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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여행 넷째 날, 울창한 숲과 호수, 바다가 어우러진 아카디아 국립공원(미국 북부 메인주 소재)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아카디아에 가면 아들에게 꼭 랍스터를 ‘먹이라’고 압력을 넣던 아내가 어제 저녁 통화에서 랍스터를 또 한 번 강조한다. 고래투어 유람선 표를 끊어 놓고 기다리는 시간에 생전 처음 랍스터를 먹었다. 비싸다는 말에 서울에서는 못 먹었는데 이곳에선 비싸지 않다. 제철은 아니라지만 본고장에서 먹었다는데 의미를 두기로 했다.

고래를 보러 바다로 나갔다. 미국에 와서 벌써 세 번째 유람선인데 매번 출발 전에 구명장비에 대한 안내를 철저히 한다. 비행기 이륙 전에 승무원들이 구명장비 사용법을 설명하듯 시범까지 보이며 진지하다. 배의 곳곳에 충분한 수의 구명장비가 쉽게 꺼낼 수 있게 마련되어 있다.

이번 유람선의 선장과 안내원은 할아버지들이다. 선장은 60대로 보이는데 안내원은 등이 구부정한 모습이 70대 중반은 넘어 보인다. 나는 잘 못 알아듣지만 관광객들이 자주 웃는 것으로 보아 재미있게 안내하는 듯하다.

나중에 아들에게 들으니 관련학문을 전공한 분으로 해양생물과 고장의 역사를 알아듣기 쉽게 안내했다고 한다. 고래를 멀리서 얼핏 보는데 그친 아쉬움을 할아버지들이 당당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충분히 채울 수 있었다.

미국의 노인들 생활은 교민들이 ‘노인장학금’이라고 재미있게 부르는 정부보조금을 받기에 어렵지 않다고 한다. 동생의 시어머니도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돼 많지는 않지만 그 ‘노인 장학금’으로 용돈을 쓰고 손녀들에게도 준다고 한다. 하지만 일 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일거리는 돈 이상의 의미일 것이다.

다섯째 날, 화이트 마운틴 공원 안의 워싱턴 산을 찾았다. 관광객들에게 등산열차가 인기 있다는데 시간 맞추기도 그렇고 해서 차로 올랐다. 정상은 해발 1900m에 위도도 높으니 몹시 춥다. 변변한 옷을 준비 못한 우리는 부지런히 휴게소 안으로 들어갔다.

▲ 자작나무 숲속의 여행안내소
ⓒ 최동욱
넓은 휴게소 안은 자동차나 등산열차를 타고 오른 사람들은 별로 안 보이고 장비를 등에 지고 걸어 오른 젊은이들의 열기로 훈훈하다. 간단히 점심을 먹은 후 산 정상 표식 옆에서 사진을 찍고 추위를 피해 얼른 차를 탔다.

공원측이 입구에서 준 테이프의 내리막길 안전운전요령대로 저단기어로 운전하고 중간에 브레이크를 식히기 위해 쉬면서 내려왔다. 유람선을 타면서, 운전하면서 느낀 미국사회의 안전의식은 인상적이다.

워싱턴 산에서 가까운 ‘큰바위얼굴’을 보러 갔다. 아쉽게도 지난해에 무너져 내려 볼 수 없었다. 전설처럼, 동화처럼 어린 시절에 읽은 이야기인데 아쉬웠다. 감정표현을 잘 안 하는 아들이지만 몹시 서운해 한다. 떨어진 바위들로 그대로 원상대로 복구할 계획이라고 한다. 아들은 ‘복원되면 와볼 것’이라고 한다.

베이스캠프인 동생네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미국에 도착했을 땐 안 보이던 11학년(고2)짜리 조카가 거버너스쿨을 마치고 돌아와 있다. 5년 전 한국에서 보던 더펄이는 계집애는 어디가고 처녀티가 완연하다.

거버너스쿨은 주정부가 고등학생 중 예술 과목은 물론 일반 과목까지 각 분야의 우수학생을 선발하여 수 주간의 캠프를 열어주는 것이다. 조카는 피아노로 펜실베이니아 주 거버너스쿨에 선발되어 5주간 이어리에 다녀왔다.

▲ 워싱턴 산 7부 능선에서
ⓒ 최동욱
거버너스쿨은 좋은 경험도 되지만 그 경력이 대학입학 전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경쟁이 심하다고 한다. 동생은 영주권도 없는 아시아계 아이를 오직 실력 하나로 선발해준 미국 교육시스템의 투명성에 감격하고 있었다.

