의하고 훈육하는 권력의 자리를 함께 누린다. 이와 같은 '원조'가 에볼라 국면에 주는 함의 역시 연장선에 있다. 의료가 국가 장치의 일부로서 인구를 지배적 가치에 따라 재생산해 왔듯, 발전 역시 중립적 기술이 아니라 정치의 기술이다. 발전이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세련된 모델의 이식이 아니라 발전의 재정치화다.
그러니 현재 국제보건계 일각에서 표출되는, '세계를 이끈'다는 사고나 '우리'의 생각을 심는다는 말도 모두 공포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관련 기사 :
이종구 이사장 "국제보건문제 다루는 법 배워야 세계 이끈다"). 더욱이 세계의 보건은 지구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이 함께 만드는 것이지, 한국 국적의 인물이 WHO 사무총장에 당선돼서, 심지어 의사이고 '전문가'라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다 (관련 기사:
의협 "WHO 사무총장에 차지호 의원 출마 환영").
한국의 현대사가 국제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새마을'로 대표되는 근대화의 성공 매뉴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성장이 누구의 몸을 밟고 이뤄졌는지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폭력에 맞서 싸워 온 노동자와 빈민과 장애인과 여성들의 역사다. 그러므로 한국이 져야 할 책임은 미국이 비운 자리를 계산하며 '규범 메이커'의 지위를 탐하거나, 국제정치적 혼란 속에서 중재 능력을 잃어가는 국제기구에 자국 인사를 수장으로 앉히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한국이 져야 할 막중한 책임은 그것은 국제사회가 WHO와 아프리카 CDC의 위기 대응 재정에 조건 없이 기여하도록 중재하는 데, 백신과 치료제의 지식·기술을 독점하는 체제에 균열을 내는 편에 서는 데, 그리고 원조의 성과를 한국의 이름이 새겨진 모델빌리지로 전시하는 대신, 무엇이 좋은 삶인지를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정의할 권리를 지지하는 데 있다.
요컨대 한국이 거쳐온 역사는 2026년의 한국에게 묻는다. 위기의 시대, 한국은 표준을 달성한 자의 자리에서 표준을 수출할 것인가, 아니면 표준 바깥으로 밀려난 이들의 자리에서 연대를 확장할 것인가. '공중보건 위기 대응' 이란 늘 사회적인 것이었다. 에볼라 대응 역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