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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좌절의 별이다. 불운이 겹치고, 운명에 할퀴고, 로또 복권은 번번이 비켜가고, 이 사람에 속고 저 사람에 넘어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좌절하고 비웃음거리가 되고, 만인 대 만인의 경쟁에서 늘 선두권에 서지 못하고 뒤처지는 것이 우리 운명이다."(<위대한 패배자> 서문, 10쪽)

<위대한 패배자>(볼프 슈나이더 저/ 박종대 역/ 을유문화사 간)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위대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이 살았던 치열한 삶의 족적들은 그들을 패배자라 단정 지을 수 없게 만든다. 책에서 소개되는 주인공들은 한두 명의 승리자만을 원하는 이 '좌절의 별'에서 운명에 저항하고 당대의 부조리를 뛰어넘으려는 부단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 체 게바라. 그는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에 참여, 2인자의 자리에 올랐으나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아프리카의 콩고 남미의 볼리비아 등의 밀림에서 혁명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 사르트르는 그를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 칭송했다.
그들 또한 승리를 원했고 기회를 포착하였으며 결연한 의지로 그것을 쟁취하려 온 몸을 던진다. 그러나 카이사르와의 싸움에서 패했던 마르쿠스 포르시우스 카토가 "승리는 신들의 것이고, 패배는 카토의 것"이라고 말했듯, 승리의 월계관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거나 좀 더 강한 자에 가로막혀 꿈을 접어야 했거나, 아니면 운명의 조화에 만신창이가 되었거나 지나친 욕심으로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했던 사람들. 그들의 생애에 우리의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은 우리들도 승리와 패배라는 도식적인 경쟁구조 속에서 대부분 패배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삶을 살도록 운명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승자는 전설이 되고 패자는 늘 뒷전이다. 그렇다면 승자는 항상 우리가 본받을 만한 '좋은' 사람들일까? 역사의 마당에는 걸출한 능력과 뚜렷한 업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준 승리자도 있지만, 인간적으로는 패배자보다 조금 더 야비하고 비정한 사람들이 승자들일 때가 많다. 비록 당대의 마당에서는 패배의 오명을 얻었을지라도, 그 인간적인 삶과 당당한 정신을 본받을만한 사람들은 무수히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

좌절과 절망의 운명 앞에서 스러진 위대한 주인공들

저자의 지적대로 세계문학사의 위대한 신화, 희곡과 소설의 주인공들은 좌절과 절망의 운명 앞에서 스러져간 인물들이다. 그리스신화의 헤로와 레안드로스는 연인의 뒤를 이어 물 속에 몸을 던지고, 로미오와 보봐리 부인은 독을 마시며 줄리엣은 스스로를 칼로 찌른다. 베르테르는 권총으로 목숨을 끊고, 안나 카레리라는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진다. 아니면 괴테의 오틸리에나 알렉상드 뒤마의 춘희, 크누트 함순의 빅토리아, 러브스토리의 제니처럼 불치병에 걸려 죽거나 육체적으로 쇠약해져 죽는다.

운명이란 괴물에게 패배하였다 하여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미워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또는 연민하고 동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패배자들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비록 패배하였을지라도 이 책의 주인공들은 사투를 벌여 앙상한 뼈라도 건져 올린 헤밍웨이의 '노인'처럼 결코 주저하거나 포기하지 않은 인물들이다.

이 책을 읽는 우리는 어느새 노인의 혼잣말을 따라 읊조리며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애착을 품게 될 것이다. "인간은 포기해서는 안 된다. 쓰러질 수는 있지만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삶이 아니던가. 그럼으로 그들은 패배자가 아니다. 실제로 그들 대부분은 우리와 같은 일반인의 눈으로는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로 보인다. 위대한 패배자, 그들은 누구일까?

베르블링거, 트로츠키, 체 게바라... 다양한 패배자들

저자는 그들을 다양한 범주로 엮어 소개한다. 날고자 하는 인간의 꿈에 도전했다 실패한 베르블링거(비행기술 없이 하늘을 난다고 큰 소리를 친 재봉사)와 오스트리아의 황족이었으면서 멕시코의 황제가 되어야 했던 막시밀리안 황제 등을 '비참한 패배자' 편에, 사막의 여우라 불리며 월등한 전력의 영국군 기갑부대를 농락했던 전략의 천재 롬멜, 혁명을 위해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에 맞서 싸웠던 열대우림의 구세주 체 게바라, 다른 민족을 해방시켰지만 정작 자신의 제국은 잃어버린 화해와 공존의 전도사 고르바초프를 '영광스런 패배자' 편에 소개한다.

선거에 이기고도 대통령이 되지 못한 앨 고어 민주당 후보 등은 '승리를 사기당한 패배자'로, 격동의 역사 속에서 왕좌에서 쫓겨났던 불운한 황제들인 루이16세, 빌헬름2세는 '왕좌에서 쫓겨난 패배자들' 편에, 아들의 천재성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파묻어야 했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동생 토마스 만의 그늘에 가려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던 또 다른 천재 하인리히 만, 스탈린의 잔혹한 마수에 걸려 죽어간 열혈 혁명가 트로츠키 등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몰린 패배자'로 소개된다.

▲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끝없이 추락한 패배자' 편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면서도 경솔한 언행으로 명성에 먹칠을 한 크누트 함순 등이 놓이고, 핵물리학에 관한 혁혁한 성과를 완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도둑맞은 여성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 독일군 암호체계를 해독하여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 수학자 앨런 튜닝이 '명성을 도둑질당한 패배자'들이며, 스물 셋에 괴테를 능가한 게오르그 뷔히너 등이 '더 큰 영광의 시간을 박탈당한 패배자'들이다.

'살아서 인정받지 못한 패배자'로는 빈센트 반 고흐가 대표적이고 오늘날 중국의 눈부신 성장을 가능하게 한 풍운의 지도자 덩샤오핑과 윈스턴 처칠, 워터게이트의 리처드 닉슨은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인생'으로 소개 된다.

저자는 비단 이들뿐만 아니라 각 편에서 그와 유사한 다양한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소중한 유산들에 대하여 깊은 시선을 던진다. 아직 채 아물지 못한 시대정신과 그들의 출현을 경계한 당대의 소심함을 이야기하면서 '선각'이란 무엇이고 선구자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책 내용에 비춰보면 역사의 진보는 승리자의 성취라기보다는 이처럼 위대한 패배자들이 끄는 수레바퀴에 의해 가능했고, 이는 곧 우리가 탄 마차다.

덧붙이는 글 |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체게바라 평전/ 장 코르미에 저/ 김미선 역/ 실천문학사
덩샤오핑 평전/ 벤저민 양 저/ 황금가지 
고르바쵸프와 이케다 다이사크/ 나카사와 다카유키 저/ 문예림
롬멜/ 마우리체 필립 레미 저/ 생각의 나무
무장한 에언자 트로츠키/ 아이작 도이처 저/ 필맥
태양을 훔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임명순 저/ 아이세움
빈센트 반 고흐, 내 영혼의 자서전/ 민길호 저/ 학고재


위대한 패배자 - 한 권으로 읽는 인간 패배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을유문화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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