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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머니가 귤 한 박스를 교과전담실에 놓고 간다. 초등학교에서 담임을 맡지 않고 특정 교과만 가르치는 교사들의 교무실을 교과전담실이라 한다. 조금 있더니 다른 어머니가 떡을 들고 왔다. 한 학기를 잘 마쳤다고 전교어린이회 회장단 어머니들이 준비한 선생님들 간식이란다.

교과전담 선생님들의 의견은 돌려보내는 쪽으로 모아졌다. 우리의 뜻을 들은 전교어린이회장 어머니가 오셨다. 나와 함께 학교운영위원을 했던 분이시라 잘 아는 사이다.

"한 학기 동안 잘 가르쳐주셔서 고마와서 간식 좀 가져온 것인데요."
"봉급 받습니다."
"이게 뭐 촌지도 뇌물도 아니고 먹는 음식이잖아요. 음식 원래 나눠 먹는 건데…."
"전교어린이회장단 어머니들이 준비한 것이기에 더욱 먹을 수 없습니다."
"이게 뭐 대단하다고…."

"아무리 작은 거라도 전교어린이 회장단 어머니들이 준비한 것입니다. 이런 부담을 지기 때문에 전교 회장 출마를 포기하는 아이가 생기는 겁니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전교회장 출마를 포기했다는 말 못 들으셨어요?"
"들었지요."
"그거 보세요."
"우리 애한테 밀릴까봐 포기시켰다고 하던데…. 농담이에요. 이번 전교어린이회장단에서 돈 쓴 것 없어요."

"어머니한테는 '돈 쓴 것 없어요'지만, 이것마저 부담스러운 집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전교회장 출마를 엄마 주머니 사정 때문에 저어하는 아이가 하나라도 생기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럼 조금만 꺼내 놓고 가져갈게요."

"좋은 일 하신다고 여기고 그냥 가져가세요."
"귤을 꺼내서 제가 먹을 테니 같이 드세요."
"그냥 가져가세요."
"무거워서 다는 못 들고 갑니다."

"차에 실어드리지요."
"차 안 가져 왔어요."
"제가 집까지 들어다 드리지요. 그런데, 어머니 손에 든 차 열쇠는 누구 겁니까?"
"선생님, 너무 하세요."
"압니다.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실랑이가 한참 이어졌다. 이런 작은 일도 관례가 되고 그 때문에 아이들이 전교회장에 출마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뜻임을 간곡히 설명했다. 우리의 뜻이 강경함을 확인한 어머니가 포기하셨다. 내가 들고 교과전담실 밖으로 나가 부회장 어머니 중 한 분에게 넘겼다. 교과전담실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회장어머니가 변명한다.

"집까지 들어다 주시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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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이 학부모들이 들고 온 것을 돌려보내는 일은 어렵고, 보내고 나면 그분들이 당하는 무안 때문에 마음의 갈등도 인다. 선배 선생님과 이 문제로 이야기 나눴다.

"이럴 때마다 힘들어요."
"누가 달라고 한 것 아니잖아."
"받으니까 들고 오지요."
"고마운 마음에 정으로 가져온 사람들을 무안하게 만든 것은 교육적이지 못해."
"안 받는 게 교육적입니다. 그래야 다시는 안 가져옵니다."

"사람을 기르는 일이잖아. 그거 고마우니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일이지. 인간사회는 얼키고설키며 사는 거야."
"왔다 갔다 하기는, 뭐 우리가 학부모 대접하나요? 일방적인 거죠."
"우린 가르치는 거고 그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가르치게 돼 있으니까 나는 나고 너는 너고, 이런 인간 관계 좋지 않아. 근데 그걸 내팽개치니 얼마나 무안하겠어. 내가 그렇게 당하면 확…."

"못할 짓인 줄 알지만 그 방법밖에 없어요."
"그런 사정 때문에 전교회장에 나서지 못하는 아이들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도 맞지만, 그걸 가져온 사람들 무안하게 만드는 것도 교사로서 할 일은 아냐. 인간적으로 가져온 거잖아."
"우리는 학부모보다 아이들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가진 학부모보다 못 가진 아이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자는 거죠. 떡 들고 왔다가 도로 들고 가는 어머니와 가난해서 전교회장 출마 못하는 아이 중 어떤 쪽 상처가 크겠습니까? 어릴 때 상처는 지워지지 않아요. 우리 모두 거절하면 없어서 전교회장 출마를 포기하는 아이 안 생기겠죠. 또, 이런 거 가져왔다 무안해지는 학부모도 안 생길 것 아닙니까?"
"최 선생 생각에 옳은 점도 있다는 것 인정해. 하지만 최 선생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는 말아."

매사에 너그럽고 신사적이어서 내가 좋아하는 선배지만 이 문제에는 접점을 찾기 어려웠다.

학부모를 잘 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꼭 이렇게 돌려보내는 것만 옳은가? 학부모들이 우리의 참뜻을 이해할까? 귤 몇 개, 떡 몇 조각 먹는 것이 죄 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다. 어머니들이 큰 돈을 쓴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어머니들에게 미안하다. 귤과 떡을 들고 나오는 나를 쳐다보는 어머니들의 표정이 열없었다. 어쩌면 망신당했다고 원망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교사는 어른보다는 아이들, 아이들 중에서도 부모의 형편 때문에 어린이회 임원에 출마를 포기하는 아이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교육적'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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