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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일 시위현장에서 연설하는 롤리 신부
ⓒ 진주
"처음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니 잡아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카톨릭 신자가 아니니 잡아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인권운동가가 아니니 잡아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나치시대의 저명한 반나치 신학자인 마틴 나이몰러의 시 '그들이 코뮈니스트들을 잡으러 왔을 때'(First they call for the communists)'에서 빌어 온 것입니다. 필리핀의 인권활동가와 사회운동가의 살인 중단을 요구하는 국제행동의 날인 지난 19일, 필리핀에서 온 롤리(Rolly) 신부는 이 짧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현재 필리핀 상황을 보여준다고 말했습니다.

▲ St.John 성당에 진열된 살해당한 사람들의 사진들(맨 가운데가 라멘토 주교)
ⓒ 진주
국제행동의 날에 아시아 각 지역의 성직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아시아인권위원회에서는 해마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인간애를 실천하는 성직자들과 함께 각국의 상황을 공유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올해는 특히 필리핀의 상황이 점점 더 심각해져가는 가운데,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태국, 버마, 필리핀 등지에서 신부, 목사, 수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필리핀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했습니다. 2006년 광주인권상을 수상했던 태국의 앙카나(Anghkana)도 이 자리에 함께 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모든 사회운동가, 정치인, 농민운동가, 인권운동가, 도시빈민들, 농민, 노동자, 그리고 성직자들까지도 '좌익'으로 낙인찍혀 살해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로 말하자면, '빨갱이'나 '공산주의자'로 딱지가 붙는 것입니다.

2001년 현 필리핀 대통령인 아로요가 정권을 잡은 이후 지금까지 약 783명이 정치적으로 살인을 당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피해상황을 드러내는 것에 생명의 위험을 느끼기 때문에 실제 숫자는 천 명이 넘을 것이라고 합니다.

피해자가 침묵하면, 정의도 침묵한다

▲ 사라져간 필리핀 영혼들을 위해 헌화하는 수녀
ⓒ 진주
지난 10월 3일은 주교 라멘토(Ramento)가 살해당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목자였고, 필리핀에서 일어나는 살인에 대해 공개적으로 정부를 비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성직자로서 평화순례활동뿐만 아니라 인권변호인으로서도 평생을 바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새벽 4시 경 자신의 방에서 일곱 차례나 칼에 찔린 채 살해당했습니다. 주교 라멘토도 살인협박을 여러 차례 받고 있어서 언젠가는 죽을 지도 모를 상황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교와 가깝게 지냈던 한 신부가 홍콩에 와서 그의 곁에서 죽어갔던 사람들을 이야기했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죽어간 사람들을 이야기해야 하지만, 살아 있는 그들 역시 언제 살해당할지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절대로 혼자서 다닐 수 없고, 그들의 이야기 또한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 자체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어간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피해자가 침묵하고, 목격자가 침묵하고, 그들의 가족과 벗들이 침묵하면, 모두가 침묵합니다. 아시아인권위원회 위원장 바실 페르난도는 누구보다, 피해자 자신들이 침묵한다면, 정의가 침묵하게 될 거라며, 결국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피해자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교활해져가는 살인방식, 재활용되는 수형자들

▲ 홍콩에서 열린 국제행동의 날 시위행진
ⓒ 진주
이러한 살인방식은 동일하게 되풀이 되고 있으며, 또한 갈수록 교활해지고 변화무쌍해져가고 있습니다. 현재 지속적으로 살인에 관계하고 있는 필리핀 정부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아무도 모르게, 피묻은 손으로, 다시 피를 묻히게 할까'일지도 모릅니다.

한 번 피가 묻은 손이라면, 다시 묻히게 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고, 그 대가로 자유를 주는 방식은 언제나 권력을 쥐고 있는 자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아시아 전체에서 아직까지 한번도, 그리고 제대로 책임져야할 사람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진 경우가 없었습니다. 책임과 처벌이 이루어진 적이 없는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는 법입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공격을 해서 살인하는 방식은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요즘은 유죄판정을 받은 수형자를 경찰이 잠시 석방시켜 살인을 저지르게 한 뒤, 다시 수감합니다. 또한 유죄판결을 받은 수형자를 킬러로 고용하기도 합니다. 살인을 저지른 다음에 도망가도록 내버려두기도 하는데, 이 경우가 바로 라멘토가 살해당한 방식입니다. 실제 누가 총을 쏘았는지, 목격자도 없는 이러한 살인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필리핀 정부가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임시 석방시켜 살인을 저지르게 하는 것은 국내에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라며, 필리핀에서 온 신부와 수녀는 한탄을 했습니다. 피해자가 피해자를 재생산하게 만드는 사회가 바로 필리핀입니다.

지속되는 시위, 끝나지 않는 역사

▲ 시위행렬 도중 필리핀 민중들의 고통을 재현하는 여성들.
ⓒ 진주
국제행동의 날, 홍콩에서 필리핀을 위해 일하는 다양한 단체가 함께 모여 긴 행진을 했습니다. 필리핀 이주노동자 연합, 필리핀 독립교회, 필리핀 이슬람 가정부 모임, 태국지역연맹,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 연합 등 많은 단체들과 더불어, 아시아 각 지역에서 온 신부, 수녀, 목사, 그리고 아이들도 함께 했습니다.

모두 한 목소리로 "살인을 중단하라(No More Killings)", "우리는 정의를 원한다(We Need Justice)"를 외쳤습니다. 필리핀 여성들은 행렬 도중에 죽음과 공포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기도 하고, 한국에서의 문선공연처럼 강연 중간에 짧은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필리핀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 헌화를 했습니다.

아시아인권위원회는 희생당한 라멘토 주교를 지학순정의평화상 후보로 추천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필리핀의 상황에 시선을 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필리핀 내에서의 강요된 침묵은 필리핀 밖에서 깨어져야 하고, 빼앗긴 그들의 목소리를 되찾아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아시아인권위원회에서는 필리핀정부의 정치적 살인 중단을 촉구하는 온라인 서명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www.pinoyh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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