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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십 년만에 만나니 너무나 반가웠네."

큰 매부가 화사한 봄을 맞아 지난 2월 이곳 호놀룰루에 살고 있는 나를 만난 뒤 한국으로 돌아가시면서 편지봉투 겉면에 적어놓은 작별 인사 중 한 구절이다.

지난 80년 12월 20일, 오산공전과 동양공전 전기과에서의 교직을 끝으로, 내가 살고 있던 서울 옥인동 아파트를 떠나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고 나서 81년 여름 잠시 귀국길에 만난 후 처음이니 실로 오랜만의 해후인 셈이다.

▲ 하와이 도착 첫날의 매부 가족
ⓒ 이풍호
매부는 내가 일찌기 고향 예산에서 평촌초등학교와 대흥중학교를 마치고 상경해서 휘문고등학교의 입학해 졸업할 때까지 인왕산 자락 행촌동에 살면서 나의 보호자로서 나를 잘 돌봐주셨다. 부모님 곁을 떠나 있는 동안 내내 매부와 누나가 이사가는 대로 따라다녔으니, 누나와 매부는 나의 보호자 역활을 단단히 해주신 것이다.

▲ 휘문고 졸업기념 가족 사진- 형님, 어머니, 매부, 준옥, 큰 누나와 함께
ⓒ 이풍호
인하공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지평중상고와 인천기계공고에서 가르치다 그 뒤 내가 부평고등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에도 나는 매부께서 우체국장으로 근무하시던 우체국 사택에서 함께 자취했고, 덕적우체국장으로 덕적도에 계실 때에도 방학에 방문하는 등 매부 가족이 사는 곳마다 찾아가 기거했었으니 함께 지낸 시간은 참 길다.

큰 누나는 홍성에 살고 있는 작은 누나, 서울의 여동생 창숙이와 이전에도 나를 보러 미국에 오셨었다. 이번에 매부가 내게 오게 된 동기는 바로 올 봄이 매부와 누나의 7순 생신(동갑)이라, 자손들의 배려로 이뤄졌다.

처음 호놀룰루 국제공항 입국장 밖에서 매부 가족 일행을 만났던 날. 이른 아침부터 봄비가 촉촉히 내리고 서쪽 하늘에는 알록달록 고운 무지개까지 걸려 있어 손님을 맞으러 가는 우리의 마음은 기뻤다.

25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을 만나는 나를 더욱 마음 들뜨게 해준 것은 날씨뿐만 아니라, 내 곁에 나의 사랑하는 외동딸이 함께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혼자 자라고 있기 때문에 아빠의 고국인 한국에서 가족들이 온다거나 연락이 올 때마다 아직 초등학생인 딸아이는 아주 기뻐한다. 낯은 설어도 자기의 살붙이라고 가족들에게 기대고 싶어지는가 보다.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 누나와는 달리 매부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 건강하셨다. 약간의 피부병을 제외하고는 곧은 기상과 자상한 웃음을 여전히 간직하고 계셨다. 퇴직 후 시작한 개인 사업도 나날이 형편이 더 좋아지고, 누나를 따라 매주 교회에 열심히 다니신다고 누나와 준옥이가 좋아하였다.

누나의 말에 의하면 자손들이 매부께 7순 생일기념여행을 어디로 가고 싶냐고 물으니, “하와이 풍호 처남을 보고싶다”고 하셨단다. 그때 누나는 풍호를 보고 싶다는 말에 감동을 받으셨단다. 그 때 매부가 친정 동생을 많이도 생각하고 있음을 알았다면서 다시 눈가에 큰 이슬을 달았다.

누나의 눈물을 보니 내 마음도 같이 젖어 4반세기 전, 내가 가르치던 동양공전 전기과 교직을 중단하고, 더 높고 푸른 희망을 안은 채 두려움 없이 미국 이주길에 나서던 젊은 시절로 뒤돌아 갔다.

그리고 나는 멀리 고국을 떠나 이국땅에서 동기간 친척 하나없는 천둥벌거숭이로 몸 고생 마음 고생 다하며 살아온 이민생활을 생각했다. 지난 날들이 주마등이 되어 낡은 영화의 필름처럼 돌아갔다.

그동안 캘리포니아주정부 교통국(Caltrans) 전기엔지니어로 20여년을 근무하고, 캘리포니아주립대학(Cal State Los Angeles)의 영문학과를 졸업도 했다. 그리고 시인으로 한국과 세계속에서 문학활동을 해오고 있다.

▲ 와이키키 해변에서 매부 가족과 딸 진아
ⓒ 이풍호
그러나 이제 생각해보니 여기까지 살아온 내 인생에는 잘 된 일보다는 더 마음 고달프고 후회할 반복되는 만남과 이별들이 있었다.

누나와 매부를 오아후섬 일주 관광과 폴리네시아 문화센터 그리고 호놀룰루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서 일일코스로 화산과 폭포 등을 구경하는 빅아일랜드 하와이섬 관광을 시켜드리는 중에도 나는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해야 했다.

▲ 와이키키 해변에서 큰 누나, 진아와 함께
ⓒ 이풍호
일을 하면서도 나는 오랫만의 가족 상봉에 더할 나위없이 기뻤고, 퇴근하면 만나서 즐겁게 시간을 함께 보냈다. 즐거운 시간이 지나고 다시 헤어져야 할 날짜가 되니 아쉬운 마음에 각자의 눈에는 다시 이슬이 달렸다. 매부 가족이 한국으로 떠난 날, 딸아이는 방과 후에 집을 혼자 지키다가 퇴근한 나를 붙들고 “아빠! 고모, 고모부가 아침에 갔다”고 엉엉 울었다.

큰 매부와 큰 누나의 가족이 편지 봉투 겉면에 남기고 간 사연이 이어져 있었다. “…처남 덕분에 너무나 좋은 구경 잘하고 가네. 얼마 안 되지만 진아 필요한 것 사주게. 매부”로 끝을 맺고 있었다. 흰 봉투 속에는 현금 5백불이 들어 있었다.

▲ 폴리네시아 문화센터에서 큰 매부, 누나, 준옥이
ⓒ 이풍호
맞바람 치는 바람에 비행시간이 길어져 예정시간 보다 많이 늦게 도착했다며 매부가 귀가 중 전화를 걸어 “처남, 내가 처남 환갑이 되면 그때 꼭 다시 만나러 갈거야! 내가 서산 형과 누나, 동생들을 데리고-”라고 해서 나를 다시 울렸다.

이번 4반세기만의 해후를 하고 나서도, 나를 다시 보고 싶어 내 환갑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실 큰 매부를 생각하니 '이제 나도 많이 늙어가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휘문고, 인하공대 전기공학과와 California State University, Los Angeles 영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0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캘리포니아주정부 교통국(Caltrans) 전기엔지니어로 근무한 후, 2003년부터 호놀룰루에 살고 있습니다.  현대문학, 월간문학, 시문학, 시조문학, 죽순 등을 통해 문학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풍호 문학서재는 http://paullee.kll.co.kr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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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2.20 LA로 이주 .1986 미국시민.1981-2000 Caltrans 전기기사 .인하공대 전기과 졸업 CSULA 영문과 졸업 .2003.9.27- 호놀룰루거주 .전 미주중앙일보 기자 .시인(월간문학 시조문학 1989,시문학 1992,현대문학 1995) .현 하와이 토목기사공무원 .my YouTube: http://bit.ly/2SQY7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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