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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없이 작은, 한없이 위대한> 책표지.
 <한없이 작은, 한없이 위대한> 책표지.
ⓒ 이케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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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의 생리학자 배리 마셜은 위장병 전문의였다. 그는 위궤양과 관계 있다고 알려진 헬리코박터 파이로리 박테리아가 사람에게 위궤양을 일으킬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문제는 이 궁금증이 실험 동물을 이용하는 방법으로는 풀 수 없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실험용 돼지들은 헬리코박터 파이로리를 투여해도 아무런 병을 일으키지 않았다.

놀랍게도 마셜은 그 자신이 실험 동물이 되기로 결심했다. 1984년 어느 날, 그는 아주 '엽기적인' 실험에 착수했다. 그는 헬리코박터 파이로리 세포가 든 액체 한 접시를 벌컥벌컥 마셨다. 엿새가 지난 아침, 그는 구토를 하고 입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지나면서 그의 위장은 '납덩어리'처럼 무거워졌다.

여드레가 지났다. 마셜은 위 조직 일부를 잘라서 하는, '생검'이라는 이름의 조직 검사를 했다. 그의 위 조직은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가 붙여 있는 위궤양 초기 상태로 분석되었다. 헬리코박터 파이로리 균과 위궤양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입증된 것이다. 이 발견으로 그는 동료 연구자인 로빈 워런과 함께 200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이 책 전체에 두루 실려 있는 흥미진진한 일화들 중의 하나다.

미생물이 없었다면 우리도 존재할 수 없었다고 단언

<한없이 작은, 한없이 위대한>은 '보이지 않는 지구의 지배자 미생물'에 관한 책이다. 미생물은 말 그대로의 미미한 생물이 결코 아니다. 저자는 미생물이 없었다면 우리도 존재할 수 없었다고 단언한다. 미생물은 30억 년 전의 '산소 혁명'을 통해 지금과 같은 지구를 만든 주인공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 미생물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대중적인 문체로 쉽게 설명해 준다. 저자의 시선은 광범위하다. 미생물에 관한 일반론과 유형론, 미생물이 살아온 장구한 역사가 펼쳐져 있다. 마당의 잔디밭과 화장실 양변기, 바다 깊은 곳에 살고 있는 다종다양한 미생물의 세계가 꼼꼼하게 그려져 있다.

저자는 제3자의 객관적인 시선으로 미생물에 관한 모든 것을 전하고 있다. 저자에게 미생물은 호불호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미생물을 '좋다, 나쁘다' 식으로 평가하는 것에도 거의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그런 서술 시점이나 서술 태도 덕분일까. 나는 저자가 건조하게(그렇지만 흥미진진하면서도 쉽게) 서술해 놓은 문장들을 읽으면서 자주 나만의 상상 세계로 빠져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만들어가는 그들만의 거대한 세계와, 그들이 인간 세계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이 머릿속에 자연스레 그려졌기 때문이다. 책에 소개된 몇 가지 역사적인 사례를 보자.

진핵세포 미생물로 불리는 균사는 버섯이라는 가시적인 구조체를 형성하는 미생물이다. 균사는 토양의 핵심을 이룬다. 토양 1그램에는 9미터에서 90미터에 이르는 균사체가 들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책에 소개된 균사는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1992년 아메리카 대륙 북부에서 발견된 균사는, 한 개의 포자에서 자라난 하나의 균류가 약 15만 제곱미터를 덮고 있는, 1500년 정도 되는 나이를 갖고 있었다. 무게는 다 자란 흰긴수염고래에 버금가는 100톤 이상이었다.

그 뒤에도 진핵균 학자들은 1제곱킬로미터와 1.3제곱킬로미터를 넘는 단일 균류를 잇달아 발견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들 중에는 나이가 2400세를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도 있었다. 인류의 역사보다 긴 세월을 살아온 셈이니 놀라울 따름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생명체가 미생물이라는 저자의 단언이 거짓말처럼 다가온다. 한없이 작지만 거대하기만 한 미생물의 역설이 놀랍기만 하다.

맥각중독(ergotism)은 호밀 이삭에 있는 '닭의 발톱'(보리나 호밀의 종자에서 몇 개의 암술 부분이 눈에 띄게 검붉은 색으로 바뀐 부분의 별칭. 보리 깜부기를 떠올리면 됨.) 때문에 생긴다. 이 닭의 발톱에는 클라비켑스 푸르푸레아 같은 균류 미생물이 들어 있다. 그런데 밀가루에 닭의 발톱이 소량이라도 들어 있으면 밀가루가 극도로 유해한 알칼로이드 에르고타민(맥각)으로 오염된다고 한다.

맥각중독의 증세는 공포스러울 정도다. 1951년 프랑스 프앙트 생 데스프리에서 맥각중독 사고가 일어났다. 인구 300명의 작은 마을에서 다섯 명이 사망했다. 중독 증세를 보인 나머지 사람들은 호랑이에 쫓기거나 죽음이 자신의 뒤를 뒤쫓는 환상을 보았다. 몸을 비틀고 꼬며 벽을 타고 올라가려는 고양이, 입과 이빨에서 피가 날 때까지 돌을 씹어대는 개도 있었다고 한다.

1692년 미국 메사추세츠에서 일어난 그 유명한 세일럼 마녀재판에도 맥각중독이 끼어들어 있다. 세일럼 주민들은 녹병 감염으로 밀이 다 죽어버리자 호밀로 빵을 만들어 먹었다. 이때 마녀라고 비난을 받은 여자들은 성찬식 빵을 먹은 뒤 경련과 환각, 타는 듯한 감각을 느끼고 따끔거리거나 물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을 바라보던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아마도 그들은 비운의 여인들을 더욱 확실하게 마녀로 확신했을 것이다. 그 정도면 마녀사냥 광풍의 한 가운데 맥각중독이 끼어 있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좀 더 거창하게 보면 미생물이 인류 역사의 전개에 알게 모르게 개입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미생물은 우리 이웃이자, 제어할 수 없는 적

당연하지만, 미생물은 우리의 일상과 생활 속에서도 큰 존재감을 갖는다. 보톡스(botox)와 디스포트(dysport)는 동안(童顔)과 젊음을 유지하는 데 쓰이는 대표적인 상품이다. 동시에 이들은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물질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보툴리눔독소(botulium toxin)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보툴리눔독소는 치명적인 독성물질인 스트리크닌(strychnine)보다 1만 배 이상 독성이 강하다고 한다. 보툴리눔독소는 0.1킬로그램 정도만으로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그 위력이 막강하다. 청춘의 열정을 기대하며 보톡스 주사를 즐기는 이들 중에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미생물은 우리에게 친절하게 도움을 주는 이웃이자, 가끔은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적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미생물에 대해 좀 더 많은 사실을 앎으로써 '인간'으로 불리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겸손하게 인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미생물의 과학을 대중적으로 쉽게 풀어 쓴 이 책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한없이 작은' 모습을 진지하게 깨닫는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

덧붙이는 글 | <한없이 작은, 한없이 위대한> (존 잉그럼 지음, 김지원 옮김 | 이케이북 | 2014. 1. 17. | 447쪽 | 19,5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한없이 작은, 한없이 위대한 - 보이지 않는 지구의 지배자 미생물의 과학

존 L. 잉그럼 지음, 김지원 옮김, 이케이북(이미디어그룹)(2014)


#<한없이 작은, 한없이 위대한>#존 잉그럼 지음#김지원 옮김#이케이북#미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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