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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자라고 해서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 볼 수는 없다. 특히 오랜 전쟁에 단련되어 죽음과 노니는 무사로서는 더욱 그랬다. 무사의 가슴 속엔 누구나 웅대한 포부가 있다. 일본 전역에서 어차피 정해진 계급이 사라진 것은 오래다. 포부란 누구나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시대가 그렇게 외치고 있다.

오다 노부나가는 지난 20년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운명을 함께했다. 돌풍 같은 위력으로 천하에 이름을 날리는 이에야스지만, 그가 동맹을 어긴 적이 있던가? 노부나가의 기억에 그런 일은 없다. 하지만 그 마음속에 무엇이 꿈틀거리는지 알 수 없다. 그의 가슴 속을 봐야한다. 그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명맥만 유지하던 무로마치 막부(아시카가 정권)는 이제 사라졌다. 세상의 영주들도 대부분 노부나가의 힘 앞에 굴복했다. 사돈까지 맺은 도쿠가와도 신의를 지켰다. 아직은. 그러나 앞으로도 그래야한다. 천하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지금 확실하게 동맹자를 다잡아놓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에야스의 마음은 변함이 없는 걸까? 믿을 수 있는 후다이(譜代: 대대로 이어온 가신)처럼 목숨까지라도 내 놓을 수 있을까? 오다가 딸 도쿠히메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시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의 남편인 시아버님을 증오하고 있습니다. 제 남편 노부야스도 그런 자기 어머니에 동조하는 듯 합니다."

내용 자체는 웃어 넘길 수 있는 내용이다. 다만, 읽을수록 딸의 편지는 도쿠가와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다시없는 단서였다. 마침내 노부나가는 붓을 들었다. 교토에서 사자가 달려와 하마마츠 성의 이에야스에게 편지를 전해주었다. 노부나가의 편지를 읽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이 떨렸다. 몇 번을 읽어봐도 내용은 같았다.

“반역을 꿈꾸는 그대의 아내와 장남 노부야스를 죽이시오.”

이에야스의 아내 츠키야마 부인은 스루가의 영주였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조카딸이다. 이마가와 가문은 이미 노부나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에 멸망했다. 아내 츠키야마 부인이 친정 가문을 초토화시킨 남편과 노부나가에게 원한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장남 노부야스는 노부나가의 사위기도 했다. 아버지와 장인을 상대로 반역을 꾀했을 리 없다. 도쿠가와는 아들을 잘 알았다. 전쟁터에서 누구보다 혼신을 다해 싸우는 아이였다. 노부나가 역시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이 편지 내용은 구실일 뿐이다. 노부나가의 뜻은 분명했다. 세력이 커진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다.

갈등이 일지 않을 수 없다. 아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노부나가와 결별해야 한다. 그것은 그와의 전면전을 의미했다. 이제 도쿠가와의 세력도 결코 작지는 않다. 한판 승부를 해 볼 수도 있긴 하다. 마지못해 노부나가 앞에 무릎 꿇은 많은 영주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손만 뻗으면 그들은 당장 달려올 것이다.

자신만 해도 100만석 영지의 주인이자 4만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 함께 할 영주들의 군사를 모으면 간단히 10만을 넘길 수 있다. 게다가 천하 명장이었던 다케다 신겐을 상대로 딱 한 번 패한 이후, 평생 수많은 전투에서 져본 적이 없다. 그나마 그것도 병력차이가 현저하던 전투였다.

도쿠가와는 침식을 거두고 3일을 괴로워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노부나가는 지금 내게 불신을 품고 있다. 그는 동맹의 앞날을 점치기 위해 큰 희생을 요구한 것이다. 내가 이 희생을 치르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는 태도를 결정할 것이다.”

도쿠가와는 끝내 비정한 아버지가 되기로 결심한다. 오다 노부나가를 거스르기엔 아직 때가 아니었다. 그 날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할복을 명했다. 그의 마지막 음성은 칼날처럼 차가웠다. 영문을 모르는 장남은 돌아앉은 아버지를 눈물로 부르면서 자기 배를 갈랐다. 불행한 장남은 그렇게 죽었다. 아내 역시 독배를 마셔야 했다.

