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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패배자들> - 승자의 역사에서 패자는 조연일 뿐이지만, 그들은 어쩌면 우리가 알고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인물들일 수도 있다.
ⓒ 을유문화사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진 <삼국지>의 유비와 제갈량, <초한지>의 항우 같은 실존 인물들은 소설에서는 주인공이었을지 몰라도,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시대의 패배자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이 사실상 승자였던 사마의나 유방 같은 인물들보다 더 깊은 대중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비범한 인물들이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시대의 명운을 거스르지 못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대한 연민, 그리고 재능만큼이나 돋보였던 인물들의 인간적인 매력 때문이 아닐까?

체 게바라는 어떠한가? 그는 남미의 민중영웅을 넘어서 전세계적으로 소비되고 있는 정신적-문화적 아이콘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현실에 비추어볼 때 그는 이루지 못할 꿈을 좇다가 이름 없는 밀림에서 총탄의 제물로 참혹하게 최후를 마감한 실패한 영웅이기도 하다. 하지만 혁명을 주도했던 쿠바에서의 평안한 삶을 마다한 채 걷잡을 수 없는 혁명의 환상을 쫓아 다시 투쟁의 길로 뛰어들었던 체 게바라의 낭만적이고 드라마틱한 그의 인생 여정은, 그를 영원히 식지 않은 열정을 상징하는 불멸의 아이콘으로 재탄생시켰다.

사실 역사에서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것은 지극히 결과론적인 관점에서 머문다. 1등과 승자만을 기록하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과연 패자는 말 없이 잊혀져야만 하는 존재일까? 그러나 <위대한 패배자>(볼프 슈나이더 지음/ 을유문화사)에서 독일 언론인 출신인 저자는 성공과 실패에 대한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역사의 실패자들에 대한 복권에 도전한다.

'영광스러운 패배자들'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몰린 패배자들' '세계적인 명성을 도둑질한 패배자들' 등 챕터에 따라 10가지의 유형으로 각기 구분된 과거와 현재에 걸쳐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25인의 명사가 등장한다. 윈스턴 처칠과 덩샤오핑 같은 정치사의 거물에서부터, 롬멜 같은 군인, 렌츠나 빈센트 반 고흐같은 문화계 인사에 이르기까지 그 면면도 다양하다.

저마다의 인물을 거론하면서 저자가 빼놓지 않는 것은 바로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이들의 엇갈린 운명에 대비시키면서 보여주는 가정이다. 만일, 승자와 패자의 역사가 뒤바뀌었다면 어땠을까. 앨 고어가 조지 부시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면? 트로츠키가 스탈린에 축출당하지 않았더라면? 고르바초프가 마지막까지 개혁 노선을 완수했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패자는 대개 승자의 기록에서 주인공을 부각시키기 위한 조연이나 안티 히어로의 역할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저자는 역사의 패자들을 주인공으로 설정해 놓고 새롭게 서술하며 역사에서는 패배자였던 이들이 알고 보면, 보다 인간적이고 성숙한 매력을 갖춘 승자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일등주의와 무한경쟁을 강조하는 시대에서 결과보다 과정의 승리를 강조하는 저자의 이야기는 패자의 입장을 미화하면서 다소 감상적으로 들리는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저자는 패자의 기록을 무조건 변호하는 데만 급급하지는 않다. 넘치는 재능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운을 타고나지 못하여 좌절하는 인물이 있는가하면, 모든 권력과 영광의 중심에 있었으면서도 스스로의 자만심과 허영에 짓눌려 제 무덤을 스스로 판 패배자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인물들에게는 보내는 저자의 시선은 연민이라기보다는 '노력하지 않는 승자는 없다'는 냉철한 경고에 가깝다.

또한 이 책에서 살펴볼 수 있는 쏠쏠한 재미는 바로 패자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역사적 승자들의 어두운 명암이다. 거의 알려지지 못했지만 괴테를 능가하는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던 렌츠를 두고 치정과 질투에 눈이 멀었던 괴테가 벌인 속 좁은 행각이라든가, 혁명의 화려한 포장 뒤로 루이16세로 대변되는 귀족들을 처형하고 권력의 과실을 따먹었던 당시 프랑스 사회의 광기 등은 우리에게 과연 승자의 역사라는 것이 '진보'나 '정의'와 동의어가 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만든다.

우리의 삶은 예상보다 훨씬 다양하다. 역사의 패자들은 시대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결과적으로 조연의 운명을 부여받았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당당한 주연이었으며 결과의 실패일 뿐 후회 없는 열정을 불사른 인물들로 묘사된다. 승자의 패자의 명운을 가른 1%의 차이, 그것은 단순히 운이었을 수도 있고, 신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이 책은 '패자에 대한 낭만적 담론'을 넘어서 우리가 우리의 운명 앞에 보다 능동적이고 열정적인 삶을 살아야할 이유를 제시한다.

위대한 패배자 - 한 권으로 읽는 인간 패배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을유문화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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