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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을 다 잊고 아주 오래 전, 수학여행이라도 온 듯 소녀처럼 들뜬 첫날 해운대 바닷가에서 윤정모, 신중선, 공선옥 작가
ⓒ 김기
이방인의 사내 뫼르쏘를 논리보다는 습성으로 잘 이해하는 나는 여름이 되면 자주 심한 우울에 빠지곤 한다. 내리쬐는 한여름 햇볕은 백만대군이 일제히 쏘아대는 화살인 듯 하늘을 바라보면 울렁증을 일게 한다. 그 햇살들은 시멘트 거리에 반사되어 높은 파도처럼 멀미나게 하는 것이다. 20년 전, 시청에서 명동까지 쫓고 숨는 숨 가쁜 시간에도 최투탄보다 그날의 유난히 뜨거웠던 햇볕이 싫었다.

더욱이 말이 장마뿐인 요즘 같은 때는 유달리 짜증스러워지는 때이다. 그래도 산 속에 묻혀살 수 없는 처지인 터라 거리로 등떠밀려 나올 수밖에 없는 소시민의 저항은 기껏해야 500원 주고 산 아이스바를 우악스럽게 깨무는 것 정도이다. 단맛이 또한 못 마땅해 시부렁거리면서도 두 개째 봉지를 뜯을 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부르르 떤다.

주머니 바깥으로 액정부분만 겨우 보려다가 통화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내일 여행 갈래요? 윤정모 선생님이랑 공선옥씨랑 가는데 남자 하나 끼우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소설가 신중선씨였다. 여행? 누가 기사거리로 어디 가잔 말이야 노상 듣는 말이지만 여행이라니? 잠깐이었지만 의아한 저쪽의 제안에 어리둥절하면서도 “네. 좋죠. 저야 영광이죠” 라고 닭살돋는 말까지 덧칠하고 있었다.

다음날 예술의전당 앞에서 만나자는 다짐에 답하고도 가던 길을 잇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있었다. 깜박 잊고 있던 아이스바가 샌들 위로 툭 떨어지고서야 부랴부랴 사흘 간의 선약들을 취소하거나 연기하였다. 그리고 이것저것 약속한 일들을 마무리 짓느라 밤을 꼬박 새우고 느닷없는 여행길에 올랐다.

일행 중 가장 연장자인 윤정모 선생이 운전대를 잡고 나는 운전석 뒤의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여행을 시작해서는 누구나 그렇듯이 대한민국 대표작가들 또한 여느 설렘과 다를 바 없었는지 세 소설가의 수다는 쉬지 않고 이어졌다. 빗속을 뚫고 가는 느긋한 주행이지만 서울서 출발해서 갈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인 부산에 도착했을 때에는 마치 인천쯤 왔나 싶을 정도였다.

이쯤에서 쟁쟁한 명성의 세 소설가들이 장장 다섯 시간 동안 단 한 마디도 도망갈 수 없는 좁은 차내에서 주고받고, 웃어젖혔던 수다의 내용들이 궁금해졌겠지만 그것들을 그대로 지면으로 옮길 수는 없다. 상당히 사적이고, 대단히 솔직한 이야기들이었기에 그렇다. 사실 셋 중 공선옥 작가는 그날 처음 대면한 사이였는데 옆자리의 나는 있는 둥 마는 둥 거침없는 속내를 털어놓는데 적이 놀랐다.