동생은 제 딸이 지역 교향악단과 협연한 테이프를 자랑삼아 보여주었다. 장래성 있는 청소년 연주자를 공개오디션을 통해 선발하여 협연기회를 준다고 했다. 협연 때나 거버너스쿨 때나 누구를 찾아가본 일도 없고, 당연히 돈 한 푼 안 들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아이를 모 예술중학교에 넣어놓고는 작은 선생, 큰 선생, 교수 찾아다니며 레슨 시키느라 힘들어하던 동생을 기억한다. 대기업의 간부와 초등학교교사로 일하며 오순도순 잘 살던 동생내외가 미국행을 결정할 때 나는 ‘나이도 있는데 말 설고 물 선 땅에 왜 가느냐’며 반대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왜 기를 쓰고 미국에 왔는지 알 듯하다.

하지만 아이의 미국학교 적응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 왔을 때 유치원생이던 작은 아이는 빠르게 적응했지만 중학생이던 큰 아이는 언어문제로 힘들어했다. 툭 하면 제방에 들어가 문 잠그고 혼자 우는 아이에게 성질 급한 매제가 ‘너 때문에 왔는데, 그러려면 돌아가자’고 소리 지를 땐 ‘잘못 왔구나’하는 생각도 했었단다.

그러기를 6개월이 지나면서 친구도 하나둘 사귀고 학교수업도 따라 가게 되었다. 동생은 영어 못한다고 차별 않고 오히려 배려해준 학교선생님들 덕이라고 했다.

조카는 지금 학교생활이 아주 즐겁다고 했다. 학교이야기가 나오자 신이 나는지 이야기를 술술 풀었다. 동생 모녀의 이야기는 창밖의 풀벌레 소리를 배경으로 밤새 이어진다.

대학처럼 학점제로 운영되는 교과과정도 좋고, 아이들에게 절대 손대지 않고 공부를 잘 하거나 못 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알 때까지 물으러 오라’고 말하는 선생님들이 좋고, 교칙을 어기면 예외 없이 처벌하지만 교칙 안에서는 자유로운 학교 분위기가 좋단다.

조카는 완전한 자율을 미국 교육의 경쟁력으로 꼽았다. 기본과목 그레이드나 선택과목을 정하는 것은 물론 특별활동도 학생스스로 결정한다고 한다. 명문대를 목표로 하는 아이들은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는데 그것이 다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한 것이기에 정말 무섭게 공부한다고 했다. 조카아이는 아이들 ‘스스로 하는 것’ 이것이 미국 교육의 장점이고 바로 ‘미국의 힘’인 것 같다고 어른스레 말했다.

조카는 미국에서 공부하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있었다. 학교 콰이어 반주를 자신이 하는데 음악선생님이 대단히 열정적이라서 지역 합창대회에 번번이 우승을 한다고 했다. 음악 선생님은 다른 지역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콜을 받지만 그 학교의 분위기를 좋아해 계속 있다고 한다. 그런 선생님에게 인정받는 것에 뿌듯한 모양이다.

조카의 학교 자랑은 담임 제도가 없기 때문인지 교장선생님 자랑으로 이어졌다.

교장선생님이 전교 수많은 아이들의 이름을 거의 다 기억하는 것이 놀라운데 특히 한국 아이들의 이름은 확실히 기억해서 불러준다고 한다.

작년에는 교장선생님이 ‘1년 동안 전교생이 50권 이상씩 읽으면 학교 지붕 위에서 하루 밤 자겠다’는 제안을 했고, 아이들이 ‘교장 선생님을 지붕에서 한 번 재우자’며 책을 열심히 읽은 결과 지역에서 책을 제일 많이 읽은 학교로 선정되었다고 했다.

재미있는 방법으로 장애인 돕기 성금 모으기도 했다고 한다. 포장용 테이프를 쌓아놓고 그것을 산 아이들이 테이프를 교장선생님 옷에 붙일 수 있게 했다. 아이들이 조금씩 붙여도 워낙 많은 아이들이 붙이니까 나중에는 교장선생님이 미라처럼 온몸이 테이프에 감겨 꼼짝 못하게 될 정도였다. 짓궂은 사내아이들은 교장선생님 얼굴에까지 붙였다. 덕택에 테이프는 다 팔렸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가장 바쁜 사람이 교장선생님이라고 했다. 앉아서 식사를 못하고 빵을 들고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돌아다니다가 문제 있는 아이에게는 자연스럽게 접근하여 짧게라도 대화를 나누려고 애쓴다고 했다.

