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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친께서는 하늘나라로 가시기 몇 해 전부터 고향에 자주 내려가셨다. 그곳에 묻혀계시는 조상님들 묘지를 돌아보시느라 분주하셨다. 당신의 고조부모님 묘 앞에까지 빠짐없이 정성을 다해 비석을 세우고 상석을 놓으셨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별 관심 없이 아무 도움을 드리지 못하였음을 크게 후회한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내가 선산에 관심을 가질 나이가 되었다. 몇 년 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조상님들 분묘를 한곳으로 모아 큰 봉분의 납골묘를 만들었다. 서열에 따라서 5대 조부님까지 안치하다 보니 나와 가장 가까운 부모님 자리가 그늘진 쪽으로 가, 우리 둘이서 들 자리는 더 어두운 곳이 되는 등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많았다. 하도 먼 곳이라 1년에 한 번 벌초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궁리 끝에, 벌 안 전체 바닥을 돌 판으로 깔아서 잡풀이 나올 수 없도록 하고 노무현 대통령님 묘지처럼 봉분이 없는 평장을 하여 후손들이 친근감을 가지고 찾아오도록 가족 공원 개념으로 새로 꾸미기로 했다.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들·며느리는 별 관심이 없다. 아내의 적극적인 제안과 지지만이 큰 힘이었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사전답사 차, 완도에 내려갔다가 여동생이 시집가 살고 있는 해남 땅 끝 통호리라는 마을에 잠깐 들렸다. 통호리 안 사구미 마을은 달마산 산자락에 아늑히 자리 잡은 전형적인 포구 마을로서 그야말로 한 폭 그림 같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숨만 쉬고 있어도 금방 생기가 돋아날 것 같은 맑은 공기, 바위 속에서 솟아난다는 맛좋은 우물물이 있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를 것 같은 고요한 정취의 편안함에 아내가 흠뻑 젖어 "나 여기서 살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별 복잡한 생각 없이, 우리는 조상들이 묻혀 계시는 완도가 바다 건너 바라보이는 이곳에 조그마한 조립식 주택을 짓기로 작정했다.

사실 아내는 종합병원이라 할 정도로 건강이 매우 안 좋다. 특히 만성 간염 때문에 체력이 극도로 약해져, 많은 불치병 환자분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무공해 채소와 좋은 공기와 물이 있는 시골로 떠나자고 늘 말은 해왔지만 이렇게 아주 간단히 말이 씨가 되어버릴 줄은 몰랐다.

하기야 지난 세월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수많은 이사를 다녔어도 어느 한 곳도 어렸을 적에 내가 살던 집처럼 '내 집'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여태까지 꿈속에 나타난 아파트가 없다. 다시 다른 곳으로 이사할 거라 생각하며 잠시 대기하는 장소로만 여기며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예봉산과 검단산 그리고 한강이 어울려 보이는 이곳 덕소 아파트로 이사 왔을 때에는 시원스레 툭 터진 전망과 계절마다 변하는 앞동산 꽃향기와 눈꽃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이제 여기가 마지막 '우리 집'이라며 좋아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역시나 경치 좋은 콘도에 와서 잠시 머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냥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을 뿐, 그 그림 속에 내가 들어가 함께 살고 있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다.

'흙'을 생명의 근원으로 한 농경사회에서 태어난 우리들은 흙에서 왔으니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귀소본능이 있어서일까? 아파트는 아무래도 내가 끝까지 살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늘 들었던 것은.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아파트에서만 사는 내 아들은 '나의 살던 고향', '나의 집' 등 흙 문화와 관련된 개념이 없어서일 것이다. "불편해서 어떻게 사실 수 있겠습니까?"며 근심스럽게 고개를 흔든다.

이렇게 해서, 서울과 근교 아파트로만 이곳저곳 옮겨 살아온, 본래의 나와 맞지 않았던 긴 떠돌이의 여정에 종지부를 찍고 마침내 육지에서 가장 먼 땅 끝으로 떠나가 조상들이 묻혀계시는 곳 가까이에 내 인생의 마지막 터를 잡기로 했다. 아내의 건강 때문에 요양하기 위해 내려갔다 왔다 할 것이라고 시작은 했지만, 거기 눌러 살게 되는 시간이 더 길 것 같다.

주변사람들은 너무나 먼 곳이라고 걱정들을 하면서도 "그 분들은 한다면 하는 사람들"이라며 우리의 만용 같은 결단이 두렵기까지 한 모양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공적인 일을 그만 둘 것인가 조심스럽게 묻기도 한다. 손 전화와 인터넷이 있고 머지않아 광주까지 1시간 반이면 갈 수 있다니 별 문제가 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벼르고 벼려 미뤄왔던 노트북까지 거금을 들여 구입하지 않았는가!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순전히 아내의 뜻에 따를 일이다. 기왕이면 자기가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김천이 가까운 동해안 어느 곳에 터를 잡자고 할 수도 있으련만 그런 기색이 조금도 없이 땅 끝 마을에 우거를 만들자고 서둘렀다. 우선 그의 마음속에는 전라도 경상도 등 지역적인 편견이 거의 없다.

함께 40년 넘게 살아오면서 이런 문제로 인한 어떤 부조화나 갈등도 없었다고 기억한다. 대통령 선거 시 아내가 누구에게 표를 던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인어른께서 "김대중 금마 빨갱이 데이"라는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을 하시고 처가 사람들 모두가 거품품고 김대중 후보를 비난할 때에도 아내는 항상 내 편이거나 중립을 지켜주었다. 프로 야구 개임을 두고는 열렬한 해태 팬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주위 분들로부터 경상도 사람에 대한 안 좋은 평판이나 경계심을 가지도록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아내는 "전라도 사람과는 사귀지도 말라"는 신라 백제 대결시대로부터 전해 내려왔을 법한 적대적 감정 증폭의 말들을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일종의 심리전인 셈이다. 이런 분위기에 휩쓸린 선입견 때문에 꺼림칙할 수도 있으련만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없다.

5.18광주학살에 대해서 누구보다 분개했고 너무나 정 많은 전라도 인심에 반하다시피 좋아한다. 전라도 사투리를 애정을 가지고 부러 사용하며 우리는 천진난만하게 웃을 때가 많았다. 불의에 굴하지 않는 전라도인의 끈질김을 흠모하며 나에게도 용기를 주어온 제일의 후원자인 그가 "이제 70이 훨씬 넘었으니 '군대개혁'은 후배들에게 맡기고 당신 인생도 생각하고 정리해야 하지 않겠어요!" 권유한다.

고맙기도 하지만, 평생 도전해온 일을 그만두라는 것 같아 야속한 마음과 세월의 속절없음에 눈물 고인다. (평화재향군인회 상임대표 표명렬)


#조상의 묘를 찾다.#분봉없이 친금감있게#조상님들 가까운 곳에#아파트 생활의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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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을 부하인권존중의 ‘민주군대’, 평화통일을 뒷받침 하는 ‘통일군대’로 개혁할 할 것을 평생 주장하며 그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해왔음. 만84세에 귀촌하여 자연인으로 살면서 인생을 마무리 해 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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