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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표지/작가정신/2005
ⓒ 이국헌
기원 전 399년 아고라에 위치한 아테네 법정에는 500명의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단 앞에서 인류 최고 재판의 주인공인 소크라테스가 서 있었다.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고발당해 피고의 자리에 선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할당된 3시간의 변론 시간 동안 도덕과 철학의 논리로 죄가 없음을 설명했다. 하지만 이 재판에서 그는 사형을 언도받았고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칭송받던 노 철학자는 그렇게 죽어갔다.

시대의 사건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세노폰의 <변명> 등에 나타난다. 기소 내용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중심으로 기록된 이 자료들은 당시 소크라테스가 가지고 있던 신념과 그의 가르침에 대한 제자들의 해석을 포함하고 있는 철학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어떤 철학을 지녔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재판의 사회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는 쉽지 않다. 객관적 역사에 나타난 고대 그리스 사회의 현실과 소크라테스의 이상은 무엇 때문에 충돌했으며, 그 충돌이 사형을 언도받을 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확대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 재판의 본질은 무엇이었으며, 그 재판에 담긴 역사적 진실은 또 무엇이었을까? 뉴욕대학의 교수인 제임스 A 콜라이아코의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그 진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소크라테스 재판의 본질

"소크라테스, 당신을 소피스트, 자연철학자, 무신론자,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혐의로 고발하오!" 이러한 내용으로 멜레토스는 아니토스, 리콘과 더불어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을 요구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초자연적 지식을 안다고 공공연하게 공언했던 소피스트들에 대항해서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야 말로 가장 지혜로운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자연철학자들의 유물론에 대항해서 이데아의 사상을 가르친 철학자로서, 자신의 양심 속에 들어있는 신의 의무에 충실해야 함을 강조한 신앙인으로서, 자기 성찰을 통해 윤리적인 삶을 실천했던 도덕주의자로서, 90평생을 충실하게 살아온 양심적인 아테네 시민이었다.

그런 그가 위와 같은 죄목들로 기소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우리가 소크라테스 재판의 본질을 살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음을 저자는 설명한다.

"국가보다 우선하는 신의 도덕적 법칙을 버리느니, 차라리 국가에 불복하겠소."

소크라테스는 개인의 양심,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고, 신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가 국가에 복종해야 할 의무보다 우선이라는 도덕주의 이상을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은 아테네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적 가치보다 구성원 개인의 가치를 앞세우는 매우 진보적인 가르침이었다.

세계 최초의 민주국가를 수립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했던 아테네가 소크라테스의 개인주의를 용납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거기엔 시대적 이유가 있었다는 게 저자의 관점이다.

기원전 403년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패배한 후 참주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아테네가 가까스로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 새로운 국가의 기강을 잡을 때였다. 바로 이 때 소크라테스는 개인의 양심의 가치를 국가의 질서 위에 두고, 신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가 국가의 법에 우선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가치에 맞선 반체제 철학자로 인식되어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근대사회 시민불복종의 철학적 근거를 마련해 준 사건이었다고 저자는 해석하고 있다.

소크라테스 재판에 대한 오해

"악법도 법이다"라는 또 하나의 가르침에 내포된 것처럼 우린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부당한 재판이었다고 생각해왔다. 그의 재판과 관련해 플라톤의 <변명>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했던 상식이 낳은 결과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이 책의 저자는 당시 아테네 배심원들의 판결은 필연적이었음을 설명한다.

당시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아테네 민주주의나 도시국가의 이상에 어울리지 않았다. 아테네는 국가의 법과 제도에 충실한 훌륭한 시민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시민이 되기보다는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따라서 그의 정의와 선에 대한 개념은 아테네의 보편적 개념과는 그 차이를 보였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사상과 아테네의 가치가 충돌할 때마다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고자 노력했다. 이런 그의 변론의 과정을 분석하면서 저자는 배심원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반항적이고, 고집불통이고, 독선적이고, 반성의 기색이 전혀 없는 범좌자로 비쳤을 거라고 말했다. 이 같은 사실은 1차 투표에 비해 2차 투표에서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하는데 찬성하는 배심원들의 숫자가 늘어났음을 상기할 때 더 확실해진다.

고대 아테네의 사회 가치를 고려해 볼 때 배심원들의 결정은 당시로서는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었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을 가진 시민으로서 국가나 공동체의 불합리한 이상을 어디까지 따라야 하는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시대적 당위성을 넘어서 더 본질적인 인간의 권리, 나아가 정치보다는 도덕적 성찰이 더욱 더 중요한 인류의 관심사가 되어야 함을 역설해 준다.

소크라테스 재판이 주는 역사적 교훈

"소크라테스는 죽고 싶어했다. 독배를 선택한 것은 아테네가 아니라 그 자신이다. 그는 자신에게 선교를 내리도록 아테네에게 강요했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한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개인의 양심의 가치와 자신의 도덕적 성찰을 포기해야만 하는 국가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았다. 배심원들을 향해 그는 이렇게 가르쳤다.

"진정으로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삶은 죽음의 가능성, 또는 여론에 의해 좌우되는 삶이 아니라, 각자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지, 정의로운 행동을 하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좌우되는 삶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실천했다는 의미에서 소크라테스에 대한 니체의 평가는 옳다. 소크라테스는 추방형 또는 사형 중에서 스스로 사형을 선택하는 변론을 하였다. 추방형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신념을 굽히고 죄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법이 아닌 자신의 내면 속에 각인된 신의 의무를 따르는 것이 진정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러한 그의 철학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르면서 도덕철학(윤리철학)으로 확립된다.

저자의 혜안처럼, 도덕법과 자연법에 어긋나는 국가의 법은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따라서는 안 된다는 시민불복종 정신은 사형을 기꺼이 선택하는 소크라테스의 당당함 속에서 실천적 힘을 얻게 된다. 17세기 존 밀턴에서부터 19세기 헨리 데이빗 소로우, 20세기 간디와 마틴 루터 킹에 이르기까지 양심에 따라 국가의 부당한 법에 맞선 사람들은 모두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한 번쯤 다음과 같은 의문을 떠올릴 것이다. 국가가 우선인가? 신이 우선인가?, 공동체가 우선인가? 개인이 우선인가? 사회적 규범이 우선인가? 양심이 우선인가?

소크라테스는 참다운 삶은 정치적인 판단이 아니라 도덕적인 성찰과 그 행위임을 아테네의 법정에서 배심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그 이성을 깨우는 변론의 외침이 법정의 벽을 휘감고 돌아 수 천 년 인류의 가슴에 이르기까지 계속 울려날 수 있는 것은 그의 성찰이 아테네의 명분보다 훨씬 더 고상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철학적 외침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메아리쳤으면 좋겠다.

소크라테스의 재판

제임스 A. 콜라이아코 지음, 김승욱 옮김, 작가정신(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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