도쿠가와는 이토록 훗날의 때를 기다리기 위해 장남과 아내까지 희생시켰다. 지독한 괴로움 속에 참고 또 참아야 하는 끈질긴 인내의 삶이었다.

출발부터 불운한 인생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42년에 태어났다.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정권이 힘을 잃자 불안한 평화는 삽시간에 깨졌다. 벌써 오래 전 일이다. 영주들끼리의 양육강식이 난무하는 전국시대가 이어졌다. 힘없는 영주들은 영토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던가, 다른 영주를 섬겨야했다. 불행하게도 그의 아버지 미카와의 영주는 힘이 없는 쪽이었다.

그가 7살이 되던 해 인근 스루가의 영주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미카와의 영주 마츠다이라 히로타다에게 인질을 요구했다.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어린 아들을 인질로 보낸다. 그런데 이마가와 가신들이 어린 도쿠가와를 데려가던 중 사고가 생긴다. 돈에 매수되어 어린 인질을 오와리의 영주 오다에게 넘긴 것이다.

인질을 데려간 오와리의 영주는 당연히 미카와의 영주에게 사자를 보내 이마가와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엄포를 놓는다. 거역한다면 어린 도쿠가와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미카와의 영주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자식에 대한 애정 때문에 한 번 맺은 우의를 배신한다면 미카와 무사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다. 내 아들을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

우의를 말한 것은 거짓이었다. 그는 이마가와가 두려울 뿐이었다. 당시 오다에 비해 이마가와의 세력은 그만큼 컸다. 마츠다이라 히로타다에게 미카와의 영지를 지키는 것은 중요했다. 그 영지엔 자신과 가족만 딸린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가신들의 목숨과도 직결된 것이었다.

그 일로 500명이나 되는 그의 가신들은 영주의 은혜에 감읍한다. 2년 후 어쩔 수 없이 오다 가문에서도 어린 도쿠가와를 그냥 보내주어 마침내 이마가와에게 인질로 가게 되었다. 사실 인질을 받고 영지를 보존해준다는 것은 구실일 뿐, 이마가와는 사사건건 힘없는 영주를 이용했다. 전쟁이 벌어지면 미카와의 영주는 물론 그의 가신들까지 모두 전투에 앞장서야 했다.

가신은 나의 보배

오래지 않아 도쿠가와의 아버지가 전투에서 죽자 이마가와는 더욱 노골적으로 미카와 가신들을 괴롭힌다. 영주가 없는 영지에 당연히 도쿠가와가 돌아가야 했지만 이마가와는 보내지 않았다. 그는 아예 사람들을 보내 미카와 성을 차지하고 가신들마저 내쫓아 버린다. 녹봉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된 미카와의 가신들은 각자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해야 했다.

도쿠가와가 13살 무렵 제사차 집을 방문했을 때, 늙은 가신이 이마가와 쪽 사람들 몰래 자기 집으로 데려간 일이 있었다. 그는 집안의 비밀스러운 창고 문을 열고 어린 주군에게 그 안을 보여주었다. 무기와 돈꿰미가 수북했다. 80이 넘은 늙은 신하는 도쿠가와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적의 눈을 속여 가며 우리끼리 어렵게 모은 것입니다. 이것들은 훗날 주군께서 다시 일어나실 때 쓸 것들입니다. 우리 미카와의 희망은 바로 주군이십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셔서 미카와를 되찾아야 합니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에 걸맞게 무사들의 세상이었다. 능력 있는 무사라면 어느 영주를 찾아가도 얼마든지 환영 받을 수 있는 시대였다. 더구나 무사계급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미카와의 가신들은 어렵고 비굴한 환경에 살면서도 도쿠가와가 힘을 얻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훗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았을 때, 전국의 영주들을 모아 잔치를 벌인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토요토미는 자기 집안의 진귀한 보물들을 내 보이며 한참 자랑을 하더니, 불쑥 도쿠가와가 아끼는 보물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때 여러 사람들 앞에서 도쿠가와가 거리낌 없이 말했다.

