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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 오다이바에 위치한 후지TV 사옥. 맞은 편엔 백화점들이 즐비하다.
ⓒ 유태웅
오랜만에 도쿄에 간다고 연락을 했더니 서울에서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 친구들이 일본식 곱창전골인 '모츠나베'를 대접하겠단다. 출발 이틀 전 모임의 간사격인 모 방송국 서울특파원 출신 Y기자로부터 약속 장소와 시간을 알리는 온라인 공지가 왔다.

"맛있는 모츠나베를 대접하려고 여기저기 찾아봤는데 알아본 곳마다 예약이 꽉 차있었어요. 망년회 시즌이고, 불경기이기도 해서 모츠나베가 제2의 붐을 일으키고 있는 듯 합니다. 10번째 만에 겨우 예약에 성공했습니다."

@BRI@불경기? 일본 정부가 전후 최장의 호황기였던 '이자나기 경기'(1965년10월~1970년7월)의 기록을 넘어 올해 11월까지 58개월째 경기확대가 이어지고 있다고 발표한 것이 불과 보름 전이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지금을 불경기로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불경기인데 음식점마다 예약이 꽉 차있다는 건 또 무슨 말인가?

12월12일 저녁, 도쿄의 가장 번화가라 하는 시부야에서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과 둘러앉았다. Y기자가 이날 모임 장소를 모츠나베 전문점으로 고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리들의 우정이 서울 종로 뒷골목의 곱창집에서 소줏잔을 기울이면서 맺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 시부야 식당은 서울의 곱창집 이미지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고급스럽지는 않으나 깔끔한 실내장식에 다양한 요리가 곁들여져 나오는, 1인당 5000~6000엔(4만~4만8000원)은 있어야 즐길 수 있는 결코 싸지 않은 음식점이었다. 정말로 우리가 3시간 정도 앉아있는 동안 잠시도 빈 자리가 나지 않을 만큼 호황이었다.

아무리 송년회 시즌이라고 하지만 이런 상황을 불경기라고 하다니 ‘엄살’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본 친구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통계수치상으로는 그렇게 나타날지 모르지만 일반인들이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경기회복이라는 것. 그도 그럴 것이 이날 자리를 함께 한 언론인과 공무원들을 포함, 1주일 취재기간 동안에 만난 일본인중 월급이나 연말 보너스가 올랐다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깎였다는 사람도 없지만…

민간이 견인한 경기회복

90년대 1%대에 머물다가 2002년 0.1%까지 떨어졌던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이후 조금씩 상승을 시작, 지난해에는 2.6%를 기록했다. 올해도 지난 해와 비슷한 수준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일본의 이 같은 경기회복은 철저히 민간 주도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자나기 경기’가 정부 주도의 계획된 고도성장이었다면 지금의 경기회복을 이끌고 있는 것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거친 우량기업들이다. 일본 상장기업들은 올해 3월 결산결과 순이익이 42% 증가하면서 3년 연속 최고 수익을 기록했다. 상장기업의 40% 이상이 사상 최고의 경상이익을 실현했다.

▲ 일본의 고용과 임금 증가율
일본 기업들은 90년대 초 버블(거품) 경제의 붕괴와 함께 한동안 고용, 설비, 채무의 '3과잉'에 시달렸다. 자연히 경영은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라다 유타카 다이와(大和) 종합경제연구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일본 기업들이 긴 암흑의 터널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고용문제의 고리가 풀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경제는 90년대 초 이미 불황에 돌입했지만 기업들의 실질임금 상승은 90년대 후반까지 계속됐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불황이라고 해서 갑자기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제 등을 뜯어고치는 구조조정을 단행하기는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일본 경제가 천천히 디플레이션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명목임금이 그대로여도 상대적으로 실질임금은 계속 올라갔다.

경기가 나쁜데도 실질임금이 상승하니 기업들은 신규고용을 피하게 돼 실업률이 상승했다. 그러자 소비와 생산이 연쇄적으로 줄었다. 이에 따라 설비투자가 제자리에 멈추고 일자리도 늘지 않았다. 이어 소득과 소비가 감소하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하라다씨는 "98년이 되어 많은 기업들이 위기적 상황을 느끼고 처음으로 명목임금을 내렸다"며 "실질임금은 좀처럼 낮아지지 않았으나 그러는 사이에 노동생산성이 조금씩 높아져 같은 임금수준이어도 기업으로서는 해가 갈수록 부담이 줄어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실질임금이 낮아지자 비로소 기업은 고용을 늘릴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대졸 예정자들 직장 구하기 ‘즐겁다’

▲ 기업들의 경상이익률 추이
실제로 2002년 8월 5.8%까지 치솟았던 일본의 실업률은 이후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 최근에는 4.0%대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기업들의 신규채용이 늘어, 2003년 55.1%까지 떨어졌던 대학졸업 예정자들의 취업률은 올해 63.7%로 상승했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한때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했으나 이젠 옛 이야기가 돼버렸다. <마이니치 신문>이 취업에 나선 대학 4학년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앙케이트에서 올해 직장 구하기 과정을 한자 한 문자로 표현해보라고 했더니 '樂(즐길 락)'자가 가장 많이 나왔다.

