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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충남애국학생청년연합 공동의장 오재록씨
ⓒ 장승현
87년 6월항쟁의 출발은, 그해 1월 발생한 서울대생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건을 계기로 6월항쟁이 시작된 것은 분명 아니다.

80년 광주항쟁을 겪은 뒤 군사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 세력이 수년에 걸쳐 다양한 조직 확산과 투쟁의 경험을 차곡차곡 일구며 일대항전을 준비하였던 시기였으며, 87년은 그야말로 한국사회의 정치적 민주화의 열망과 노동자 농민 등 민중생존권 요구가 다양하게 분출되는 거대한 민주화운동의 현장이자 물결이라고 할 수 있다.

박종철군 사망사건은 양심 있는 의사에 의해 ‘고문에 의한 사고사’라고 밝혀지면서 민주화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주었다. 군사독재정권의 장기집권을 분쇄하고 민주화를 쟁취하자는 운동의 목표를 설정하였고 고문학살정권 퇴진시위를 대대적으로 벌여나갔지만, 4월 13일 전두환은 88올림픽까지 개헌 논의를 일절 금지시키는 내용의 호헌조치를 발표하게 된다.

5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광주항쟁 7주년 희생자 추모 미사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세상에 알렸고, 학생운동을 비롯하여 전 운동세력이 전두환 군사정권과 전면전을 치르다시피 민주화 투쟁을 벌여나갔다.

▲ 6월항쟁 거리행진에서 아들 딸과 함께 걷고 있다
ⓒ 장승현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철야농성이 이어졌고, 대부분의 대학들은 학생총회를 열고 수업거부와 함께 투쟁기간을 선포하고 연일 학내시위와 거리시위를 벌였다. 6월 9일은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아 의식불명에 빠진 사건이 발생하면서 6월항쟁이 전 국민적 분노의 도화선이 되었다.

다음날인 6월 10일, 한쪽에서는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를 뽑는 민정당 전당대회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박종철 고문살인조작 범국민규탄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아스팔트 위에서 뜨거운 6월을 보냈던 한국민주화운동은 87년 6월 29일 드디어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후보가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던 대전지역의 시위는 6월초 충남대생들의 1만명 대전시내 가두시위를 기점으로 6월항쟁이 학내시위를 넘어 시민과 함께하는 항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지역을 제외하고는 다른 지역에서는 거리투쟁이 확산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전지역의 투쟁은 전국에 본보기가 되었으며, 대전지역 투쟁에 힘을 보태기 위해 다른 지역 학생들이 대전지역으로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대전지역에서 6월항쟁 시위를 주도하였던 학생운동 지도부 중 전 대전민청동우회 회장 오재록(44세)씨를 만나 그때 활동했던 내용을 인터뷰를 해본다.

- 6월항쟁 때는 몇 학년이었지요?
"한남대 4학년이었습니다. 대전지역 학생운동도 점차 전열을 가다듬고 본격적으로 정치투쟁을 준비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충남대만 운동권 학생회를 이끌었고, 다른 대학은 운동권이 비합법조직으로 활동했습니다. 물론 87년을 겪은 후 대부분의 대학에서 운동권이 아니면 학생회에 당선될 수가 없었습니다(웃음).

대전지역 대학에서는 4월이면 4·19주간을 통해 군사정권 퇴진 시위가 시작하였고, 5월에는 5·18 광주항쟁 계승 기간으로 정치투쟁을 본격화 하였습니다. 87년은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생 이후 각 대학에서 자체집회와 재야단체와 합께 연합 가두시위를 조직하기도 하였습니다. 4월을 거치면서 대전지역 학생운동 내부에서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학생운동이 담당하고자 의견을 모았고, 학생운동연합조직을 만들었습니다."

- 당시 대전지역 6월항쟁을 주도했던 충남애국학생투쟁연합이란 어떤 조직이었지요?
"학생운동 조직이 합법적 조직의 연합체인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으로 꾸려지기 바로 전단계로서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려는 활동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충남대, 한남대, 목원대, 배재대, 공주사대, 고려대 서창캠퍼스 등 6개 대학의 학생운동 조직이 함께 하였으며 5월 충남대에서 공동 출정식과 함께 각 대학에서 정치투쟁을 조직하였고 6월의 거리에서 역할분담과 함께 연합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 그때 정치적인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민주화에 대한 염원이 들끓었던 시기였습니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갖은 탄압으로 민중들의 정치적 진출을 막았고, 4·13 호헌조치를 통해 박정희 정권처럼 정치적 생명연장을 자행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민주화운동의 최대목표는 군사정권의 집권연장을 막아내는 것이었으며, 직선제 개헌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군사정권의 재집권을 분쇄하기 위해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개헌, 민주쟁취’가 시민들과 함께 거리에서 외친 핵심 구호였습니다."

- 당시 학내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80년대 초·중반, 대학에서 광주항쟁 사진전을 열고나면 대다수의 학생들은 살인적인 군사정권을 향해 주먹을 쥐었으며, 또 대열에 함께 하지는 못해도 뒤에서 도움을 주거나 격려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와 조작 은폐사건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고, 학생운동 지도부의 정치투쟁 조직으로 각 대학마다 자연스럽게 대정부 집회가 이루어지고 학생참여가 일어났습니다. 6월 초순부터 대전충남 지역 대학들은 비상학생총회를 통해 수업거부를 결의하였으며, 오후에는 학내집회를 실시하였고 오후에는 시내로 나가 시민들과 함께 거리에서 항쟁을 벌였습니다."