“저는 아시다시피 미카와의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진귀한 서화나 골동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저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충용무쌍한 가신이 500명 정도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 사람들이 가장 큰 보물입니다.”

그 말에 히데요시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그대는 행복한 사람이오. 나도 그런 보배를 갖고 싶소."

도쿠가와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이마가와는 자기 조카딸과 혼인 시킨다. 도쿠가와 가문의 유일한 계승자를 자기 가문에 동화시켜 마침내 미카와를 차지하려는 속셈이 다분한 혼인이었다. 물론 도쿠가와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혼인을 반대할 힘도 없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이마가와는 일찍부터 전쟁의 최선봉에 도쿠가와를 앞세웠다. 전쟁이 잦은 시대였던 그 시절, 도쿠가와는 걸핏하면 전쟁터에 나가 싸워야했다. 그래도 그는 불평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발적으로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항상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고 전략을 연구했다. 전쟁을 언제나 승리로 이끄는 그를 이마가와 사람들 누구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어린 나이 때부터 이미 세상을 알았다. 자기 목숨을 담보로 세상을 배운 것이다. 참고 또 참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 처절한 환경에서 그는 정신과 몸을 단련 시켰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의 어린 시절 불행은 인생의 축복이 되었다.

이마가와 세력은 날로 발전해서 1560년 마침내 오와리의 오다군과 결전하기위해 대군을 출병했다. 천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같은 관동의 강호인 오다와 한판 승부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마가와는 오다를 제압하고 그 길로 교토를 향할 참이었다. 거기엔 일왕과 막부의 쇼군이 명색이 앉아 있었다.

이마가와는 이 중요한 전쟁에서도 열아홉 살의 도쿠가와에게 선봉을 맡겼다. 군사를 이끌고 오와리 깊숙이 들어간 토쿠가와는 마침내 오타카 성과 마루네 성을 함락시키고 이마가와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그는 오케하자마(桶狹間)에서 오다군을 격파하고 있을 터였다. 사람들이 그를 도우러 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도쿠가와는 듣지 않았다. 명령이 없으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다음 날 기다리던 연락병이 왔다. 그가 숨이 턱에 차서 말했다.

“우리가 대패했습니다. 영주님도 돌아가셨습니다.”

놀란 부하들이 도쿠가와에게 모여들었다. 우리가 함락시킨 성도 위험하다. 어서 돌아가자고 그들은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도쿠가와는 머리를 흔들었다.

"경솔하게 판단하면 안 된다. 싸움터에는 유언비어가 따르기 마련. 이것은 적의 모략인지도 모른다. 교란전술에 휘말려 힘겹게 빼앗은 성을 버리고 도망간다면 후세에까지 웃음거리가 된다."

그 다음에 소식을 가져온 사람은 전혀 엉뚱한 사람이었다. 이마가와와 손을 잡은 도쿠가와의 숙부 미즈노 노부모토였다.

“이마가와 군단이 오다 노부나가에게 대패하고 요시모토 영주도 죽었네. 자넨 어서 군사를 이끌고 미카와의 고향으로 돌아가 재기의 발판을 다지게. 이것은 자네에게 하늘이 준 기회일세.”

그는 피붙이 조카에게 진정을 말했다. 그러나 도쿠가와는 숙부의 말도 듣지 않았다.

"여기는 싸움터, 숙부라도 믿을 수 없다!"

세 번째 오타카성으로 달려온 사람은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 도리이 다다요시가 보낸 부하였다. 이 늙은 중신은 서신을 통해 전투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즉각 철수하라고 권했다. 이때서야 도쿠가와는 마음을 결정했다.

그의 조심성은 미카와의 옛집인 오카자키 성에 돌아와서도 이어졌다. 그는 성에 들어가지 않고 근처 다이주사(大樹寺)에 진을 쳤다. 놀란 것은 성안에 있는 이마가와 군사들이었다. 이마가와 영주가 전사한 이상 도쿠가와는 이제 적일지도 모른다.

적진과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 속히 이마가와의 본거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런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쿠가와는 움직이지 않았다.

