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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사무실 밖 거리에 쏟아지는 봄 햇살이 무척 따뜻하게 보이는 오후입니다. 이처럼 햇살이 고운 봄날에는 농촌에 살던 처녀들이 봄바람이 나기에 딱 좋은 날입니다. 여기 저기에서 앞을 다투어 꽃망울을 터트리는 꽃들과 산들산들 봄바람이 처녀들 마음을 싱숭생숭 헤집을 때면 토방 한쪽에 나뒹구는 소쿠리를 챙겨 옆구리에 끼고, 산으로 들로 봄나물을 캐러 다니던 처녀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 때가 바로 이즈음입니다.

저 또한 봄바람이 났는지 디지털카메라를 챙겨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섰습니다. 사무실 근처에 펼쳐져 있는 텃밭 근처에서 여러 종류의 들꽃을 카메라에 담아와야지 하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저의 사무실 근처에는 창원시 소유의 토지가 수천평이 나란히 줄을 지어 있습니다. 사무실 건물과 바로 맞닿아 있는 토지들은 개별 분양이 되어 개인소유가 되면서 유료주차장으로 이용되는 곳도 있고, 추운 날씨가 풀리자마자 새로운 빌딩 신축공사가 시작된 곳도 있습니다.

그동안 개별 분양이 된 곳도 분양이 되기 이전에는, 근동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부지런히 거름도 주고, 돌맹이도 골라내면서 제법 근사한 텃밭으로 일궈 왔습니다. 그런 텃밭들이 있는 토지가 2년 전부터 개별 분양이 시작되고, 개인 소유의 토지가 늘어나면서 텃밭들도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창원시 소유의 토지가 아직 많이 남아 있었기에, 그곳에서는 봄을 맞이하여 새로운 농작물을 심고 가꾸기 위한 주민들의 손길이 무척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 바쁜 손길로 상추 씨앗을 뿌리는 아저씨
ⓒ 한명라

▲ 씨뿌리는 일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아저씨
ⓒ 한명라
첫번째 텃밭에서 만난 아저씨입니다.

"아저씨~ 지금 무슨 씨앗을 뿌리고 계세요?"하고 여쭈었더니, 아저씨는 저를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상추 씨앗을 뿌리고 있다'고 대답을 하시고는, 이내 바쁜 손길을 재촉하느라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저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 보기좋게 잘 자란 마늘
ⓒ 한명라

▲ 길게 줄 지어 자란 보리
ⓒ 한명라
보기 좋게 잘 자란 마늘밭과 길게 줄 지어 서서 하루가 다르게 쑥쑥 그 키를 키우는 보리밭입니다. 2년 전 처음 이곳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을 발견하던 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겨울이면 온 가족들이 보리밭으로 나와서 꽁꽁 언 땅의 보리를 꾹꾹 밟아주던 기억하며, 이맘때쯤이면 보리밭 이랑 위로 쏜살같이 종달새가 날아오르면서 봄을 노래하던 고향의 풍경이 저절로 눈앞에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종달새 노래소리를 들어 본 지도 벌써 20년도 훨씬 넘어 버렸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지금도 농사를 짓는 시댁을 10년 넘게 다니고 있지만, 아직까지 종달새 노래소리를 들어 본 기억이 없습니다. 보리밭하면 종달새가 가장 먼저 떠 오르고, '보리밭'이라는 가곡이 생각납니다.

▲ 돌담을 쌓을 만큼 많은 돌. 텃밭을 가꾸어 온 손길의 정성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 한명라

▲ 다리에 힘을 주며 삽질하는 아저씨
ⓒ 한명라
정말 그 어떤 부지런한 분의 솜씨일까요? 이곳 텃밭은 잡초 하나 없이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텃밭에서 주워 낸 크고 작은 돌들로 돌담을 쌓아 놓았습니다. 그 많은 돌들을 주워내면서 소중하게 텃밭을 가꾸었습니다. 다리에 있는 힘을 다해서 삽질하시는 아저씨 모습도 정말 정겹습니다.