또 한편으로는 현재 문단에 대한 40대, 50대, 60대 세대별 토론장과도 같은 진지함도 곳곳에 배여 있었다. 그러다가 가끔 끼어들 주제도 간간히 나왔는데, 그럴 때면 그 셋이 더욱 열을 낸 수다를 쏟아내는 통에 가뜩이나 민첩치 못한 말투에 문장 하나도 완성하지 못하고 다시 등받이에 몸을 쏟아야 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권투 휴식시간보다 짧은 수다의 휴지기를 잠깐 맞을 때 선생은 “김가야 왜 넌 듣고만 있니. 이번에 네가 구라 좀 풀어봐라”한다. 멍석 깔면 하던 짓도 머쓱해지는 주변머리의 대한민국 사내 중 하나인 나는 옹색하게 “저는 녹음기 할랍니다”라며 그럴듯하지 못한 핑계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 저녁무렵 해변을 따라 걷는 소설가 3인의 모습이 마치 오래된 사진을 보는 느낌을 주었다
ⓒ 김기
부산에 들어와서는 단숨에 해운대로 향했다. 윤정모 선생의 고교시절 친구의 후덕한 배려로 일행은 좀처럼 누릴 수 없는 호사를 누리고 여행 첫날밤을 보냈다. 무뚝뚝하다는 경상도 사람답지 않게 말없이 오랜 친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친구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2박 3일로 시작한 여행이지만 정해진 일정은 둘째날 부산을 출발해 진해에 들러 점심을 먹는 데까지였다. 그곳 진해까지 친구는 자신의 차로 안내를 했다.

바다를 반찬삼아 맛나게 점심을 먹고 이제는 나머지 1박 2일 '꺼리'를 만들어야 했다. 바로 그때였다. 부산으로 향한다는 애초의 계획을 들을 때부터 머리 속에 꼬불쳐 두었던 내 음흉한 생각이 섬광처럼 번쩍였다. 신중선 작가로부터 들었던 대구문화 3인방을 만나보고 싶었다. 뭐 작가라는 사람들이 아무리 번뜩이는 지성과 통찰력을 가진 존재들이라지만 여행이라는 느슨한 공기 속에서는 나 같은 허술한 간계에도 넘어가기 마련이다.

그때부터는 운전대를 내가 잡았다. 사실 특별히 친하지 않고는 차를 맡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눈빛만큼이나 마음도 젊은 윤 선생이었지만 전날 장시간 운전을 한데다 달뜬 마음에 맥주 한 병을 마신 탓에 밤새 아파서 끙끙 앓았다는 윤선생은 도저히 핸들을 지탱할 수 없었다. 핸들을 넘겨줄 때도 잠시만 눈을 붙인다고 단서를 내걸었지만 그 잠시는 다음날 처음 넷이 출발했던 예술의전당으로 돌아올 때까지 네 손에 달려야 했다.

이 여행은 처음부터 모두에게 느닷없이 시작되었다. 십이지궤양에 이것저것 젊은 시절 보살피지 못한 몸은 보상을 요구했고, 여행을 결정하게 된 것도 의사가 여행을 통해 기분전환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에 즉흥적으로 윤선생은 신중선, 공선옥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들도 대책없이 훌쩍 떠나는데 동조한 것이었다.

소설가도 아니고, 문단에 대해 고운 눈 준 적 없는 나였지만 출판사 창고에 쌓여만 가는 문학작품들처럼 쇠약해진 선생의 건강을 대하는 일은 뭔가 확실치 않은 다중의 감정들이 뒤엉키게 만들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만나고 싶은 대구 3인방 중 대부분이 만나기에 적절한 상황이 아니었다. 사실 따지자면 한두 시간 전에 전화해서 만나자는 것이 무리이고 한편 결례인 것이긴 했다. 그들 중 한 명인 이명미 화가가 감기에도 불구하고 먼 곳에서 찾아온 지인 신중선 작가를 외면하지 못하고 화실로 불러주어 천만 다행이었다. 긴가민가했지만 나와 윤선생에게는 말없이 공유하고 있었던 바람이 있었다.

화실 앞에 도착해서는 기자질하는 내게도 내밀지 않았던 책을 주섬주섬 챙기면서 “이게 좋을까? 아니야 이건 너 가지고 이거 주자”는 윤선생의 눈빛에서 병을 안고 있는 작은 몸이 겪는 여독만이 아닌 어떤 다급함, 절실함이 읽혔다.

그 눈에 담겨 있는 것은 단순한 무엇이 아니라 오랜 세월 한 길을 걸으면서 배인 습성일 터였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내가 다 아는 듯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다 볼 수 없고, 그 중 조금을 봤다 해도 마치 아는 듯 말할 자격이 내겐 없다. 그렇지만 불과 몇 초에 불과한 시간에 나는 마치 수년의 세월을 선생이 보낸 거칠고, 땀내 물씬 풍기는 거리를 함께 달려온 기분에 젖었다.