"우지자네 공의 지시가 없는 한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다."

이것이 이유였다. 우지자네는 이마가와 영주의 아들이다.

‘의리를 지킨다.’

이것은 도쿠가와의 긴 생애를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한 특징이자 처세 방법이었다. 오카자키의 이마가와 장병들은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다가 그만 성을 비우고 슬그머니 도주하고 말았다. 그제야 도쿠가와는 입성했다.

"버린 성이니 주울 수밖에... "

19세 청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노련함이고 조심성이었다.

영주에 오른 신중한 청년

아버지가 죽고 영주 자리를 물려받은 스물일곱의 오다 노부나가는 이번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오와리의 작은 영지를 벗어나 전국적인 영웅으로 부상한다. 불과 4천의 병력으로 1만5천을 대파 시키고 관동 최강의 영주인 이마가와 요시모토까지 죽인 것이다.

이 전투를 발판으로 하여 오다 노부나가는 패권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 전투가 노부나가에게는 운명을 건 싸움이었다. 그런데 이 전투를 전환기로 삼아 자신의 운명에 도전한 또 다른 사나이가 바로 19세의 청년 도쿠가와였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그토록 바라던 이마가와의 손에서 놓여나 기어코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도쿠가와는 곧바로 독립을 선언하지 않았다. 이마가와 영주가 죽었다고 해도 그의 후계자인 아들이 있다. 도쿠가와는 이마가와에 대해 성실한 태도를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빈틈없이 그들의 내정을 정탐했다.

그 결과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자네가 전의를 상실하고 주색으로 세월을 보낸다는 것을 알았다. 도쿠가와는 기회가 왔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노부나가가 도쿠가와에게 동맹을 제의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가신들은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반대했다. 아직도 스루가의 이마가와 세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도쿠가와는 생각이 달랐다. 어차피 이마가와 가문의 영지 스루가는 도쿠가와의 손에 들어올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도쿠가와는 7살 이래 가슴 속에 품어둔 원한을 이젠 숨기려하지 않았다. 키워주고 조카딸까지 주었지만 이마가와는 그의 원수였다. 도쿠가와는 주저 없이 오다 노부나가와 손을 잡았다.

하지만 주요 가신들의 가족들이 아직도 스루가에 남아있다. 도쿠가와가 노부나가와 손을 잡았다는 소식은 그들의 죽음을 의미했다. 우지자네는 그들을 모두 도륙한다. 오히려 그 소식은 도쿠가와가 원하던 바였다. 이제 스루가를 침공할 명분이 생긴 것이다.

우선 미카와 영지를 먼저 다져야 했다. 영주가 없는 동안 미카와 곳곳은 각자 세력으로 반독립 상태였다.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과다한 세금을 징발하자 불교종단 잇코슈(一向宗)의 폭동도 만만치 않았다. 광신적 신앙에 기댄 그들의 기세는 강했다. 도쿠가와 가신들 중에도 그 종단 신자들이 있을 정도였다.

이에야스는 수년 내에 미카와의 옛 영토를 평정하고 조정으로부터 정3품 미카와노카미(三河守)라는 벼슬을 받아 당당한 영주에 올랐다. 그 때까지 쓰던 ‘마츠다이라’에서 ‘도쿠가와’로 성마저 바꾸었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사실 도쿠가와는 평생 이름을 여러 번 바꾼다. 어릴 적 아버지가 지어준 마츠다이라 다케치요(松平 竹千代), 혼인 직후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내려준 이름인 마츠다이라 모토야스(元康), 미카와 독립을 쟁취하고 이마가와 가문과 결별하는 의미로 도쿠가와 스스로가 바꾼 이름 마츠다이라 이에야스(家康), 그리고 정식 영주에 오른 이 땐 성까지 바꾸며 역사에 남기는 그 이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로 개명한다.

