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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전 오늘도 딸아이를 보면서 저의 인내심을 테스트합니다. 이제 막 두 돌이 지난 딸아이는 뭐든지 자기가 혼자 해본다고 생난리를 칩니다. 처음에는 혼자 해본다고 애쓰는 그 모습이 너무 기특하고 귀여워서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하지만 급히 외출을 해야 할 때나 여느 때보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서 얼른 하루 일을 마치고 포근한 잠자리에 들어가 푹 쉬고 싶을 때에 딸아이가 혼자 옷을 입겠다거나 자기가 마시던 물컵을 자기가 씻겠다고 난리를 칠 때는 정말이지 저도 모르게 폭발하고 맙니다. 그럴 때는 항상 저의 짜증이 섞인 큰 목소리로 시작해 딸아이의 울음소리로 상황종료를 하곤 하지요.

한 달 전이었습니다. 곧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질 것만 같은 검은 하늘을 보고 전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비가 오기 전에 어서 가서 저녁 찬거리를 사와 상을 차려야 했습니다. 급하게 딸아이를 부른 뒤 마트에 갈 준비를 하는데, 이 녀석이 어김없이 옷을 자기 혼자 입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겁니다.

"진아야. 지금 비가 올 것 같아서 얼른 다녀와야 하거든. 그러니까 엄마가 옷 입혀 줄게."
"시러. 아가가 입을 거야."

"지금 비가 올 것 같아서 얼른 갔다 와야 해요. 진아도 엄마랑 이야이야 가고 싶지? 그러니까 엄마가 얼른 입혀 줄게. 우리 얼른 이야이야 가자."
"시러. 아가가 할 거야. 아가가 입을 거야!"

몇 번을 타일렀지만 자기가 혼자 입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딸아이에게 급기야 또 큰소리를 치고야 말았습니다.

"엄마가 급하다고 했지? 그럼 너 혼자 옷 입고 있어. 엄마 혼자 갔다 올테니까! 알았어?"
"시러시러. 아가도 이야이야 갈 거야~~ 엉엉."

"됐어! 넌 니가 좋아하는 옷이나 입고 있어. 엄마가 한번 말하면 들어야지 왜 고집을 피워. 피우긴."
"잘못했어요. 아가가 잘못했어요. 엉엉."

그렇게 딸아이의 서러운 울음을 끝으로 저희 모녀의 신경전은 또 일방적으로 끝이 났습니다. 눈물범벅인 아이 얼굴을 대충 씻긴 뒤 마트에 다녀와서 너무 속상한 마음에 친정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엄마. 아주 속상해 죽겠어. 누굴 닮아서 저렇게 고집이 센지 모르겠어. 정말."
"왜?"

"뭐든지 자기 혼자 한다고 난리잖아. 급할 때는 얼마나 답답한지 모르겠어. 답답해 죽겠다니까."
"아주 행복한 소리를 하는구만. 지 혼자 스스로 하는데 뭐가 답답해."

"하는 건 좋은데 급하게 외출할 때나 빨리빨리 해치워야 할 때도 지 혼자 한다고 난리를 치니까 그렇지."
"빨리빨리? 빨리빨리 하면 시간이 얼마나 단축되는데? 1시간? 2시간?"
"엄마는~."

"천천히 혼자 하도록 내버려둬. 니가 빨리빨리 해봤자 길어야 3~5분 차이야. 그 짧은 3~5분이라는 시간에 우리 진아는 혼자 스스로 옷입는 법도 터득하고 혼자 책 정리하는 법도 터득할 테고 또 신발 신는 법도 알아 갈 거야. 니가 조금 편하자고 외치는 빨리빨리가 우리 진아한테는 아마 3시간이고 다섯 시간일 거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정말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가 빨리빨리를 외치며 딸아이의 눈에서 눈물을 쏟으며 얻는 시간은 고작 3분에서 길어야 5분이었던 겁니다.

그 짧은 시간을 얻고자 난 딸아이에게 화난 얼굴의 엄마를 한번 더 보여주고 딸아이의 커다란 눈에서 닭똥같은 눈물을 쏟게 했던 겁니다.

"니가 어렸을 때 말이다. 혼자 신발을 신어보겠다고 한여름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너희 아버지는 땡볕에서 애기 고생시킨다고 얼른 신 신겨서 데려오라는데 난 도저히 너한테서 신발을 뺏어서 못 신겨주겠더라. 니 표정이 얼마나 진지하던지. 한 십여 분을 그렇게 신발이랑 씨름을 하고 왼발 오른발이 바뀐 채 짝짝이로 신고 있는데도 두 발을 내려다보는 니 표정이 얼마나 뿌듯해 보이던지. 엄만 그 후로 너희들한테 빨리빨리 대신 천천히 천천히를 가르쳤는데, 왜 커서는 이렇게 빨리빨리 인간들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호호호."

가만히 생각해보니 결혼 전까지 엄마 품에서 저희 세 남매는 엄마한테서 빨리빨리 하라는 소리는 들어보지를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항상 천천히 다녀라. 천천히 먹어라. 학교를 졸업해 취직을 못하고 놀고 있을 때도 천천히 니가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봐라, 엄마는 항상 저희에게 천천히를 가르치셨던 겁니다. 그런데, 저는 제 딸아이에게 빨리빨리를 가르치고 있으니 참 웃긴 일입니다.

그 후로 전 딸아이에게 천천히 엄마가 되어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마음먹은 대로 안 된다고 투정을 부리면 천천히 천천해 생각하면서 해보라고 옆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조언을 해주고 기저귀를 뗄 때도 속옷에 그냥 볼일을 봐버릴 때에도 화내는 대신 웃는 얼굴로 천천히 하면 된다고 놀란 아이를 다독여 줬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가르치니 아이는 이제 스스로 혼자 옷도 입고, 기저귀도 떼버렸고, 장난감 블록으로 물건을 만들 때도 하나씩 천천히 생각해가면서 혼자서 기차도 만들고 기린도 만들곤 합니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천천히 천천히 하는 딸아이를 보면 가끔씩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보면 전 아직도 멀었나 봅니다. 요즘은 혼자 신발신기에 도전하는 딸아이를 보면서 전 마음 속으로 계속 '천천히 천천히'를 오늘도 외칩니다.

덧붙이는 글 | SBS <손숙·김승현 편지쇼> 게시판에 기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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