화실에 들어서면서는 어류의 기억력을 가진 나는 조금 전의 감정들에서 떠나 있었다. 이런저런 설명을 듣기도 전에 화실 여기저기 놓인 작품들에 눈을 빼앗겼다. 색채가 강한 현대미술작가의 이름 몇이 머릿속을 단말기를 긁는 신용카드처럼 훅 지난다. 그림에 대해 잘 아는 듯 떠들 처지는 못 되지만 순식간에 그림들에 반하고 말았다. 마치 고대 유적지에서 느꼈던 흥분과도 같았다. 차라리 그곳에 눈을 빼놓고 오고 싶었던.

▲ 왼쪽부터 공선옥, 이명미,박동준,신중선,윤정도. 장르가 다른 이들이 만나자마자 친구가 되고 동지가 되었다.
ⓒ 김기
화가와 그림에 대해서 채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윤 선생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어렵긴 하지만 꼭 하고 싶었던 말을 마침내 꺼낸 것이다. 그러자 함께 간 일행은 일순 이명미 화가에게로 관심이 모아졌다. 다들 무심하게 남 일인 양 위장했지만 팽팽한 긴장감이 응축되었다.

감각으로 측정할 수 없는 대단히 짧은 시간이 흘렀고, 화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응낙했다. 그리고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문제의 대구 3인방 중 다른 하나인 박동준 패션디자이너에게도 직접 말을 하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순간 좌중은 화사한 웃음이 번졌고 나는 윤선생의 이야기에 보충하는데 이명미 작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외국에 나가는 일정 때문에 대구에 없을 거라던 디자이너 박동준씨에게서 걸려온 전화였고 이명미 작가는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전화를 끊는다.

다시 그림 이야기로 약간의 시간을 보내는데 박동준씨가 환한 모습으로 화실로 들어선다. 마치 대본대로 움직이듯 사람들은 빠르게 인사를 나누고 절대로 초면에 나눌 수 없는 내용들도 가볍게 차 한 잔 하듯이 후딱 처리했다.

그런 것보다는 좋은 사람들을 사귀게 된 것에 훨씬 흥분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야 할 사람 중 누군가 절실하게 바라는 것에 대해서는 고민의 이유는 없다는 투였다. 고속도로에서 담배를 피우기 위해 열었던 창가로 치밀던 바람보다 더 강렬하게 시간이 흘렀다. 저녁까지 대접을 받고는 대구 3인방과는 헤어졌다. 그때 여름 하늘이 깜깜해졌고 우리는 숙소를 찾았다. 각자 방으로 들어가기 전 윤선생은 “우리 씻고 맥주 한 잔 하자” 했다.

아침밥도 생략한 채 우리는 서울로 향하였다. 원래 공선옥 작가는 오전을 함께 보낸 후 순천으로 가기로 했었으나 계획은 다시 바뀌어 있었다. 어젯밤 1시까지 기다려도 끝내 술 한잔을 위한 전갈도 못한 채 피곤을 달래야 했던 소설가 3명은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말끔해 보이진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한참 때의 젊은이들도 아니고 강행군의 여행이었다. 뒷자리에 앉은 신중선, 공선옥 작가는 지난 이틀과는 달리 입술을 붙이고 있었고, 윤선생은 조수석에 앉아 이런저런 시디를 골라 음악을 듣는데 열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왔을까. 내가 입을 뗐다. “처음엔 소설가 3인의 수다여행을 취재하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모금여행이 되버렸네요”하니 윤선생은 “내 팔자가 원래 그래. 이틀을 온전히 놀아본 적이 없어” 하면서도 대구에서의 수확이 참 기꺼운 듯 환하게 미소를 입에 물었다.

트렁크에 고이 담아 올라오는 이명미 작가의 그림은 새 언론을 시작할 22명에게도 같은 미소를 선사할 것이다. 음악이 나올 때마다 큰소리로 따라 부르는 윤선생의 머릿속에는 그 스물두 개의 다른 웃음이 하나씩 더해지고 있었나 모를 일이다.

#공선옥#이명미#윤정모#소설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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