눈 앞에서 놓친 대권(大權)

이제 그의 눈앞엔 원수 이마가와 가문의 스루가 땅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조상 대대로 지켜오던 오카자키 성을 떠나 히쿠마로 옮겨 그곳을 하마마츠(浜松) 성으로 개명하고 적극적으로 이마가와 공략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마가와의 영지는 당시 일본 최강의 갑주(甲州)군단을 거느리고 있던 북부의 다케다 신겐도 노리고 있었다. 미카와 북부에서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다가 1572년 양측은 드디어 정면으로 맞붙게 되었지만 도쿠가와 군단이 처참하게 대패하고 이에야스도 구사일생으로 하마마츠 성으로 퇴각했다. 이 패배는 도쿠가와가 전 생애를 통틀어 경험한 유일한 패배였다.

이 전투가 끝난 뒤 신겐은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멸망은 목전에 있다고 장담했지만 이듬해 4월, 병을 얻어 진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호랑이가 사라진 호랑이 굴은 이제 의미가 없었다. 도쿠가와가 공격 시기를 기다리던 중 다케다 신겐의 아들 가츠요리가 먼저 1575년 미카와로 침공해 들어온다.

노부나가까지 그 전투에 3000의 철포와 대군을 보내와 그 전투는 도쿠가와 측의 대승으로 끝난다. 이 때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전쟁에서 대포가 사용 되었다. 가츠요리는 이후 내리막길을 걸으며 도주를 거듭하다가 1581년 그의 가신 33명과 함께 할복함으로써 천하무적을 자랑하던 다케다 가문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스루가의 이마가와는 이제 바람 앞의 등불, 곧바로 도쿠가와의 칼에 휩쓸린다. 그 때 도쿠가와의 가신들이 가족의 원수들을 처참하게 살육하려던 것을 도쿠가와가 말렸다.

"이마가와 가문의 죄일 뿐, 가신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들은 곧 우리 사람들이 될 것이야."

이후 도쿠가와에게 정복 당하는 영주의 가신들은 줄곧 도쿠가와의 사람들로 흡수되었다.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전공을 높이 치하하고 스루가 땅을 그의 영지로 삼도록 허락했다. 이로써 이에야스는 미카와 도토우미와 함께 스루가를 영유하여 일약 70여만석의 영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에야스는 1582년 정월, 답례를 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거성인 아즈치(安土)로 방문했다. 천하를 거머쥔 노부나가는 20여 년 동안 충실하게 봉사해 온 이 동맹자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며칠 동안 향연을 베풀고 교토, 오사카, 나라, 사카이 등지를 유람하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주코쿠(中國: 일본의 지방 이름)의 모리 일족을 토벌하기 위해 다카마츠로 출동한 히데요시에게 원군을 보내기 위해 교토로 올라갔다.

이에야스가 유람을 마치고 작별을 고하기 위해 교토로 향하고 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교토에서 중신인 아케치 미츠히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비보였다.

이에야스는 망연자실했다. 처자를 죽이면서까지 지켜온 20여 년의 맹약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가장 먼저 미츠히데를 주살하는 자가 앞으로의 패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으로 유리해진다. 하지만 그는 지금 영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에는 불과 10여 명의 수행원이 있을 뿐이었다.

이에야스는 자기 영지로 서둘러 돌아갔다. 어서 빨리 군사를 일으켜야 한다. 서둘렀지만 이에야스는 한 발 늦었다. 주고쿠에 나가있던 히데요시가 한발 먼저 돌아와 미츠히데 군을 섬멸하고 교토 방면을 제압해버린 것이다. 이에야스가 군사를 일으키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만약 이에야스가 상경해 있지 않고 자기 영지에 있었다면 미츠히데를 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먼저 왔을지도 몰랐다. 천하를 손에 넣을 기회인 변고가 일어난 날 하필이면 쿄토에 있었다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이에야스는 대권을 히데요시에게 양보하게 되었다.

가슴에 야망을 품고 당당하게 굴복하다

이에야스는 이미 군사가 동원체제에 있는 것을 기회 삼아 영지 확장을 서둘렀다.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동요하고 있던 옛 다케다의 영지를 다른 영주가 넘보자 맞서 싸워 점령하고 다시 시나노를 병합하여 5개주 138만 석에 달하는 판도를 가진 큰 영주로 성장했다. 

'만약 히데요시가 서부 일본을 제압한다면 나는 동부 일본의 패권을 잡겠다.'

