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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푹푹 찌는 더위에 온몸이 땀띠 투성이인 딸내미를 벗겨 베란다에 통을 놓고 한가득 물을 받아서 첨벙 집어 넣어놨다. 시원한 물 속에서 첨벙거리며 노는 딸아이를 보면서 나는 강원도 한여름의 찜통 더위를 원망하며 벽걸이 선풍기에 내 심신을 맡긴 채 피 같은 육수를 쭉쭉 뽑아내고 있었다. 이럴 때면 정말 시원한 바람이 팡팡 나오는 에어컨이 간절하고, 시원한 계곡물에 발 담그고 수박을 먹는 휴가가 간절하다.

결혼하기 전 처녀 적에 난 또래 친구들이 여름이면 다 간다는 피서를 다섯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밖에 가보지 못했다. 워낙 엄했던 부모님 등쌀에 포기해야 했기도 했지만 더욱 큰 난관은 바로 버스 타고 10분이면 바닷가가 나오는 곳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들은 집 앞이 바다인데 굳이 돈 들이고 힘들여서 피서를 따로 갈필요가 있겠냐 싶겠지만, 보기 좋은 것도 한때라고 20여년을 여름이면 똑같은 장소 똑같은 물 속에서 노는 것이 가히 즐겁지는 않았다.

피서라고 하면 적어도 낯선 이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어야 할 것이고 낯선 곳에서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는 맛도 있어야 한다. 또, 새로운 것을 눈으로 체험하고, 접해보지 못했던 그곳만의 토속음식을 맛보는 재미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매년 똑같은 피서를 즐기던 나에게 구원의 손길이 내미는 이가 있었다. 아는 선배 언니 하나가 경기도에서 직장을 다니는데, 그 회사에서는 휴가철이면 콘도를 직원들에게 아주 싸게 대여해 준다는 것이다. 강원도 속초에 있는 콘도인데, 그해 여름에는 운 좋게 언니가 뽑혔다고 놀러가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한자리에서만 자야 한다는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에 난 꼬박 삼일을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그 결과 장례 치르면 치렀지 못 보내 주겠다던 부모님은 항복하셨다. 퀭하게 들어간 두 눈과 그 아래에 검게 끼인 다크서클, 그리고 바짝 타버린 입술을 한 딸의 몰골을 보시더니 하루에 세 번 이상은 꼭 상황 보고를 해야 한다는 다짐과 함께 보내 주신 것이다.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집을 떠나는 나에게는 어떤 게 필요한지 어떤 건 가져가지 않아도 되는지 분간할 능력이 없었다. 그렇게 속초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은 나에게는 옆으로 메는 자그마한 가방 하나와 큰 여행가방 두 개가 들려져 있었다. 고작 2박3일의 여행이었는데 말이다.

왜 이 콘도에는 불이 안 들어와?

속초터미널에 도착하자 선배 언니와 후배 세 명이 마중 나와 있었다. 우리는 택시를 나눠 타고 언니가 예약했다는 00콘도로 향했다.

"야야~ 니는 짐가방이 우에 이리 많노? 어디 이사 가나?"
"뭐. 갈아 입을 옷이랑 고데기랑 수영복이랑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이렇게 많네."
"아이구야~ 누가 니 보면 집 나온 가시난 줄 알겠네."
"호호호. 그런가?"

콘도에 도착한 우리들은 카운터에서 방 키를 받은 후 객실로 올라갔다. 생전 처음 와본 콘도이기에 신기한 게 너무나도 많았다. 문을 열고 들어간 우리는 처음부터 커다란 난관에 부딪쳤다. 불을 켜는 스위치를 아무리 눌러 보아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고, 에어컨이며 티브이며 모든 가전제품이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기… 여기 사람들은 와 이런 방을 주노?"
"언니. 카운터에 전화해 봐. 방 키를 잘못 준 거 아닐까?"

콘도가 처음이라고 우리 얼굴에 쓰여 있는 것도 아닌데,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우리들은 종업원들이 우리가 처음인 줄 알고 우습게 아는 게 아닌가 하고 열을 내며 카운터로 전화했다.