한국에서 15년을 교직에 있었던 동생이 거들었다.

“미국 교장선생님들은 다 비슷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좋은 분 같아. 한국과는 많이 달라.”

그 학교(인문계 공립) 역사에 피아노로 거버너스쿨에 참가한 학생은 자신이 처음 일 것이라는 조카아이의 말에 ‘그래서 교장선생님이 너를 특별히 예뻐하는 것 아니냐’고 딴죽을 쳤더니 ‘문제 있는 아이들에게 더 관심을 갖는 분’이라고 잘라 말했다.

존경할 누군가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늘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사람이면 더욱 그렇다. 교장 선생님을 존경하는 조카가 행복해 보였다.

동생은 미국 교사들이 열심히 가르치는 이유를 지방자치에서 찾았다. 지역주민이 내는 교육세는 온전히 공교육에 투입되고 교육청은 그 예산으로 유능한 교장과 교사를 확보하려 애쓴다. 학교가 지역주민의 평판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동생은 미국의 지방자치가 얼마나 철저한지 예를 들어 설명했다. 한 아이가 12학년(고3) 한 학기를 남기고 이사를 하게 되었다. 12학년 중간에 전학을 가면 아이의 학점관리나 교우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그냥 통학하기로 했다. 이 사실을 안 교육당국이 ‘교육세를 다른 자치구에 내니 아이의 교육비를 내라’고 했고, 그 아이의 부모는 수백만원의 학비를 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동생네는 교육세로 얼마나 내는 지 궁금했다.

“너희는 얼마나 내냐?”
“우리 돈으로 370만원 정도야.”
“그렇게 많아?”
“교육세는 집 크기에 따라 매겨. 학생 하나 없이 1000만원 넘게 내는 집도 있어.”
“그래도 너희가 얼마나 번다고….”
“오빠, 그 돈 하나도 안 아까워. 우린 둘이나 보내잖아. 잘 가르쳐 주고 집 앞까지 태워다 주거든.”
“스쿨버스비도 안 내?”
“물론.”

동생은 미국 시민이건 아니건, 교육세를 내건 못 내건 주민들에게 똑같은 공교육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렇다고 아이들 교육에 걱정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가 언어. 동생 내외가 직장에서나 일상생활에 큰 불편 없이 영어를 구사하지만 이제 5학년이 되는 작은 아이와는 대화가 어렵다고 했다. 평소 집에서는 영어 안 쓰는 원칙을 지키지만 급하면 영어가 튀어나오는데 너무 빨라 못 알아듣겠다는 것이다. 제 언니와 우리말로 다투다가도 나중에는 영어로 따따따 해버리는데 큰 아이도 잘 못 알아듣고 ‘엄마, 얘 영어 못쓰게 해!’라고 소리 지른다고 한다.

거의 맞벌이인 교민들이 1.5세나 2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한인교회에서 여는 여름학교에 보내 한국어를 경험하게 하거나 한국 연속극 비디오를 빌려다 시간 나는 대로 아이들과 함께 보는 정도라고 한다. 그나마 조카들에게는 할머니가 있어서 좀 나은 편이었다.

그렇다 해도 작은 아이가 우리말로 표현 못하는 내용은 영어로 할 수밖에 없는데 어쩌다 제 엄마가 못 알아듣고 다시 물으면 ‘네버마인드!’(신경 끄세요)하고 입을 다물어버린다고 했다. 아직은 어려서 큰 문제없지만 사춘기가 되면 아이와 대화가 단절 될까봐 걱정이라고 말하는 동생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미국 명문대를 졸업한 1.5세 교포 청년이 좋은 회사에 취직했는데 얼마 안 되어 회사를 나왔고 자살했다. 그가 한국인이라서 좋은 조건으로 채용한 회사는 그에게 한국어 능력이 없는 것을 이해 못했고 청년은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어려서 가면 영어는 잘해도 한국어를 못하며, 커서 가면 한국어는 잘해도 영어에 문제가 있다. 동생은 ‘중학생 때 온 아이들은 양쪽 언어를 다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 같다’고 했다. 자녀를 유학시키거나 교육문제로 이주를 계획하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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