이것이 바로 노부나가 사후 천하로 눈을 돌린 이에야스의 생각이었다. 이에야스가 동부에서 5개 영지의 경영에 부심하고 있는 동안 히데요시는 중앙 무대에서 눈부신 약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미츠히데를 토벌한 지 보름도 지나기 전에 히데요시는 중신들을 소집해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선출했다.

그는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와 함께 죽은 장남 노부타다의 어린아들 히데노부를 그 자리에 앉혔다. 그 아이가 가장 훌륭한 허수아비였던 것이다. 그런 다음 히데요시는 그해 12월 돌연 기후(岐阜) 성을 공격해 노부나가의 삼남인 노부타카의 항복을 받아 반대 세력의 결집을 미연에 방지했다.

이어서 그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아즈치 성보다 더 큰 오사카 성을 짓고 인근 30여 영지의 영주들을 모아 충성을 맹세토록 했다. 이때 히데요시의 영지는 24개 주 620만 석에 이르고 동원 가능한 병력은 15만 7000에 달했다. 그렇게 그는 천하를 확실하게 휘어잡았다.

그러나 히데요시에게도 장애가 있었다. 첫째는 노부나가의 차남으로 오다 가문의 실질적인 계승자인 노부오였고, 둘째는 20여 년에 걸쳐 노부나가의 혈맹이던 동부의 이에야스였다. 히데요시가 볼 때 범용하고 경박한 노부오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실력을 쌓아 나가는 이에야스는 방심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될 숙명적인 라이벌이었다.

히데요시는 천재적인 지략가였다. '야전의 쌍벽'이라 불리는 양 진영이 몇 번의 전투를 통해 대결의 부질없음을 그는 빨리 통감했다. 히데요시는 드디어 방침을 변경하고 이에야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교묘한 수법을 쓰기 시작했다. 노부오를 회유하여 단독으로 강화를 맺은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분개하여 노부오의 경솔함을 나무랐으나 이미 소용없었다. 이에야스는 오다 가문을 위해 싸운다는 대의명분을 잃고 말았다.

히데요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에야스와 화의하는 것이었다. 그는 집요할 정도로 이에야스와 접촉을 시도하며 강화를 요구했다. 한편에서는 친(親) 이에야스 세력을 각개 격파하는 수단을 썼다.

그리하여 1585년에는 시코쿠(四國)의 쵸소카베 모토치카와 엣츄(越中)의 삿사 나리마사의 항복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이에야스의 세력권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가신 중에서도 최고 원로인 이시카와 카즈마사마저 끌어들였다. 이에야스는 충격에 빠져들었다.

히데요시 역시 동부지방에만 전력을 기울이고 있을 수 없었다. 그에겐 규슈(九州) 평정이라는 대사업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든 이에야스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규슈를 평정하는 동안 습격당할 위험이 있었다.

양쪽의 조정 사절로 노부오가 이에야스를 찾아왔다. 히데요시는 그를 통해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고 대등한 위치에서 강화하기를 원한다고 전했다. 이에야스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강화에 응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여전히 완고한 자세를 견지했다. 화의에는 응했으나 상경은 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초조했다. 이에야스가 상경하여 신종(臣從)의 예를 올리지 않으면 화의를 한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히데요시가 오다의 판도를 상속하여 중앙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에야스의 협력이 필요했다. 이에야스를 무시한 채로는 천하통일이라는 대사업을 완수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새로운 수단을 강구했다.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 있는 44세의 여동생 아사히히메를 강제로 이혼시켜 이에야스의 정실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여전히 이에야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러한 이에야스에게 히데요시는 마지막 카드로 자신의 노모를 인질로 보냈다. 효자로 알려진 히데요시로서는 할 수 있는 최대의 양보였다.

