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일요일 아침(3일).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달콤한 휴일의 아침잠을 깨웠습니다.

“에미야! 빨리 나와 보거라.”

잠결에 들은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달콤한 일요일 아침잠의 여운을 채 느낄 겨를도 없이 저를 벌떡 일으켜 세웠습니다.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왜? 엄마. 무슨 일 생겼어?”
“이것 좀 봐라. 어쩌면 이렇게 예쁘게 피었냐. 세상에 어쩌면 이리도 고울까.”

연신 감탄사를 쏟아내는 어머니에게선 도저히 예순의 연세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 마치 열여섯 소녀 같았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급하게 쫓아 나온 제겐 고개조차 돌리시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도대체 뭐때문에 저러나 싶어 어머니 등 뒤로 다가가서 힐끔 시선을 건네니 그곳엔 빨간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천둥과 번개가 세상을 삼켜 버릴 듯이 밤새도록 난리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 꽃밭에는 마치 빨간 등불을 밝혀 놓은 듯 붉디 붉은 꽃이 아주 탐스럽게 피어 있었습니다.

▲ 붉은색이 너무나 고운 칸나.
ⓒ 김정혜
바로 칸나였습니다. 도무지 꽃을 피울 기미조차 보이지 않던 칸나가 드디어 꽃을 피웠던 것입니다.

▲ 금방이라도 꽃이 필 것 같은 꽃대.
ⓒ 김정혜
지난 봄. 공공근로를 나가셨던 어머니께서 그날은 길가에 칸나를 심었다며 칸나 모종 몇 포기를 얻어 오셨습니다. 그리곤 마늘이 총총한 텃밭 사이사이로 드문드문 칸나 모종을 심으셨습니다.

▲ 촘촘하게 꽃몽우리를 맺고 있는 꽃대.
ⓒ 김정혜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기까지 어머니는 칸나에 지극 정성을 기울이셨습니다. 풀을 뽑아주고 물을 주고….

▲ 어른 얼굴 만큼이나 크고 넓적한 칸나 잎
ⓒ 김정혜
“도대체 어떤 꽃이 필까. 거 참 궁금하네.”

열심히 호미질을 하시는 어머니는 매일매일 그렇게 칸나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 가셨습니다.

“엄마! 칸나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렇게 궁금해? 내가 보여줄게. 인터넷에 나와 있을 거야.”
“싫다. 안 볼란다. 조금 있다 꽃 피면 그때 보면 되지. 뭐가 그리 급해서.”
“아니 그게 아니라. 엄마가 너무 궁금해 하시는 거 같아서 그렇지.”
“궁금하기야 궁금하지. 하지만 기다리면서 그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야. 요즘 사람들 너무 급해서 탈이야. 도무지 끈덕지게 기다릴 줄 모른다니까. 요즘은 뭐 그런 게 유행이라며. 거 뭐라더라. 느림의 미학이라든가 뭐라든가.”
“우리 엄마! 별걸 다 아시네. 하긴 요즘엔 다들 너무 급하긴 급하지. 원체 세상이 빠르게 변하니 그럴 수밖에 없지 뭐.”

▲ 금방이라도 붉은 색이 뚝뚝 떨어질것 같은 칸나
ⓒ 김정혜
그렇게 어머니는 칸나 모종 몇 포기에 거창하게 느림의 미학까지 논하고 계셨습니다. 어머니의 60평생. 지나온 어머니의 세월 속엔 이렇듯 꽃을 기다리며 그 꽃이 피기를 기다려 보신 적이 없었습니다. 삼 시 세끼 밥 먹고 사는 게 너무 바빴기도 했고 손바닥만한 자투리 땅조차도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 어른 얼굴 만큼이나 크고 넓적한 칸나 잎
ⓒ 김정혜
어머니는 가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노후엔 꽃이나 가꾸면서 눈에 진물이 나도록 꽃구경이나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어머니의 그 꿈이 공공근로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십니다.

▲ 빨간 꽃과 초록의 잎이 아름다운 칸나.
ⓒ 김정혜
어머니께서 나가시는 공공근로는 3개월씩 4분기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4분기 중 3분기만 일을 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6월 말을 끝으로 공공근로의 2분기를 마치신 어머니께서 7, 8, 9월의 3분기를 또 신청하셨다는 말에,

“엄마! 한창 더울 땐데 차라리 이번 분기에 쉬지 그래요.”
“싫다. 요즘 주로 하는 일이 뭔 줄 아니? 바로 꽃 가꾸는 일이야. 덥기는 해도 날마다 새로 피는 꽃구경이 얼마나 황홀한데. 꽃 보는 재미에 비하면 그깟 더위쯤이야 대수냐. 늘그막에 꽃보고 사는 게 내 원이었는데 얼마나 좋으냐. 돈도 벌고 원 없이 꽃구경도 하고.”

환하게 웃으시는 어머니의 얼굴엔 정말 꿈을 이룬 듯한 기쁨이 어려 있었습니다.

▲ 마치 붉은 등을 켜 놓은 것 같은 꽃밭
ⓒ 김정혜
요즘 우리 친정어머니께서는 밖에서도 집에서도 꽃구경에 정말 눈에서 진물이 날 것 같다며 아주 살 맛 난다고 하십니다.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면 새빨간 칸나처럼 열여섯 소녀의 고운 열정이 철철 넘쳐흐르는 듯하여 이 딸자식도 덩달아 살맛이 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