졸업생들이 직장을 골라가는 시대가 다시 온 것이다. 명문대 졸업생조차 어떤 기업이든 뽑아주기만 하면 일단 입사하고 보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이 불과 3~4년 전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기업들이 우수한 인재를 뽑기 위해 먼저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고이즈미 개혁'의 성과와 한계

▲ 사진은 지난 2005년 10월 17일, 고이즈미 총리가 경호원들과 함께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도착한 모습.
ⓒ AP / 연합뉴스
일본 기업들의 이러한 회생은 어쨌든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집권 5년간에 이뤄진 일이다. 그렇다면 고이즈미 총리가 이 같은 개혁을 이끌었는가? 이에 대한 평가는 미묘하게 갈린다.

깃카와 다케오 도쿄대 교수는 "고이즈미 총리가 주요 개혁과제로 내걸었던 도로공단이나 우정사업의 민영화는 사실 별 진전이 없었다"며 "오히려 고이즈미 총리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분야에서 의외로 개혁이 진전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가 개혁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일본정부는 90년대 총 9차례에 걸쳐 120조 엔이 넘는 천문학적 돈을 경기부양에 쏟아 부었다. 그러나 언제나 '반짝 효과'에 그치고 근본적인 경기회복으로는 연결되지 않았다. 늘어나는 건 국가채무뿐이었다. 80년대까지 채권국이던 일본은 눈깜짝할 사이에 세계 최대의 채무국으로 전락하더니, 중앙과 지방 정부의 총 채무잔고가 GDP의 1.75배에 이르는 800조 엔까지 불어났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 중 최고수준이다.

"아픔을 감수한 구조개혁", "개혁 없이는 성장 없다" 등의 슬로건을 앞세워 집권한 고이즈미 총리는 무엇보다도 공공사업을 통해 경기를 자극하는 정책을 더 이상 쓰지 않았다. 대신 기업들에게 더 이상 정부의 경기대책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살아남으려면 개혁에 나서라는 일관된 메시지를 던졌다.

이와 함께 기업 관련법 개정으로 인수·합병(M&A)과 분사화 등 기업재편을 용이하게 하고,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처리를 가속화했다. 또 외국인 투자 유치를 겨냥한 회계제도의 개선, 고용시장의 규제 완화책 등으로 기업의 변화를 유도했다.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구조개혁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기업의 틀 안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과잉 설비와 과잉 채무 문제는 M&A를 통해 해결의 길을 모색해나갔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라이벌 기업끼리의 합병도 있었다.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인 애널리스트 데이빗 섀터화이트씨는 "고이즈미 총리가 구체적 플랜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방향설정이 좋았고, 사람을 잘 썼다"며 "꾸준히 추진한 구조개혁의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양극화와 불안한 장래

이같이 지표상으로는 개혁의 성과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데 왜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그것을 체감하지 못한다고 말할까? 깃카와 교수는 두 가지 원인을 지적했다. 첫째는 성장률이 아직 낮다는 것. 둘째는 산업간, 지역간, 기업간뿐 아니라 개인간 양극화까지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장률이 90년대에 비해 올랐다고는 하지만 겨우 2%대다. 성장분은 기업이 담아두지 아직개인에게 소득으로 돌려주지 않는다. 근로자 1인당 소득을 나타내는 고용자 보수 통계는 경기회복이 시작된 뒤에도 2004년까지도 계속 마이너스였다가 2005년에 겨우 1.8% 증가로 돌아섰다.

또 '고이즈미 개혁'은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정책이다. 강한 자를 더 키워 우선 전체 파이를 늘려놓겠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경쟁력이 약한 부문이나 지방의 도태도 일어난다. 경기회복 시대에 더 불행해지는 사람도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경기회복을 실감하지 못하겠다는, 오히려 경기가 더 나빠졌다는 사람들까지 나오는 것이다.

일본의 경기회복은 이런 과정을 거쳐 진행되고 있다. 이에 대한 평가는 갈린다. 진보파 주간지 '슈칸 킨요비'의 사다카 마코토 사장은 "모두가 함께 나아지는 길을 택하지 않고 양극화를 심화시켜 일본경제 전체의 체질을 약화시켰다"고 혹평했다. 취재기간 중 이런 목소리를 간혹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적극적인 저항은 없다.

섀터화이트씨는 "2001년 당시 소수파였던 고이즈미가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국민적 위기감의 발로"라고 봤다. 이 같은 '위기감'이 현재 일본의 개혁을 추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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