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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밥과 장미> 겉그림.
 책 <밥과 장미> 겉그림.
ⓒ 삶이보이는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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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엽 시인이 쓴 <밥과 장미>를 읽다가 성신여대 청소 용역 노동자 인터뷰 부분에서 잠깐 책장을 덮었다. 이 부분이었다.

"나도 자식들 가방끈 늘려주려고 이리 고생하고 있습니다. 내 딸, 아들 학교 다니면서 식당에서 서빙하며 학교 다니지 않게, 부모가 되어가지고 내 딸 서빙 안 시키려고 이렇게 학교에 나와서 일하는 게 잘못입니까?"

여름까지 서빙노동자였던 나는 갑자기 몹시 우울했다. 우울하다기보다 갑자기 기운이 쭉 빠졌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생활한다는 것은, 그렇게 시시각각 기운이 쭉 빠지는 일투성이인 모양이다. 자식 가방끈 늘려 줘서 서빙 같은 일 안 시키려는 부모 마음이야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내가 스타벅스나 커피빈을 많이 다녀 봐서 커피 맛을 잘 아는데 커피 맛이 엉망"이라며 4500원을 던지듯 놓으면서 "내가 이 돈을 왜 내는지 모르겠다, 도둑년" 이렇게 내뱉고 나가는 손님 봤을 때, 시키는 대로 시간당 사천 얼마 받으면서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데 도둑년 소리를 듣나 싶어 의아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어느 부모도 자식을 서빙시키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가방끈 길게 늘어뜨리고 책상 앞에서 근사하게 일할 수는 없으니 누군가는 서빙을 해야 할 텐데 같은 비정규직끼리도 절대로 내 자식은 그거 시키기 싫다는 게 대한민국 현실이다. 내 자식 비정규직 시키고 싶지 않아서 나는 뼈가 부서지도록 비정규직으로 일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충분히 자식이 가방 끈 길어지리라는 보장도 없고 외교부 특채 사건처럼 '내 딸 최적화' 시험 같은 걸 만들어줄 수 없으니 역시 기운 빠지는 일이다.

버젓이 남의 가게 종년 노릇하는 나... 또 기운이 쭉쭉 빠졌다

 20대가 아르바이트하는 모습.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20대가 아르바이트하는 모습.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 김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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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까지 일했던 커피숍은 여섯 시가 되면 생맥주를 파는 호프집으로 변신했다. 다섯 시 반까지 출근하는 주방 담당 아주머니는 하늘이 무너져도 자신을 꼭 사장님이라 부르라 했다. 몇 년 전까지 자기 가게를 운영하다가 일이 생겨 남의 가게에서 월급 받고 일하게 된 그는 그 사실에 늘 진저리를 냈다. 손님이 혹시라도 사장님이라고 안 부르고 주방장님, 이모, 아줌마, 뭐 이렇게 부르거나 하면 그야말로 진저리를 쳤다. 분해 죽겠다는 투로 "내가 남의 가게 종년"이나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버젓이 남의 가게 종년 노릇하고 있는 나는 또 기운이 쭉쭉 빠졌다. 별로 스스로 종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건만 자꾸 종년 종년 하니까 기운이 빠지는 거였다.

지금 반 년 넘게 새벽에 사무실에 녹즙 배달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같은 시간에 일하는 청소 용역 노동자들을 마주치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꾸벅꾸벅 인사하고 힘들게 일하시는구나 하고 존경도 하다가 이젠 마주칠 것 같으면 전속력으로 내뺀다.

가끔 청소 아줌마들에게 녹즙 판촉용 샘플을 주지 않는다고 꼬집어 뜯기고 쥐어박힌 다음부터는 일단 도망치고 본다. 그리고 청소 용역 노동자들은 혹시나 경비실장 눈밖에 안 나려고 조심하고, 청소 용역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하청 업체는 계속 하청 일을 받기 위해 본사에 종종 좋은 자리 만들어 대접하고, 경비 노동자들 역시 계약을 계속 연장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경비 아저씨들은 나에게 샘플 몇 개씩 경비실에 놓고 가라고 당당히 요구한다. 모두 파리 목숨인 비정규직끼리도 이러고 사는구나 싶을 때마다 기운이 또 좍좍 빠진다.

파리 목숨인 비정규직끼리도 이러고 사는구나

녹즙 먹는 손님이 프로야구 우승팀 내기를 하자고 했다. 자기가 이기면 한 달 녹즙 값을 공짜로 해 달라고 한다. 녹즙 값 내지 않고 퇴사하기라도 하면 그 돈 받아낼 수도 없고 꼼짝없이 자기 돈으로 채워 넣을 수밖에 없는 녹즙 노동자는 살 떨린다.

그럼 내가 이기면 한 달 대신 배달해 줄 거냐고 했더니 자신은 시간당 단가가 비싼 사람이니까 불공정 거래라며 하루 대신 배달해야 공평하다고 한다. 그나마 있던 기운도 다 빠졌다.

비정규직이란, 단가 낮은 사람을 의미하는 모양이다. 시간당 단가 싼 사람들, 그러니까 막 부려 먹어도 되는 사람들. 단가에 따라 인권 값도 결정되는 2010년 대한민국.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김현진씨는 에세이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오도엽#비정규직#용역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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