"저기예~ 여기 방에 불도 안 들어오고 전기도 아예 안 들어옵니더. 우째, 이런 방을 줄 수 있는 겁니꺼? 예… 예… 아? 예… 알겠습니더."
"언니 뭐래요? 방 바꿔 준데요?"
"……."

우리들의 물음에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냥 키를 들고 문 앞으로 가더니 뭐 넣어 두는 것 같은 자그마한 통에 그 열쇠를 꽂는 것이었다. 그러자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챙피해 몬 살겄다. 그 사람들이 뭐라 카겠노? 촌녀들이라고 숭 안 보겄나."
"에이~ 모를 수도 있는 거지, 뭐."

우리 모두는 콘도가 처음이어서 열쇠를 꽂아야지만 방에 전기가 공급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야야~ 인자부터는 절대로 촌티 내믄 안된다~ 명심하그라! 알긋나?"
"알았어요."

꼭 수영복을 입은 채로 바다에 가야 한다고?

우리 모두는 결의에 찬 눈으로 촌티는 절대 내지 말자고 굳게 결심했다. 그렇게 짐 정리를 마치고 우리는 서둘러 근처 바닷가로 갈 준비를 했다. 바닷가에 가서 갈아 입을 수영복, 가지고 놀 튜브와 비치볼에 몸을 닦을 커다란 타월도 챙겨서 나가려는 찰나, 후배 하나가 냉큼 막아섰다.

"언니들, 이래선 안돼요! 우리 방금 어떻게 하기로 다짐했죠?"
"응? 니 뭔소리 하노? 잔말 말고 퍼뜩 챙기기나 혀라. 얼렁 가게."

우리들의 앞을 가로막은 후배는 두 눈을 지긋이 감고 검지손가락을 얼굴 가까이로 치켜들더니 '이러면 안돼'라는 표정으로 혀를 쯧쯧 차는 게 아닌가.

"언니들! 우리 방금 촌티 내지 말자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이렇게 하시면 곤란하죠!"
"야! 너 뭔 소리야? 우리가 뭐 어쨌길래 촌티가 난다는 거야?"
"언니들! 제가 아까 올라오다가 여기 종업원한테 물어봤거든요. 근데 여기 콘도하고 바닷가까지는 콘도 버스로 5분 거리래요. 그리고 수영복만 입고 가야 한데요. 그런데 이렇게 다들 옷을 입고 가면 사람들이 우릴 또 어떻게 보겠어요? 다들 수영복으로 갈아입으세요."
"참말이가? 참말로 여기 종업원이 글카드나?"
"언니! 또 창피 당하고 싶으시면 언니는 옷 입고 가시든지요."

후배는 자기가 어렵게 알아낸 정보에 대한 반응이 미덥지 않자 자기를 믿지 못한다고 화가 났는지 한마디 톡 쏘고는 수영복으로 갈아 입기 시작했다.

"언니, 정말인가 봐. 우리도 얼른 갈아입고 나가자."
"그래야겄제? 또 챙피 당할 뻔 안했나."

우리는 입고 있던 옷을 얼른 벗고 각자 챙겨온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뭐야? 다들 몸매 좀 된다고 비키니 가지고 온 거야? 그래, 잘나셨어들."
"그래도 이 정도는 입어 줘야 하는 거 아이가? 우떻노? 괘않나?"
"흥! 배에 힘 주고 다니려면 고생 꽤나 하겠네."

수영복을 갈아입고 튜브와 비치볼을 들고 어깨에는 타월을 한 장씩 걸치고 우리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콘도를 나섰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절대 촌티를 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고개 빳빳이 들고 걸었다. 기다리고 있던 버스에 올라타는 순간 우리는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콘도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수영복 차림이 아닌 평상복이었기 때문이다.

"야야~ 저 사람들은 와 다 평상복 차림인데?"

수영복을 입고 가야 한다고 주장하던 후배는 차 안을 한번 쓱 훑어 보더니 "저 사람들은 모두 바다가 아닌 시내 관광 나가는 사람들이라서 그럴 거에요"한다.
"아~ 그런가? 난 또…."
항상 똑부러지는 성격에 자존심 강해서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후배의 말이기에 우리는 그대로 믿고 말았다.

