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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이는 아픈 병아리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인상이는 아픈 병아리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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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컴퓨터 앞에서 한창 골머리를 싸 메고 있는데 전화 한통이 걸려 왔다. 사랑방과 안방에 전화가 연결되어 있는데 아내와 나는 동시에 수화기를 들었다. 

"저 이균인데요…."
인상이 친구 유이균이었다. 한 시간 전쯤에도 전화를 걸어왔는데 이번에는 또 무엇 때문에 전화를 한 것일까?

"왜?"
"인상이 한티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잠깐만 기달려."

나는 수화기를 놓지 않고 몰래 도청했다. 평소 엉뚱하기로 정평이 난 녀석들이었다. 한 놈이 전화를 걸어 '오늘 숙제 뭐냐?' 물으면 받는 놈은 '나도 모르겠는디' 그러다가 다시 통화하여 자신이 직접 물어 보면 될 것을 누구한테 물어봐서 전화해 달라는 뭐 이런 식의 황당한 대화를 하는 녀석들이었다.

녀석들의 대화법은 그냥 막 말로 하자면 사오정 수준이고 그 수준을 최고도로 끌어올려 놓고 보면 선문답이었다. 선문답이 따로 있겠냐마는 아무튼 옆댕이서 녀석들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기분이 묘해진다.

생각해 보니 녀석들의 대화는 선문답처럼 골치 아픈 것이 아니다. 듣고 있노라며 생각이 또아리를 트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없어진다. 녀석들의 대화법은 단순하기에 갈등이 없다. 싸움이 없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저 꾹꾹 질러대며 장난을 걸고 싶어진다. 이번에는 또 뭔 싱거운 얘기를 할까 궁금했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인상아 나여."
"왜?"
"내일 가방 갖구 가야돼?"
"가방? 아, 아니, 안가지구 갈 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내일 학예회가 있는 날이었는데 책가방을 가져가야 될지 말아야 될지 모르는 녀석이었던 것이다. 맥 손을 놓고 있던 인상이 녀석은 대체 내일 어떻게 할 작정이었을까? 역시나 녀석들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웃음보를 꾹꾹 틀어막고 대화를 계속 엿들었다.

"백규는 가방 가져 간다구 하던데? 너는 잘 몰라?"
(최백규가 내일 가방을 가져가야 한다고 했다면서 인상이에게 전화는 왜 걸었을까?)

"그래?, 내가 전화해서 애들 한테 물어 볼까?"
"그래 물어보고 전화해 줘."
"그래, 알았어."
"아, 아니 내가 전화해서 물어볼게."
"응 끊어."

그게 전부였다. 나는 하던 일을 접어 두고 녀석들의 대화 내용을 까먹기 전에 컴퓨터에 기록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카메라를 챙겨들고 쪼르르 안방으로 달려갔다. 녀석은 평소 그러하듯 가방을 까마득히 잊고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인상이 녀석은 '이거 찍어서 오마이뉴스에 올릴 거지?' 방바닥에 머리를 박고 사진 촬영을 거부한다.
 인상이 녀석은 '이거 찍어서 오마이뉴스에 올릴 거지?' 방바닥에 머리를 박고 사진 촬영을 거부한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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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은 빗나갔다. 5학년짜리 인상이 녀석은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엄마 앞에 누워 간난 아기처럼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고 있었다.

"아빠 이거 손가락에 박혔다."
"뭔데?"
"침."

녀석은 엄마가 옷 만드는데 쓰는 핀 침을 손가락에 의료용 침처럼 꽂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내내 그 작은 침 핀 하나에 코를 박고 있었던 모양이다.

"너 뭐 하고 있었는디?"
"이거 하고­…."

녀석은 헤죽거리며 침 핀이 꽂혀 있는 손가락을 내밀었다. 아프지도 않은 모양이다.

"아니, 전화하기 전에 뭐하고 있었냐구."
"책 읽고 있었는데?"
"그람 책을 계속 읽어야지."
"다 읽었는디."

"읽고 있었다며 그새 다 읽었어? 근데 너 내일 가방 가져 갈꺼냐?"
"아니, 백규한티 물어 볼거야."
"물어 봤어?"
"아니"

"백규는 내일 가방을 가져가야 한다고 했다면서."
"언제?"
"아까 임마! 유이균이가 전화로 그랬잖어."
"아니 언제?"

그렇다면 인상이 녀석은 내일 가방을 가져 갈까? 유이균 녀석이 다시 인상이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가방을 가져 가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알려 줄까? 인상이 녀석은 여전히 친구들에게 전화할 생각도 하지 않고 유이균 녀석 또한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나는 '친구에게 전화 걸어봐야지' 하려다가 그만두고 밖으로 나왔다.

안방에서 나와 마당에 섰다. 사랑방에서 작업 하던 골머리 아픈 일을 잠시 잊고 밤하늘에 별을 보았다. 별들이 총총했다. 나는 녀석들의 유쾌한 대화를 떠올리며 미친놈처럼 실실 웃고 있었다.

그날 밤 다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이번에는 인상이의 단짝 친구 윤여일이었다.

"야 있잖아, 청바지 있어?'
"왜?"
"아니 끊어, 집에 청바지 있데."
(옆에 있던 윤여일 엄마가 집에 청바지가 있다고 했던 모양이다.)

"아, 근데 여일아, 너 내일 가방 가져 갈꺼여?"
"가져가야지."
"아, 응 알았어."

가방을 가져 갈 것인지 말 것인지 만사태평이었지만 결국 녀석의 가방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 셈이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내일 가방이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학예회 준비를 하고 10시부터 학예회가 시작된다는데 과연 녀석들에게 책가방이 필요할까?


#생각없는 대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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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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