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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겨울 폐사지(廢寺址)를 좋아한다. 드넓은 절터에 수백 살 먹은 고목이 마른 가지를 처연하게 내밀고 있고 바싹 마른풀들이 머리를 숙이고 있으며 깨진 기와장이 발목을 건드릴 때 폐허의 아련함이 고조에 이른다.

거기다 바람마저 휑하니 불게 되면 나도 모르게 쓸쓸함에 빠지게 되고 결국에 가서는 죽어 있는 것들 중에 살아있는 나를 발견하는 기쁨도 얻게 된다. 그래서 겨울 폐사지를 하늘하늘 걷는 것을 참 좋아한다.

흥원창

▲ 흥원창
ⓒ 이종원
정태춘이 부른 '북한강'이란 노래는 참 구슬프다. 강이 산을 배경으로 흘러서 그런지 북한강을 거닐면 늘 서글픔이 느껴진다. 그러나 남한강은 비옥한 평야를 뚫고 흘러가서 그런지 풍성한 느낌이 든다.

문막에서 섬강 둑길을 따라가면 부론면이 나온다. 남한강이 나오는 첫머리에 흥원창이 자리잡고 있다. 강둑에 올라서면 산 그림자가 강에 비치면서 너울너울 흘러가는 모습이 보인다. 넋이 빠질 정도로 아름답다.

서남쪽에서는 충주에서 흘러온 남한강이 여주로 흘러가고 있고 서북쪽에서는 강원도 땅을 적신 섬강이 이 곳에서 합류하여 한강으로 흐르고 있다. 강원도를 적신 섬강 물과 충청도를 비옥하게 만든 이 남한강물이 합쳐서 여주땅, 이천땅을 적시니 여주 이천의 쌀맛이 좋지 않을 재간이 없다.

두 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기에 고려시대부터 이곳은 수운창이 자리잡게 되었다. 각지에 올라온 조세 물품을 보관했다가 수로를 통해 서울로 날랐을 것이다. 수운창은 조세품의 집산지이자 운송의 거점인 것이다. 흥원창은 쌀 200섬을 싣는 큰 배가 무려 21척이나 다닐 정도로 커다란 항구였다. 평창, 영월, 정선, 횡성, 강릉, 삼척 울진까지의 특산물이 집결했다고 전해진다.

강원도 내륙의 물산들은 대개 말이나 소에 싣고 왔고 이 항구에서 선적했기 때문에 이곳엔 객주와 주막이 들어섰다. 시장도 형성되어 흥정하는 소리가 남한강까지 들렸을 것이다. 그 활기찬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벅차 오른다.

그러나 오늘날의 흥운창은 쓸쓸하지 못해 적막하다. 다리가 놓이고 기차와 자동차가 운송을 대신하면서 할 일을 잃은 셈이다. 이 곳을 찾았을 때 그 옛날의 영화는 도무지 찾아 볼 수 없다. 농가의 개 한 마리가 이방인을 보고 마구 짖어댈 뿐이다. 주인집 할머니가 나와 흘끔 쳐다보더니 다시 따끈한 아랫목을 찾아 들어가 버린다. 오히려 그 적막함을 깬 내가 미안할 정도다.

▲ 남한강 산책로
ⓒ 이종원

사람은 배신했지만 풍광만은 변함없이 지조를 지켜왔다. 두 강물도 어김없이 한 몸이 되어 흘러가고 있다. 벤치에 앉아 마음껏 풍경화를 감상했다. 산책로도 예쁘게 꾸며 놓았다. 혹시 애인이 생기면 이곳을 거닐어 보라. 분명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곳은 두 물이 합쳐지는 곳이니까.

거돈사지

한강의 젖줄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부론면이 나온다. 거기서 다시 산 하나를 넘어가야만 거돈사지가 나온다. 아침 햇살에 비쳐진 산길이 참 예쁘다. 한적한 산길을 지그재그 올라가는 기분이 참 좋다. 다시 정산면에서 산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거돈사지가 나온다.

▲ 천년된 느티나무
ⓒ 이종원
거돈사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천년 된 느티나무다. 천년동안이나 사찰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다.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을 때는 싱싱한 가지를 들어냈으며 절이 한 순간에 무너졌을 때는 그 앙상한 가지마저 힘겹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 세월을 함께 살아준 느티나무가 고마울 따름이다.

폐사터를 거닐며

▲ 거돈사지
ⓒ 이종원
겨울엔 폐사지를 거닐어 보라. 나무와 잡초가 우거져 풍성하게 보일 때보다 이렇게 황량한 겨울에 거닐어야 스산한 감흥을 받는다. 아무리 화려했던 시절이 있어도 결국 이렇게 부서진 돌멩이로 전락한다. 영원은 없다. 언젠가는 무너지게 마련이다. 나뒹굴어진 돌멩이 속에 혹 자신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

거돈사 가는길

서울-문막ic-42번 국도-문막교 앞에서 좌회전-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가는 샛길(599번 지방도로)-부론면 소재지를 지나 부론면에서 귀래가는 길로 조금 가면 거돈사지 푯말이 나온다. (부론면에서 4km정도 떨어져 있다.)