"아가씨들, 버스 못 타. 내려"

우리는 바닷가에 도착해서 정말 신나게 놀았다. 모래 찜질도 하고, 맛난 간식도 사먹고 사람 구경도 하면서 말이다. 저녁해가 지기 시작하자 우리들은 주섬주섬 가져온 물놀이용품들을 챙겨 콘도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콘도 버스는 기다린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왔고, 아무 거리낌 없이 올라 타려던 우리들에게 버스 기사 아저씨가 한마디 내던졌다.

"아가씨들 그런 차림으로 버스 타려고? 그런 차림으로는 못 타니까 어서 내려요."
"예? 아자씨 와그라는데요? 우리 차림이 뭐 어떻다고 그러십니꺼?"
"아~ 아가씨들 차림을 좀 봐요. 바닷물 잔뜩 묻었지 모래 잔뜩 묻었지. 그런 차림으로 타면 시트다 버리고 모래알이며 그런 게 잔뜩 끼여서 다른 사람들한테도 피해가 가요. 그러니까 내려서 다른 차 타고 와요."
"예? 아저씨 원래 여기는 수영복만 입고 바다에 와야 하는 거 아니예요? 아까 콘도에서 종업원이 그러던데요."
"잉? 누가 창피하게 수영복만 입고 와요. 아무튼 이 차는 못 타니까 내려요."
"아저씨~"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아저씨는 야속하리만큼 우리들을 매몰차게 내치셨다. 유유히 떠나는 버스 뒷꽁무니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우리들은 끝까지 수영복을 입고 가야 한다는 후배를 쳐다 보았다. 후배는 자포자기한 얼굴로 멍하니 버스가 떠나가 버린 도로만 보고 있었다.

"이러고 있을 게 아이다... 택시라도 잡아서 타고 가야허지 않겄나. 어여들 택시나 잡아보그라."
"……."

우리들은 그래도 택시 타면 5분 거리니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로 나섰다. 하지만 콘도버스도 버리고 가버린 우리를 영업용 택시가 그것도 5분이면 가는 가까운 거리를 순순히 태워 주겠는가.

20여분을 택시를 잡으려고 노력하던 우리들은 슬금슬금 밀려오는 어둠과 함께 하나둘씩 밖으로 나오는 타인들의 눈길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상상해 보라. 다 큰 처녀들 다섯 명이서 그것도 네 명은 비키니를 입고 사람 많고 차 많은 도로 위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튜브와 비치볼을 들고 서있으니 말이다. 아마 지금 같았으면 바로 인터넷 엽기 사이트에 올랐을 것이다. 쳐다 보고 웃고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창피해 하고 있는데, 수영복을 입고 가자고 우기던 후배가 어깨에 걸친 타월로 얼굴을 슬그머니 가리는 게 아닌가.

순간 '그래, 얼굴이라도 가리자. 타지에서 나 아는 사람도 없고 얼굴이라도 가리면 덜 창피하겠지'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도 그 후배를 따라 어깨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자 선배 언니와 나머지 두 후배들도 아무말 없이 타월로 서로의 얼굴들을 가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선배 언니의 한마디에 우리들은 그만 자지러지고 말았다.

"지영아. 니는 그케도 배에 힘 줄 일은 없은께로 쪼매 덜 힘들겄다. 인자는 하도 힘을 줬드마는 배에 쥐가 다 날라칸다."

거의 30여분을 그렇게 도로에 서있던 우리들은 어느 마음씨 좋은 택시 기사님 덕분에 무사히 콘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중에 알아 보니 후배는 수영복만 입고 가도 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는 종업원의 말을 잘못 이해했던 것이다. 그렇게 타지에서 보낸 나의 첫 피서 첫날은 후배의 엉뚱한 정보 때문에 웃지 못할 사건을 남겼다. 그때 당시에는 한참 민감할 나이라 잘못된 정보를 전해준 후배가 야속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후배로 인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긴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덧붙이는 글 | '이 여름을 시원하게' 응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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