이에야스도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그 또한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간파쿠(關白)란 최고의 벼슬에 오른 히데요시를 이렇게까지 애걸하게 만든 사실은 이에야스의 무게를 천하에 알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에야스는 1586년 10월 26일, 6만의 군사로 대형을 편성하고 당당히 서쪽을 향했다. 오사카에서 그를 맞이한 히데요시의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이에야스는 지난 3년간에 걸친 히데요시와의 대결을 깨끗이 청산하고 그의 천하통일 사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야망을 버린 것은 아니다. 대망을 가슴 깊이 숨기고 우선 한 영주로서 히데요시에게 신종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 생각한 것이다. 아직도 때가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크게 만족하고 이듬해 규슈의 시마즈(島津) 정벌에 나서 불과 5개월 만에 규슈 전토를 평정하고 돌아왔다. 이에야스는 재빨리 상경해 히데요시의 개선을 축하했다.

히데요시의 다음 목표는 동쪽 너머 아직 힘이 미치지 못한 광대한 처녀지였다. 그중에서도 관동 전역에 세력을 뻗치고 있는 호죠 우지마사가 가장 강적이었다. 그는 1582년 이미 이에야스의 둘째 딸을 아들인 우지나오의 아내로 맞아들였다. 따라서 히데요시가 이 두 강호의 유대에 쐐기를 박지 않을 리 없었다.

‘호죠에게 칼을 겨누면 이에야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그런데 일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이에야스가 자기 사돈의 토벌에 선봉을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한번 신종을 결정하면 처자식을 죽여서라도 번복한 적이 없던 이에야스였다. 결국 1591년 이 토벌은 성공했다.

이때 이에야스에게 전후의 논공행상으로 주어진 것은 호죠의 옛 영지인 관동의 6개 지방이었다. 그 대신 지금까지 피땀 흘려 다져온 5개 지방, 특히 그의 발상지인 미카와까지 안타깝게도 회수되었다.

이에야스는 어느 쪽이 이익인지 알고 있었다. 비록 영지는 늘어났으나 미개간 황무지보다는 옛 영지가 훨씬 좋았다. 특히 다케다 신겐의 고토 가이에는 금광이 많았다. 하코네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 관동으로 내려가면 교토로 가는 길도 멀어진다. 즉 상경의 희망이 단절되며 이것은 전국제패의 꿈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가신들의 불만이 거셌어도 이에야스는 태연했다.

"그다지 비관할 것 없다. 옛 영지보다 훨씬 더 광대해졌으니 언젠가는 상경할 날이 올 것이다."

히데요시에 대한 절대복종이란 성의를 보이면서도 마음속 깊이 간직한 불굴의 기백이 숨어 있는 말이었다.

이에야스는 관동 땅에 들어가자 즉시 직할령을 설정하고 가신에 대한 영지와 녹봉을 할당했다. 원칙적으로 에도(지금의 도쿄) 주변은 직할령으로 편입하고 반란의 우려가 없는 가신들을 원방에 배치했다. 그리고 직할령에는 행정관을 두고 여기에는 다케다, 호죠, 이마가와 가문의 구신들을 등용했다.

그는 토지조사를 단행해 정확한 곡물의 생산량을 산출함으로써 영지의 재정적 기틀을 다지고 부정행위를 방지하는데 힘썼다. 이어서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일으켜 에도를 바다 쪽으로 넓히고 도시의 확장을 꾀했다. 이는 전국의 상인과 기술자들을 끌어들여 상공업의 번영을 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야스가 관동 경영에 성공했다는 것은 그 영지가 광대했던 만큼 이에야스의 지위를 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그가 중앙 무대에서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은 새로운 영지에 탄탄하게 뿌리내린 것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규슈(九州), 간토(關東), 오우(奧羽) 등을 평정해 천하 통일에 성공한 히데요시는 1592년부터 조선에 대한 침략 전쟁을 시작했다. 7년에 걸친 이 무모한 전쟁은 문자 그대로 히데요시 정권의 자멸을 초래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믿었다.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여 국내경제를 혼란에 몰아넣고 농민을 도탄에 빠뜨렸다. 모처럼 복종시켰던 영주들의 신뢰도 잃었다.

1598년 8월 16일, 6세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를 5대로에게 맡기고 히데요시는 눈을 감았다. 그가 죽은 후 정치는 유언에 따라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우키타 히데이에, 우에스기 가케카츠, 모리 데루모토 등 5대로의 합의제로 운영되었다.