입장료/주차비 없음

인간도 역시 그렇게 쓰러지고 죽어갈 것이다. 쓰러진 돌에도 그 쓰임새가 있었을 것이다. 탑의 부재로 쓰였던지, 건물의 초석으로 쓰였던지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던 돌이다. 지금까지 나의 돌은 쓸모 없는 돌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그런 돌로 살았다면 앞으로 의미있는 돌이 되자.

남단에 높다란 석축이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드넓은 절터가 펼쳐진다. 무려 7500평이다. 그걸 보노라면 가슴마저 후련하다. 절터 가운데 금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금당중앙엔 부처님이 앉았을 듯한 불좌대가 놓여 있다. 높이만 무려 2m가 넘는다. 그럼 얼마나 큰 부처님이 앉아 계셨을까? 금당 앞엔 전형적인 신라 삼층석탑이 서있다.

▲ 그나마 온전히 남아 있는 부재들
ⓒ 이종원
절터 왼쪽에 그나마 온전한 부재들이 함께 모여 있다. 석물들의 부상병동처럼 보이기도 하고 공동묘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연꽃 대좌의 화려함이 예전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몸돌의 꽃문양이 일품이다. 화려했던 남한강 문화의 꽃이리라.

거돈사지 3층석탑(보물 750호)

▲ 거돈사 삼층석탑
ⓒ 이종원
지방여행을 하게 되면 향토사학자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촌스러움이 묻어나는 외모지만 왠지 그 분위기에 압도당한다. 거돈사지 삼층석탑도 그렇다. 세련된 장식도 없고 소박한 탑이건만 이 앞에 서면 왠지 작아지는 느낌이다.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생명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석탑 앞에는 연꽃이 활짝 핀 배례석이 놓여 있다. 하도 예뻐 스르르 끓어 앉게 만든다.

폐사지의 돌덩이를 헤치고 원공국사 부도가 있었던 터에 올랐다. 이 곳에서 바라본 거돈사터가 일품이다. 부도터는 기단만 놓여 있고 정작 주인공인 부도는 온데 간데 없다. 안내판엔 부도 사진과 설명만이 자세히 적혀 있다. 다시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고 심정이겠지.

원공국사 부도 (보물190호; 경복궁 소재)

▲ 원공국사 부도
ⓒ 이종원
부도는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현재 경복궁 중앙박물관 건물 벽에 놓여 있다. 명색이 보물이지만 구석에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무척 섬세한 조각이 새겨져 있다. 부도의 높이는 무려 2.68m다. 중대석의 안상 안에는 천상을 지키는 장수인 팔부신상이 새겨져 있어 이채롭다. 상대석엔 연꽃무늬가 겹쳐 피어오르고 있으며 몸돌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거돈사터에 있다가 일본인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다시 경복궁 이곳 저곳 전전하다가 현재는 국립박물관 벽에 놓여 있다. 용산의 국립박물관이 완공되면 또 그곳으로 이사를 가야한다. 타향살이 그만하고 거돈사 고향으로 보내주는 것이 어떨런지….

원공국사 부도비 (보물 78호)

▲ 원공국사 부도비
ⓒ 이종원
절터 오른쪽에 부도비가 자리잡고 있다. 유명한 승려의 사리를 묻는 부도 옆에는 고승의 행장이 기록된 부도비가 자리 잡고 있다. 원공국사 부도비는 귀부와 비신 그리고 이수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날렵한 몸매를 뽐내고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비신에는 고승의 생애와 행적 그리고 공덕을 찬양한 글이 적혀 있다. 비문은 최충이 지었으며 김거웅이 해서체로 글을 썼다. 고려시대 비중에서 가장 뛰어나 글씨라는 평을 받는다. 단 한 자의 결자도 없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수는 구름 위에 생동감 있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 입을 꽉 다물었지만 이빨을 훤히 드러내 희죽 웃는 모습처럼 보인다. 귓가에는 물갈퀴까지 새겨져 있다.
ⓒ 이종원

▲ 귀갑문이 예술이다. 특히 이중의 육각형을 유심히 보라. 안쪽은 닫혀 있지만 바깥은 다른 육각형과 이어져 있다. 안쪽의 육각형엔 연꽃과 '卍'자가 번갈아 새겨져 있다.
ⓒ 이종원

폐사지엔 애절함만이 보이는 듯하지만 수많은 전화(戰火) 속에도 살아 남은 유물을 만지며 그 질긴 생명력에 감사를 드리게 된다.

폐허 속에 살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겨울 폐사지를 보는 맛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종원 기자의 홈페이지: http://cafe.daum.net/monol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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