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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평대대 야전병원 앞에 선 16살 최영길 소년병.
1950년 10월, 경기상업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최영길 소년(당시 16살)은 전쟁을 피해서 고향인 평북 박천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사업을 해서 중학교부터 서울에서 다녔던 것.

그러나 북한군이 압록강 근처까지 밀려가면서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중공군(동네 노인들은 '팔로군'이라고 불렀음)이 내려오면 소년들까지 징집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소년의 할아버지는 집에 막 도착한 손자를 다시 남쪽으로 내려 보낸다.

북으로 진격해 올라가던 호주병사들은 평북 정주에서 맨발인 채로 북한군의 시체에서 쌀을 꺼내고 있던 최영길 소년을 발견했다. 소년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 인연으로 인생의 절반 이상을 호주에서 살다가 4월 7일 72세의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가평대대'와 최영길 소년

박천은 산악지대였다. 전시였으니 먹을 것 또한 있을 턱이 없었다. 소년은 몇 날 몇 밤을 산 속에서 헤매다가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으면 조심스럽게 도로 쪽으로 내려가 먹을 것을 구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오히려 패주하는 북한군들과 맞닥뜨리게 되어 몇 차례 위험한 고비를 맞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즐비하게 쓰러져 있는 북한군의 시체들을 발견했고 그들의 호주머니에 생쌀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극도로 허기져있던 소년에게 시체는 단지 먹을 것을 제공하는 보급창고에 불과했다.

제법 쌀이 모아져 산 속으로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갑자기 인기척이 들렸고 소년의 코앞으로 총부리가 들이닥쳤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손을 번쩍 들고 몇 마디 영어를 지껄였다. 군인들이 깜짝 놀랐다. 한국에 상륙한 이래 처음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민간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 1998년 열린 가평대대 대원들의 퍼레이드 모습.
ⓒ 윤여문
"난 그들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늘어진 중절모를 쓴 그들 모습은 서울에서 보았던 미군들과 전혀 달랐거든요."

호주에서 온 군인들이었다. 압록강 쪽으로 전진하기 위해 전방정찰을 나왔던 정찰대원들은 허기 때문에 거의 쓰러지기 직전상태인 소년을 야전사령부로 데려가 먹을 것을 주며 돌봐주었다. 그들은 소년이 건강을 회복하면 가던 길을 계속 가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생각은 달랐다.

"우선 그들과 함께 있으면 굶주리지 않겠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부대의 간이천막 안에 먹을 것이 가득했거든요. 또한 군인들이 아주 친절했고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참 따뜻하게 보살펴줬습니다."

소년은 부대에 계속 남겠다고 했고 호주군인들도 그를 자신들의 아들로 받아들였다. 소년은 부대의 마스코트가 되어 장장 3년간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영어도 서툴렀고 그들이 숨 막히는 전투를 벌이면서 전진과 후퇴를 거듭해 그냥 따라다니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밥값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잔심부름도 하고 간단한 통역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영길 소년은 제3대대의 식구로 자리 잡게 됐고 나중에는 정식 군속으로 발령되어 통역병·위생병·보급병 등으로 일하게 된다. 또한 6개월 내지 1년 단위로 교대되는 3대대 요원들보다 3배 또는 6배 가까이 장기근속하게 되어 제3대대 한국참전의 산 증인이 된다.

호주 3대대를 구해낸 16살 한국소년

그는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50년 11월 중순경, 연합군이 중공군과 맞서 진퇴를 거듭하던 때였다. 안주의 강 언덕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호주군은 미군의 부교설치가 끝남과 동시에 강 건너 쪽에 있는 마을을 점령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당시 의무중대에 소속이었던 최씨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죽기 직전의 상태에 놓여있던 부상병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부대원 두 명과 함께 날계란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갔다.

조심스럽게 마을 입구에 당도해 집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토방 위에 놓여있는 북한군의 방한화를 발견했다. 깜짝 놀란 세 사람은 엉금엉금 기어서 마을 빠져나와 언덕 쪽에서 뒤돌아보니 마을에는 북한군이 득실거렸다.

부대로 돌아온 최씨 일행은 대대장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고, 대대장은 사실확인을 위해 정찰병을 내려보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최씨는 지휘부로부터 완전한 신임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보고내용이 사실이라는 게 판명되자 부대의 철수명령이 떨어졌고 부교를 설치하던 미군들까지 부랴부랴 철수했다. 나중에 그때 상황을 분석해보니 연합군의 진격이 너무 빨랐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연합군은 군용트럭을 이용해 빠르게 전진했고 북한군은 도보로 느리게 후퇴했기 때문에 연합군은 부지불식간에 적들의 중간 위치에 놓였던 것이다.

죽기 전에 꼭 날계란을 먹고 싶다고 했던 부상병의 소원을 들어주려 했던 최씨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는 못했지만 대대장의 확고한 신임을 얻게 됐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1천여 명의 대부대가 절체 절명의 위기에 빠졌다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게되어, 후퇴 중에 사망한 부상병의 난데없는 소원이 부대의 운명을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그후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영국대대가 전멸하다시피 했던 것을 감안할 때 당시의 상황이 일촉즉발의 위기였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전쟁보다 추위를 더 힘들어 한 호주군인들

▲ 항상 태극기가 게양되고 38도선 조형물(한국에서 가져온 것임)이 놓여있는 가평대대 입구 모습.
ⓒ 윤여문
최씨는 주로 위생중대에 근무했는데 말이 위생중대였지 부대여건이 너무 열악해 야전병원의 기능을 거의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심한 경우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부대가 이동하는 상황이었고 1·4후퇴 당시의 추위는 전쟁보다 더 견디기 힘들 정도로 혹독했다. 땅이 꽁꽁 얼어붙어 천막조차 제대로 칠 수 없었고 부상병들은 치료조차 변변하게 받아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어가는 상황이었다.