드디어 천하를 얻다

그러나 중앙 정부에서 이에야스와 대결할 힘을 가진 자는 없었다. 그나마 1599년 3월 도시이에가 죽자 그 배후의 실력자 미츠나리마저 무장파의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에게 실각되었다.

이를 전후하여 도시이에의 뒤를 이어 원로가 된 그의 아들 도시나가가 자기 영지로 돌아가자 나머지 원로와 유력한 장수들도 각각 자신의 영지로 내려갔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이미 도쿠가와의 천하였다. 기어이 때가 온 것이다.

이후 이에야스는 독재적으로 정무를 처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든 일에 관용적이던 태도를 바꾸어 가혹한 숙청을 단행했다. 히데요시에게 복종한 지 12년 만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판단한 이에야스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다. 5대로의 한사람이었다가 아이즈(會津)의 영지로 돌아간 우에스기 가케카츠와 중앙정부에서 실각했던 미츠나리가 그들의 대표였다. 가케카츠는 성채를 수축하고 병력을 증강시켜 주변으로의 세력 확장을 꾀했다. 이것을 안 이에야스는 사자를 보내 그의 상경을 요구했다. 그러나 가케카츠는 해명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군비를 확충하며 일전불사의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미츠나리는 반(反) 이에야스 세력의 규합에 성공하여 히데요시 가문의 오사카를 중심으로 또 다른 불씨를 만들었다. 그들의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10만이 넘는 병력을 끌어 모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키가하라(關原) 전투에서 이에야스에게 패하고 모두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나이 59세 때였다.

이에야스의 인생에서 최후의 중요전투였던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야전에 있어서 나를 능가할 자가 없을 것이다.’

확실히 그는 미카타가하라에서 다케다 신겐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인 처참한 패배를 맛본 후 그의 전법을 깊이 연구하고 분석하여 신겐이 죽은 후 자타가 공인하는 전략 전술의 일인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야전보다도 평화시의 통치와 지배에서 더 뛰어난 진가를 발휘했다. 그가 구상하는 도쿠가와 정권 영구화 전략은 '농민들을 죽지 않게, 그러나 살 수 없도록'이라는 것이었다.

농민으로 하여금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양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납으로 바치게 하여 재물이 남지 않도록, 그러나 부족하지도 않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라는 의미였다. 이것은 농민뿐 아니라 공경과 영주에서부터 상인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적용한 정책이었다.

중앙 정권에 군림하게 된 이에야스는 1603년 2월, 일왕으로부터 쇼군(장군: 征夷大將軍)의 칙명을 받아 군권과 정권을 동시에 장악하고 자신의 영지였던 에도(江戶: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개설했다. 이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에도막부는 이후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1867년 명치유신으로 하여 왕실에 정권을 넘길 때까지 264년간 지속 된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났을 때 반 이에야스파의 중심에 있던 히데요시 가문만은 전투의 책임을 묻지 않고 오사카 성과 영지를 그대로 두었었다. 하지만 14년 후에 히데요시의 아내 요도부인이 추종세력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것을 진압한 이에야스는 요도부인과 그 아들 히데요리를 죽임으로 히데요시의 가문마저 역사에서 사라진다.

이듬해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그는 편안하게 마지막 눈을 감는다. 1616년 4월 17일, 그의 나이 75세였다.

그가 남긴 유훈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인간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르면 안 된다. 무슨 일이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걸 알면 굳이 불만을 가질 필요가 없다. 마음에 욕망이 생기거든 곤궁할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본,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승리만 알고 패배를 모르면 해로움이 자기 몸에 미친다. 자신을 탓하되 남을 나무라면 안 된다. 미치지 못하는 것이 지나친 것보다 낫다.”

이것은 후세의 위작(僞作)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이보다 더 그의 처세법을 정확히 표현한 것도 없다. 여기 언급된 사항 중에 단 하나도 제대로 지키기 어렵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모두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지킨 사람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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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장편소설 (족장 세르멕, 상, 하 전 두권, 새움출판사)의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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