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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운 말이겠지만 피가 무서웠다. 또한 내가 가진 힘이 무서웠지.”

천하제일인의 말치고는 너무나 뜻밖이었다. 무림인이 피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상인이 돈을 싫어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아니 피를 무서워 한다는 것은 무림인이 아니라는 의미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현 중원 일인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은 정말 놀랄 일이었다.

“아내와 자식의 몸을 덮었던 피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그간 나에게 당한 상대의 몸에서 나오는 피가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나는 피가 싫었고, 무서웠다.”

무신(武神)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인물. 그런 인물의 솔직한 고백은 차라리 충격이었다. 그래서 상대를 죽이더라도 극히 피가 나오지 않는 심인검을 익혔는지도 모른다.

“내 아내와 자식을 죽인 회에 대해서 복수하고자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허나 그런들 무엇이 달라질까? 더구나 믿었던 친구들까지 가담했는데…. 그때부터 나는 내 자신을 잊고 살기로 했지. 하지만 내 가장 큰 실수는 구룡의 천하를 종식시킨 것이었다. 그들은 진정한 사내들이었고, 진정한 무림인들이었지. 나는 지금까지도 그들에게 속죄하며 살고 있고, 그래서 구룡의 후예 두 아이를 거두어 들였다.”

모두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운중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친구들에게까지 속내를 내보이지 않았던 운중의 속내는 그들을 침묵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저 오늘 조용히 떠나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다. 그래서 철담이 그리 부탁해도 나는 거절했지. 다만 침묵과 방관으로 일관하는 것 정도로 그의 부탁을 대신했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상만천이 가져온 저 선물은 또 다른 나를 일깨웠단 말이지.”

운중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던진 것은 금으로 만든 조롱과 크고 작은 두 마리의 금사작(金絲雀)이었다.

“나를 위협하거나 조롱하는 의미였을지는 모르나 내 아내와 자식을 상징하는 저 두 마리의 금사작과 함께 영원히 내 마음마저 저 금조롱 안에 가두어 놓았다는 생각이 들더군.”

“크음.”

상만천이 나직하게 마른 기침을 터트렸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운중은 정확하게 자신이 선물한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 운중보가 나를 가두어 두고 있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운중보를 떠나면 자유로워질 것이라 생각했어. 하지만 나는 운중보가 아니라 바로 저 금조롱과 같은 곳에 갇혀 있었던 게야.”

그 순간이었다. 운중이 흘러내린 몇 올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향하는 순간 금조롱은 순식간에 중간이 끊어져 나가며 절반 정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타당!

절반 이상이 매끄럽게 잘려진 금조롱의 아랫부분이 바닥에 떨어지며 소리를 질렀다. 아주 교묘하게도 두 마리의 금사작은 그대로 매달린 윗부분의 금조롱에 걸려있었지만 이미 그것을 가두고 있던 금조롱의 망은 사라진 상태였다.

아주 단순한 이것의 의미는 매우 큰 것이었다. 스스로 가두어놓고 있던 운중의 마음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제 운중이 침묵으로 일관하지 않을 것이란 의미였다.

“이제 자네가 결정할 시간이야. 자네도 이미 결심을 하고 이 운중보에 들어왔겠지만 말이야.”

운중은 상만천을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하대를 하고 있었지만 아주 자연스러웠다. 상만천의 입 꼬리가 미세하게 씰룩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바닥이 울리며 여러 개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며 제일 먼저 모습을 보인 인물은 해룡신 위일천이었다. 그는 문으로 들어오자마자 운중의 앞으로 다가서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

“주군의 명을 어긴 수하를 단죄해 주시길….”

그 모습에 운중은 고개를 흔들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여간 자네와 좌제는 못 말리는 사람들이야. 그리 하지 말라도 그러니…. 자네가 잘못한 것은 없어. 나는 그저 자네에게 부탁을 했을 뿐이었고, 자네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것 뿐이야. 일어나게. 어서.”

그래도 위일천은 일어서지 앉았다.

“나를 더욱 불편하게 할 셈인가? 그래 명령이네. 일어서게.”

그제야 위일천은 일어나 다시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주군의 하해 같은 은혜에 감사드리오.”

그 말에 다시 운중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순간 위일천은 허리를 펴며 부리부리한 눈으로 안에 있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거구인데다가 눈에는 아직까지 살기를 담고 있어 매우 위협적으로 보였다. 누구든 함부로 행동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위협으로도 보였다.

“하여간 고집스런 사람들이야….”

운중은 중얼거리며 위일천을 따라 들어오다가 엉거주춤 서있는 인물들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백도와 백도에게 기대어 있는 용추를 비롯해 여러 명이 더 있었는데, 놀랄 일은 천하의 풍철한이 함곡과 생사판 종문천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는 것이다.

용추는 아마 혈도를 제압당했는지 몸이 자유롭지 않았다. 헌데 풍철한을 본 운중보주가 갑작스럽게 아주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소를 터트렸다.

“핫핫! 자네 무지하게 맞은 모양이군.”

정말 심각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운중보주의 태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농담을 하고 있다니….

“퍽이나 재미있으신 모양입니다. 뭐 제 몸이 무쇠도 아닌데 때리면 맞아야지 별 도리 있겠습니까?”

반효가 의자를 끌어놓자 풍철한이 볼멘소리를 하며 앉았다.

“이렇게 된 이상, 더구나 여기에 모두 있으니 말해주어야 하겠군. 조금 있으면 그럴 시간도 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

운중이 주위를 쭉 둘러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한 가지 있다고 했지?”

“아, 그만 하십시오. 이제는 저와 상관없는 일에는 죽어도 참견할 생각이 없으니까.”

풍철한이 손을 홰홰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면 되나. 중원사괴가 사사건건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으면 그게 어디 중원사괴인가? 안 그런가?”

놀리듯 은근하게 말하는 운중의 모습을 보며 풍철한은 얼굴을 찡그렸다. 또 뭔 일로 저 작자가 자신을 괴롭히려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풍철한은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는 운중보주를 쳐다보았다. 말을 하든 말든 네 멋대로 하라는 태도였다.

“나는 오늘 운중보를 떠날 생각이네. 오늘부터는 자네가 운중보를 맡아주게. 이것이 내가 자네에게 하는 한 가지 부탁일세.”

그 말에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극도의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특히 다섯 제자의 얼굴에는 더 이상 보일 수 없는 경악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허나 정작 풍철한의 입에서 나온 것은 비명이었다.

덧붙이는 글 | 천지를 마치며 독자분들께 드리는 인사말은 제 블로그에 올려놓았습니다. 주소는 http://blog.ohmynews.com/yinlove/ 입니다. 아쉬움은 남지만 그 동안 성원해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제 블로그에 천지에 대한 느낌이나 다소 아쉬웠던 점 등 많은 사연 남겨주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천지#추리무협#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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