그 때 최씨는 참 많이 울었다고 했다. 본인도 추위를 견디기가 힘들었지만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부상병들을 보면서 전쟁의 참혹함에 치를 떨었다고 했다. 그는 부상병들을 조금이라도 덜 춥게 하기 위해서 마을로 내려가서 지푸라기를 얻어와 맨땅의 모포 위에 누워있는 부상병들의 등 밑에다 깔아주었고 화로를 얻어다가 밤새 화롯불을 지피면서 그들을 간호했다.

"그 때 나의 간호를 받은 부상병들이 참 고마워했습니다. 특히 내가 화롯불 지피는 것을 보며 신기해했고, 불 위에다 소금을 뿌려 가스를 방지하는 기지를 보이자 어린 나이에 너무 슬기롭다며 감탄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나를 만나면 부둥켜 안습니다. 정말 지독한 겨울이었습니다."

1·4후퇴 당시, 경기도 이천으로 후퇴했던 제3대대는 추위 때문에 전투를 제대로 펼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일본으로 철수해 일단 겨울을 난 다음 다시 복귀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사시사철 온난한 기후 속에서 살아온 호주병사들에게 한국의 겨울은 전쟁 이상으로 혹독한 것이었다.

호주 3대대 장학금으로 대학 진학

▲ 가평대대 전우들과 만나고 있는 생전의 최영길(맨 오른쪽) 회장.
ⓒ 윤여문
한편 최영길씨는 아버지가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 최씨가 막사 안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본 병사들이 그를 위로하며 여비를 마련해 부산에 다녀오도록 해주었다. 당시 최씨는 호주군대의 정식 군속으로 발령 받아 보급병으로 근무하며 일정액의 봉급을 받고 있었다.

정신없이 3년이 흘러갔고, 최씨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며 특별한 소년시절을 강요했던 한국전쟁은 휴전이라는 어정쩡한 결과로 매듭지어졌다. 그는 휴전직전 정들었던 호주군 병영을 떠났다. 전쟁으로 중단됐던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그후 최영길씨는 호주군으로부터 소정의 장학금을 받아 연세대 상대에 진학했고, 3년간의 비공식적인 군대생활을 했음에도 병역이수를 인정받지 못해 다시 한 번 군대생활을 했다.

최씨는 대학을 마치고 나서 가평대대의 초청으로 1968년 호주로 이민하여 한국인의 호주이민 제1호가 됐고, 이민과 동시에 호주국영인 콴타스 항공의 시장계획부 사원으로 입사해 23년 간 근무한 후 지난 91년 정년퇴직 했다.

그는 1969년 가평대대의 전무후무한 명예부대원이 됐고, '한국 및 동남아 참전협회(Korea & South Asia Forces Association of Australia)' 한국지부를 창설해 3회에 걸쳐 지부장을 맡았다. 그는 또한 한인사회와 가평대대에 끼친 공로로 호주정부로부터 '호주훈장'을 받기도 했다.

호주 군인들이 기억하는 최영길 소년

▲ 최영길씨가 즐겨 썼던 가평대대의 붉은 베레모.
ⓒ 윤여문
지난 1998년 4월 24일 '가평의 날' 행사장에서 만난 레이 에드워드씨(한국전쟁 당시 중위로 근무)는 당시의 최영길 소년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는 안전핀·붕대·집게·가위·솜 등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한 마디로 걸어다니는 공구함이었으며 뭐든지 다 수리했다. 그는 통역관, 위생병, 병참요원으로 3대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보물이었다."

한편 2004년에는 가평전투 당시 최영길씨의 직속상관이었던 군의관 도널드 비어드 예비역 대령이 멀리 애들레이드에서 '가평의 날' 행사에 참석차 왔다. 그에게 거수경례를 올린 최씨가 때늦은 항의를 했다.

"비어드 군의관님, 17살짜리 소년에게 다 죽어가는 부상병들을 맡겨놓고 전부 나가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이봐 초이, 난들 그 생지옥 속으로 나가고 싶었겠나? 그땐 정말 비참했어. 제대로 치료조차 받아보지 못하고 죽어간 병사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온다네."


가평전투 당시 17살의 소년이었던 최영길씨가 백발이 성성한 70살의 노인이 되어 용맹스럽기 그지없던 가평대대 용사들과 함께 술잔을 부딪치던 2004년 '가평의 날'은 어느덧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술기운이 거나해진 최씨가 다음과 같은 말들을 덧붙였다.

"전 지금도 가평 계곡을 뒤덮었던 중공군의 시체더미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전쟁은 죄악입니다."

"호주군인들은 정말 용감하고 성실했습니다. 아무리 전선의 상황이 어려워도 서로 격려하면서 불굴의 정신으로 싸웠습니다. 위계질서가 분명하면서도 마치 형제들처럼 지냈습니다. 미군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호주군인들이 훨씬 도덕적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중부전선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을 때 미군들이 바로 옆에 있었거든요."

"가평대대의 별명이 '충직한 군인들(Old Faithful)'인데 그냥 생긴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포연이 가득한 전선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용맹스럽게 전투를 벌이던 그들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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