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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안녕하세요?

 

우선, 무턱대고 선배님이라 부르는 점,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두 분의 신념어린 활동과 철학은 언제나처럼 저의 삶에 길잡이가 되어주셨기에, 무례를 무릅쓰고 감히 선배님이라 불러 봅니다. 진정한 선배란, 저에겐 늘 그런 존재들이었으니까요.

 

정치·사회의 세계관 놓고 자유롭게 경쟁해야 

 

선배님.

 

2002년이었습니다. 민주노동당의 평범한 평당원이었던 저는, 역시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권영길 후보의 대선 당선을 위해 나름 열심히 뛰어 다녔습니다. 새벽시장을 돌며 전단지를 돌리고, 낮에는 길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며, 밤에는 지원 유세에 따라 다니면서 '진정한 진보 후보'의 당선을 위해 힘을 보탰었죠.

 

대학 졸업을 코앞에 둔 꽉 찬 20대의 끝을, 저는 그렇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다른 당의 선거운동원들이 받고 있었다는 '일당'은, 가난한 정당의 소속원이었던 저희 같은 사람들에게는 꿈 같은 일들이었죠. 부재자 투표의 정당 참관인으로 하루 종일 '근무'하고 받은 저의 '합법적 수당'마저, 당의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고스란히 강탈을 당했으니까요^^;;

 

물론, 저의 이런 활동을 걱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주변사람들도 있었어요. 어떤 선배는 "너희의 그런 행동이 결국에는 이회창의 집권을 가져다 줄 거야" 라고 협박(?)했고, 친했던 교수님은 "자네는 결국 융통성 없는 좌파의 한계를 극복 못하는군. 자네 눈에는 노무현과 이회창이 비슷한 사람으로 보이는가?" 라며 '질책'을 하시더군요.

 

섭섭하기도 하고, (아주 약간은) 걱정도 했지만, 저의 신념을 바꿀 생각은 없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당시는 민주주의 시스템이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었고, 따라서 독재·민주의 낡은 구도가 아닌 정치·사회적 세계관을 놓고 각자가 자유롭게 경쟁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신념이었기 때문이죠. 

 

선배님.

 

이런 신념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한국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반공주의·천민 자본주의·지역주의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결국에는 계층에 기반한 정책 정당의 구도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모호한 민주당보다는, 힘들더라도 사회 민주주의(혹은 그 이상)를 추구하는 진보정당에 지지와 성원을 보내야 한다고 지금도 확고히 믿고 있죠.

 

그런 이유로, 두 분이 민주노동당 일부 당원들의 '종북주의'를 비판하며 당신의 집을 박차고 나가실 때, 저 또한 어느 정도 공감을 했었습니다. 어떤 선배는 "노·심의 행동은 자기 집 우물에 독을 풀고 나간 격이다"라고 크게 분노했었지만, 저는 선배님들의 결단을 마음속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정글과 같은 약육강식의 사회를 극복하고자 하는 두 분의 노력과 열정을 깊이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선배님의 새로운 정치 실험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저 같은 필부는 모르는 충분한 이유와 명분이 있을 것이라 믿었었죠. 그런 믿음이 있기에, 어려운 와중에서도 '새로운 세상의 밀알'이 되고자 노력하고 계신 선배님의 열정과 노력을 지금도 열렬히 지지하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폭주 기관차' 일단은 막아 보자는 것

 

그런데 선배님!

 

지금의 상황은 저의 존경심과는 별도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02년 혹은 2006년의 상황과는 확연히 다른 정세에 놓여있다는 생각이 (선배님께서는) 들지 않으십니까?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합리성과 공공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그때와, 지금의 암울한 현실은 도저히 같은 맥락에서 해석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미네르바'나 '촛불집회'의 사례에서 보듯이, 기본적인 언론·결사의 자유조차 보장되지 않는 현실을, 저보다 선배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다수의 국민이 반대함에도, '치수와 관광'을 위해 온 나라의 젖줄들을 '거대한 정화조'로 '재창조'하는 4대강 사업은 또 어떻습니까? 경제 살리기라는 미명하에, 다른 나라에 비해 그다지 높지도 않았던 법인세를 대폭 '바겐세일'하고, 얼마 되지도 않던 복지예산을 (실질적으로) 삭감해버린 현실은요? 무엇보다도, 군사정권의 '오랜 추억'을 회고하게 하는, 공포의 북풍정국은 정말 어떻습니까?

 

합리성에 기반한 민주사회의 기본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의 성과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6월 항쟁이후 지금까지, 점진적으로 발전해온 1987년 체제가 와해되고 있습니다. 

 

과거 선배님과 저희가 '한나라당 2중대' 라는 터무니없는 비아냥까지 들어가며 진보정당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근거는, 사회의 기본적 합리성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타깝게도 그 기본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데, 지금은 선배님들이 피땀 흘려 이룩한 민주사회의 기본적 명제를 수호해야 할 시기라 생각합니다. 또다시, 이분화 되어가는 구도에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하는 진보정당의 현실이 마음 아프시겠지만, '역사적 사명감'보다는 '현실적 생존'을 위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주당(혹은 유시민)이 좋아서 그 분들과 함께 가자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상대로 민족을 상대로 브레이크 없이 역주행하는 '폭주 기관차'를 일단은 막아 보자는 것입니다.

 

선배님께서는, 민주당과 단일화를 하면서 일정한 지분을 보장받는 민주노동당의 행태에 대해 우려와 걱정의 시선을 보내고 계시겠죠. 찜찜한 마음은 저도 마찬가지이지만, 새롭게 구성될 지방 정권에서 지분을 획득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서유럽의 의원 내각제 국가에서는 이런 경우가 흔히 있지 않습니까?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라도 행정의 한 축에 참여하게 된다면, 진보정당에 대한 대중들의 (정치·행정 수행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어느 정도 해소 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저의 이런 잡변 또한, 지극히 몽상적이고 유아적인 것일 수도 있겠죠. 권력을 분점 한다는 약속을 민주당이 얼마나 지킬지도 미지수고, 사실 그러기에는 민주당(혹은 유시민)과 진보정당의 세계관이 꽤 다르다는 사실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아무것도 막지 못한다면, 선배님의 진정성은 또다시 터무니없는 의심의 도마 위에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아무것도 막지 못한다면...

 

선배님.

 

야구에 희생번트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번트를 친 자신은 죽지만, 팀 전체의 능력은 높아지죠. 자신은 죽고 남은 사는 서글픈 역할이지만, 그들이 있기에 승리의 희망을 기약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슬픈 현실이지만, 87년 대선에서 백기완 선생이 걸으셨던 것처럼,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희생번트' 한번 쳐 주시길 기원합니다.

 

사람들은, 역사의 퇴행을 막기 위해 장렬히 전사한 선배님에게 진심어린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될 겁니다. 만일 또 다시, (다른 선수를 위해) 희생번트를 누군가가 요구한다면, 당장 저부터 나서서 그놈들의 입을 막아 버리겠습니다. 


#노회찬#심상정#희생번트#진보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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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에게 사회와 역사를 가르치며 먹고사는 장똘뱅이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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