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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고속철도가 지나갈 예정지가 우리 밭이고 거기서 50미터 바로 아래 환경조사원이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곳이 우리집 이다.
ⓒ 송성영
"지도에 보면 바로 아저씨네 집 뒤로 뚫리는데요, 50m 뒤쪽으로요."

천수답에 물이 부족해 죽을 지경인데 수질과 지질 조사를 나왔다는 환경 조사원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나!"

그 말을 듣자마자 내 입에서 욕설이 튀어 나왔습니다.

"알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
"알긴 뭘 알아요! 지금 알았구먼."

정말 '개 같은 경우' 였습니다. 2년 후에 호남 고속철도 공사가 시작되는데 사전 예고나 통보도 없이 금 딱 그어놓고 우리 집 바로 뒤쪽으로 지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본 계획이라고는 하지만 환경조사원 말로는 거의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합니다.

애지중지 유기농 텃밭에 철로가 깔린다네

우리 집 뒤 50m에는 내가 가꾸고 있는 밭이 있습니다. 비록 남의 땅이지만 애지중지 일구고 있는 그 밭으로 철로가 깔릴 예정이라는 것입니다. 수 년 동안 농약은 물론이고 화학비료조차 주지 않고 유기농으로 땅을 살려 놓은 곳입니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손으로 일궈낸 밭입니다. 흙 한줌 손길 닿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고속철도가 들어서면 이것저것 별의별 경제적인 이익이 창출된다고 합니다. 수 조원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내게는 수 조억이 넘을 미세한 생명체들, 땅을 살리는 미생물들이 더 소중합니다. 단 한 마리의 도롱뇽이 더 소중합니다. 개울에서 살아가는 다슬기며 반딧불이며 온갖 생명들이 더 소중합니다.

닭에게 먹이거나 땅을 되살리고 있는 풀 한포기가 더 소중합니다. 맑은 공기가 더 소중합니다. 아, 거기다가 밭 옆댕이 둠벙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사는 소중한 생명들은 또 어떻고요.

뭇 생명들이 살 수 없으면 당연히 사람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 네 식구가 살아가야할 보금자리도 당장 문제입니다. 50m 뒤 쪽으로 철로가 지나가는데 그 옆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경제성장을 상징하는 매끈한 고속열차 지나가는 소리에 장단 맞춰 '기차 길옆 오막살이' 노래를 목이 터져라 실컷 부르며 살아야 될까요?

"어떻게 하라는 거여, 학생들이 환경 조사 나오지 않았으면,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모른 채 보따리 싸야 했잖어, 철도가 지나가니 보따리 싸슈, 하면 보따리 싸야 되는 거 잖어, 내가 학생들에게 화낼 이유는 없지만…."
"어떤 분들은 고속철도가 머리 위로 지나갈지도 모르는데도 전혀 모르고 있더라구요."

개발지상주의자들은 새 터를 구하는데 1년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 여기는 모양입니다. 농토를 일구고 사는 사람들이 아파트 이사하듯 간단하게 터전을 잡을 것이라 여기는 모양입니다. 사지 멀쩡한 젊은 나야 어딜가서 못 먹고 살겠습니까마는 노인들은 대책이 없습니다.

본래 호남고속철도는 국립공원 계룡산 주변을 관통하려 했는데 당초 계획이 환경단체나 사찰 스님들의 절대반대로 무산되었고 그 수정된 계획이 하필이면 우리 집 뒤쪽인 것입니다.

우리 집 쪽이 아니라 해도 문제는 여전합니다. 어느 쪽으로든 철도가 지나가게 되면 온갖 생명들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국립공원의 생명들만 생명입니까? 진정한 환경론자들이었다면, 진정 생명의 존귀함을 업으로 삼는 수행자들이었다면 개발 자체를 반대해야 했어야 타당하다고 봅니다. 뭇생명들이 죽임을 당하면 결국 그 여파는 사람에게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니 우리 집 뒷산을 까뭉개고 거기다가 멀쩡한 밤나무를 베고 어린 묘목을 심으려 했던 투기꾼들은 이미 고속철도가 그 길로 지나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분명 보상을 노렸던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나는 그들과 몇 년에 걸쳐 신경전을 벌여가며 산을 까뭉개는 것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 뒤에 더 큰 개발지상주의자들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삶의 터전을 지켜야 하나

"예고도 없이 이래도 되는 거유?"

다소 흥분된 어조로 공주시청 담당 공무원에게 전화를 했더니 6월 15일 주민 설명회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철도가 지나가는 해당지역의 각 읍·면·동에 연락이 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며칠 후 이장님의 목소리가 마을 방송을 타고 흘러 나왔습니다.

호남고속철도 사업 계획 설명회가 있으니 내가 살고 있는 계룡면을 비롯한 면 사람들 중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참석하라는 방송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철로가 머리 위로 지나갈지도 모르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설명회에 참석하라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철로가 어느 방향으로 지나갈 예정이라는 얘기도 전혀 없었습니다. 아마 방송을 내보낸 마을 이장님도 그 속내를 잘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고속철도사업 주최 측의 통보 내용을 그대로 옮겨 방송했을 것입니다.

뭇 생명들을 살육하고 그저 잘 먹고 잘 살자는 개발을 지상최대의 과제로 삼고 있는 개발지상주의자들, 어떤 개발지상주의자는 국토를 쩍 갈라 운하까지 파겠다며 호언장담하고 있는 세상이니 고속철도 정도는 누워서 떡먹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땅 한 평 없이 남의 땅을 빌려 농토를 일구고 살아가는 소작농들의 심정은 전혀 안중에도 없을 것입니다. 경제성장을 내세워 그저 보상금 몇 푼 쥐어 주면 만사가 해결될 것이라는 '개 같은 발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체 어떤 이유를 내세워 싸워야 할지도 조차도 막막합니다. 그 결과가 불 보듯 빤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대자연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순응하는 환경론자들이나 사찰 스님들은 국립공원 통과 절대불가를 내세워 철로 방향을 바꿔놓을 수 있었지만 그저 평범하게 야산에 기대어 살아가는 땅 한 평 없는 소작농들은 대체 어떤 이유를 내세워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단전에 힘을 주고 길게 심호흡을 해 봅니다. 평상심을 되찾고 오늘은 마저 끝내지 못한 손모내기를 매듭지어야 합니다.

#호남고속철도#국립공원#계룡산#개발지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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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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