아저씨께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도 괜찮겠느냐고 여쭈었더니, 사진을 찍으면 어디에 자신의 모습이 나오느냐고 묻고는 기분좋게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지금의 나이가 되도록 살고 있다는 아저씨는 이제 이 텃밭도 2개월만 있으면 건물이 들어서기 때문에 텃밭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저도 몰랐던 소식을 전해 줍니다.

▲ 텃밭의 짧은 앞날을 예고하는 표지판
ⓒ 한명라
그동안 창원시 땅이지만 6년이 넘게, 올해로 7년째 텃밭을 가꾸어 왔는데, 5월부터 이 텃밭 자리에 시립 어린이집 건물이 신축된다고 합니다. 텃밭에 거름도 듬뿍 듬뿍 주면서 농작물을 경작했는데, 어린이집에 오는 많은 아이들이 텃밭에 준 거름 덕분에 건강하게 무럭 무럭 잘 자라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그럼 5월이면 새 건물을 짓기 위해서 농작물도 다 파헤칠텐데 무엇하러 이렇게 힘들게 땅을 파고 농사를 짓느냐고 여쭈었더니, 비록 그때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해도, 아저씨는 농작물을 심고 가꾸겠다고 하십니다.

그동안 공짜로 잘 지어 먹었고, 술도 마시지 못해서 텃밭에 나와서 소일거리로 농사를 지으면 시간도 잘 가고, 건강에도 좋았는데 이제 어디서 무엇을 하며 소일을 해야하는지 걱정이라고 하십니다.

▲ 저만치 고층아파트가 텃밭을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 한명라

▲ 쇠스랑을 옆에 두고 아픈 다리를 쉬고 있는 아주머니
ⓒ 한명라
저만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25층 고층아파트가 보입니다. 그 아파트에 살고 계시는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 또는 텃밭 하천 건너편 주택에 살고 계시는 어른들께서 이곳 텃밭에 나와서 조금의 빈틈도 남기지 않고 농작물을 심고 가꾸었습니다.

여기 상남동은 창원에서 가장 번화한 중심상업지역이기에 수많은 음식점과 유흥업소들이 즐비합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고추, 호박, 상추, 배추 등 여러 종류의 농작물들이 잘 가꾸어진 텃밭을 보노라면, 마치 제가 어느 농촌마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마음의 풍요로움을 느꼈었습니다.

▲ 반듯하게 잘 정돈된 텃밭, 어떤 씨앗이 뿌려졌을까요?
ⓒ 한명라
그런 텃밭들이 앞으로 하나, 둘 자취를 감춘다고 하니, 텃밭을 잃고 일손을 놓아야 하는 아저씨의 마음처럼 저 또한 아쉬움이 큽니다.

다가오는 5월이면 텃밭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도, 있는 힘을 다해서 삽질을 하던 아저씨의 모습에서 저는 어느 명언 한 귀절을 떠 올렸습니다.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여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스피노자의 명언을 생각하면서, 묵묵하게 텃밭을 일구는 아저씨의 모습이 무척 안타깝게 느껴지던 시간이었습니다.

아마 부지런한 아저씨께서는 어쩌면 어딘가 놀고 있는 또 다른 빈 땅을 찾아내어, 돌멩이도 줍고 잡초도 뽑아내면서 지금보다 더 멋진 텃밭을 가꿀 수 있으리라고 믿어 봅니다.

봄바람이 난 처녀마냥 디지털카메라를 챙겨들고 들꽃 사진을 촬영하러 간, 저의 짧은 봄나들이는 본래의 목적이었던 들꽃 사진은 정작 한 장도 카메라에 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사라져야 할 텃밭에서 봄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사연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제 마음 속에 남 모르는 작고 아담한 텃밭 하나를 담아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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