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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이었다. 새벽 3시가 가까워오는 시각. 심란한 일이 있어 골치를 앓던 중, 머리도 식힐 겸 오랜만에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찾았다. 교문이 잠겨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잠시, 나의 모교는 육중한 담장을 허물고 마치 잘 정돈된 공원 같은 산뜻한 모습으로 나를 맞아 주었다.

 

한밤의 적막함이 주는 운치를 만끽하며,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가로질러가 그네에 앉았다. 마침 정면에는 학교건물이 나와 마주보며 서 있었다. 여기저기 금이 가고 색깔도 바랜 모습을 보면서 학교와 내가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동질감이 느껴졌다.

 

천천히 그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차 발을 높이 차올리며 한참을 타는데, 웬일인지 흥이 나지 않았다. 나이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스스로의 거부감 때문이었을까? 타며 탈수록 어서 이 행동을 중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왔다.

 

발을 멈추고 생각해보았다. 이 알 수 없는 느낌에 대해. 그러다 문득,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내가 느낀 위압감의 실체. 그것은 바로, 학교건물 뒤에 삐쭉하게 솟아있는 아파트였다.

 

날이 밝은 뒤 다시 학교를 찾아갔다.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아파트의 위용이 밤에 보았을 때 보다 한층 뚜렷이 드러났다. 운동장에서 올려다 본 학교건물은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는 아파트들에 둘러싸여 이곳이 학교인지 아파트단지 안인지 분간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왠지 모를 아쉬움이 밀려왔다. 내 기억 속에 학교는,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에서 올려다보면 하늘아래 학교건물만 보일 정도로 까마득히 높이 솟아 있던, 넉넉하면서도 위엄 있는 존재였다. 자라오면서 답답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가 옛 추억과 만나며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고, 나의 고민을 털어놓으면 선생님처럼 말없이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해 주던 곳이 바로 학교였다.

 

그런데 느닷없는 아파트의 등장은 나와 학교와의 이런 교감을 단절시켜 버렸다. 어린시절 경외감으로 올려다보았던 4층 건물은 말쑥하게 쭉 뻗은 15층 아파트 앞에서는 낡고 초라한 구식 건물일 뿐이었다. 옛날처럼 우직해 보이지도, 믿음직스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보다 몇 배나 키가 큰 아파트 건물들에게 한껏 조롱을 당하는 수모를 겪고 있었고, 그나마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애써 입을 다물어 침묵하고 있었다.

 

이런 학교에 대화를 하자고 조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학교 또한 나에게 그런 용렬한 꼴을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와 나 사이를 엿보는 듯한 아파트의 시선 또한 나를 더욱 학교에 머물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그래, 돌아가자.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말자. 다짐하던 찰나, 문득 지금의 아이들은 자신의 학교를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졌다.

 

추측컨대, 요즘 아이들에게 학교는 크고 세련된 아파트와 견주어 상대적으로 작고 볼품없는 존재로 인식될 것이다. 호기심과 경외의 대상이 되지 못함은 물론, 학교가 지리적으로 아파트촌에 둘러싸여있는 모습은 아이들이 학교를 더 이상 집과 분리된 신성한 장소로 생각하지 않게 만들 것이다.

 

내가 교육학이나 아동심리학 전문가가 아니라서 학교가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고 딱 부러지게 설명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과 같이 학교가 아파트에 포위당해 있는 모습은 적어도 내가 다니던 십수 년 전 보다 학교의 위엄과 권위를 떨어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학교에 대한 신뢰와 애틋함을 반감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것을 사교육 문제에까지 결부시키면 지나친 비약일까? 권위가 떨어진 학교에서 아이들은 아무래도 학교에 대한 신뢰를 덜 갖게 되고, 선생님과 교과서에 대한 존경심도 예전보다 줄어들 것이며, 이것이 사교육 열풍과 맞물려 공교육 위축을 가져왔다고 말하면 나만의 근거 없는 지레짐작일 뿐일까?

 

몇 년 전 한 한국기업이 뉴욕에 있는 유엔본부 옆에 건물을 지으려고 하자 유엔 측에서 유엔의 권위를 생각해 그 기업의 건물을 유엔빌딩 보다 더 높이 짓지는 말아 달라는 서한을 보낸 적이 있다. 이것은 유엔이라는 고결한 단체도 결국 외형을 갖추지 못하면 권위를 지키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적인 꾸밈없이 내실을 갖추는 것만을 통해서 어떤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훌륭한 선생님과 좋은 친구들이 있다고 해도, 학교를 학교답게 만드는 권위와 신뢰는 학교건물이 본래의 외형을 갖추지 않고는 달성되기 힘들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아이들을 위해 초등학교 주변 건물의 고도를 제한하는 것이다. 아파트도, 병원도, 영어학원도 지을 수 없다. 오직 학교와 학생만이 똑바로 마주서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추억을 쌓아갈 수 있도록 주변 모든 건물을 학교보다 낮게 짓는 것을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물론 실현 불가능한 일이란 것은 잘 알고 있다. 나라 전체가 아파트 공화국이 되어버린 작금의 현실에서 건설을 방해하는 이와 같은 주장은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 분명하다.

 

입학할 때부터 학교건물과 아파트를 한 시야에 담게 될 아이들은 훗날 학교의 모습을 떠올릴 때 눈앞에 학교건물과 아파트가 동시에 연상되는 삭막한 상황을 맞게 된다. 부디 학교가 학교다울 수 있는 날이 어서 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부질없는 넋두리를 늘어놓아 보았다. 

 

여름인데, 따듯함이 그리워진다.

 

학교가 우리의 마음을 아름답게 지켜주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의 마음으로 영원히 학교를 지키겠습니다.

정든 교정이여, 안녕.

 

-영화 <선생 김봉두>中 에서-


#공연초등학교#유엔빌딩#고도제한#아파트 공화국#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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