- 대전지역 시내상황은 어떠했습니까?
"6월항쟁 기간 중, 시민들과 함께 거리를 채웠던 시간은 보통 오후 5시경부터 시작됩니다. 각 대학의 지도부는 사전 상의하여 대전의 중요지점을 각각 나누어 동시에 시위대를 형성하여 대전역이나 도청 앞 광장으로 집결하여 시민들과 연대하였습니다. 학생들이 시위대를 만들면 곧바로 시민들이 합류하였습니다. 대전에서는 시장상인들과, 시내에 직장은 둔 젊은 직장인과 일반시민들이 주로 합세하였는데, 시민들이 염원하는 민주화의 의지는 학생들보다 더 대단하였습니다. 한 예로 학생들은 밤 9시경이면 다음날을 위하여 시위를 종료하려 하는데 시민들의 의지로 시위가 계속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 당시 기억에 남는 시민들의 참여 상황을 소개한다면?
"6월항쟁은 시내의 곳곳에서 전쟁터를 방불할 정도로 치열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대에 점차 시민참여가 늘어났고 구경하는 시민들도 모두 시위대 편이었으며 시위대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학생들이 경찰들에 밀리면 상점 안으로 숨겨주고 셔터를 내리기도 하였고, 백골단이 진압하면 야유를 부렸고 학생들이 잡혀가면 따라가 빼내오기도 하였습니다.

모금함을 돌리면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모금함이 풍성해 졌고, 음료수나 빵 등이 수시로 시위대에게 날라졌습니다. 또한 자유발언대 시간이면 시민들의 연설은 운동권 학생들보다도 더 논리적으로 민주화운동의 투쟁성을 역설하였고, 늦은 밤시간에도 더 열심히 항쟁의 대열을 유지하느라 노력하였습니다. 여느 지역에서도 그랬듯이 6월항쟁이 청년학생 중심에서 도화선이 되었다면 항쟁의 마지막은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습니다."

- 당시 지도부를 하였던 사람들의 지금 모습은?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를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6월행쟁 기간을 전후로 하여 감옥(집시법 위반 등)생활을 거쳐 사회에 진출하였습니다. 충남애국학생투쟁연합 공동의장을 하였던 사람들 중에는 노동운동으로 투신하여 현재에도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과, 문화예술운동 분야에서 활동을 하거나, 교사가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먼저 고인이 된 동지들도 있는데 윤재영 동지는 충남대 총학생회장으로 6월항쟁 당시 학생과 시민들을 모아 유성에서 대전역까지 12∼13㎞ 민주화 대오를 이끌어 온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이 행진이 대전에서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이것의 성공이 희망을 줬습니다. 졸업후 청년운동을 하다가 수배 중 지병으로 사망(1992)하였으며, 강연석 동지는 배재대학교 투쟁위원장과 충남애국학생연합 공동의장으로 6월항쟁을 이끈 주역이었습니다.

이후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두 차례의 감옥생활을 마친 후 청년운동(대전민주청년회) 활동 중, 불의의 사고로 운명하였습니다. 이 두 동지들이 남겨준 조국사랑과 민중사랑에 대한 열정은 남아있는 동지들에게 커다란 믿음으로 가슴에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 오재록씨가 머리 다친 사건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사건이었는데 어떤 사건이었죠?
"88년 4월 수입개방 민중생존권 집회 때 전경이 쏜 직결 최루탄을 맞은 일입니다. 맨 앞에 서서 투쟁하다 직결 최루탄을 맞고 두개골 함몰 골절의 두부 좌상을 입은 사건입니다. 현장에서 피 흘리고 학교 안으로 들어가 학교 총장실 차를 타고 성모병원에서 수술한 사건입니다."

- 그땐 이 사건 때문에 시끄러웠지요?
"이한열 이후 최루탄 사고가 처음으로 나 전국 방송이나 언론에서 시끄러웠습니다. 의사들과 많이 싸웠는데 의사들은 최루탄으로 맞았는지, 확인해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수술할 때 제거한 자료를 달라니까 끝내 없다고 했습니다."

- 현재는 보상 문제가 어떻게 되었나요?
"보상심위위원회에서 상이자로 판결났습니다. 국가가 최루탄 사고를 인정한 것이지요."

▲ 대전민청 회원들과 6월항쟁 20주년 기념행사장에서
ⓒ 장승현
- 그 이후 청년운동 활동은 언제부터 했습니까?
"88년 다치고 89년 충문연(충남문화운동예술연합)과 마당극 얼카뎅이(우금치 전신)에서 1년동안 활동했습니다. 그후 6개월 정도 공백 기간이 있었는데 버스 안에서 우연히 충남대 총학생장 출신이 윤재영을 만나 새길청년회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90년도 여름부터 새길청년회에서 활동하게 되었지요".

- 마지막으로 6월항쟁을 회고하자면?.
"6월항쟁을 주도했던 총학생들 중에 윤재영씨, 강연석씨가 고인이 되고 지금 저만 남았습니다. 윤재영 동지는 충남대에서 학생과 시민들을 모아 유성에서 대전역까지 12∼13㎞나 되는 민주화 대오를 이끌어 온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이 행진이 대전에서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이것의 성공이 희망을 줬습니다.

졸업 후에 청년운동을 하다가 수배 중 지병으로 사망(1992)했는데, 그 친구를 아직까지도 가슴에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또한 강연석씨도 그때 함께 했던 동지인데 두 사람이 먼저 이 자리에 없어 마음이 착잡합니다. 시민의 힘으로 사회를 변화시킨 6월 항쟁. 노동자, 농민, 그리고 학생이 함께 이뤄낸 그 날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왔지만 앞으로도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현재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앞으로도 열심히 고민하며 그 때의 동지들과 또 지금의 동지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종뉴스(www.sje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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