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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배표는 캐나다의 밴쿠버 항을 거쳐 미국 시애틀로 가는 거였다. 밴쿠버 항에서는 세관 구치소에 3개월 동안이나 갇히게 됐다. 하루는 이노익이 나타났다. 하와이 이민 배를 탔을 때 통역 노릇을 하던 그 이노익이다. 세관 구치소에 억류된 건 가진 돈들이 몇 푼 안 됐기 때문이다. 동행하던 사람이 미국의 지인에게 급히 편지했다. 50원을 송금 받아 비로소 미국행 배를 탈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선생도 만나 뵈었다. 장경 선생의 권유로 LA로 옮겨갔다. 장 선생은 만나기만 하면 사업상이나 다른 물욕에 대한 말은 일체 없다. 오직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어떻게 해야 바로잡을까 하는 것만 자주 말한다.

 

그는 1907년 3월 창립된 대동보국회의 초대총무를 맡았다. 대동보국회는 공립협회와 마찬가지로 조국의 독립과 회원 간의 친목 및 복지를 위한 단체인데 2년 후 대한인국민회에 합류했다.

 

사겸은 한인들이 사는 곳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회원가입을 권유했다. 차츰 하와이에서 본토로 이주하는 동포들이 수십 명씩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포도 농장, 철로 공사장, 탄광에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주선해줬다.

 

콜로라도 주 덴버 시 근처에 탄광이 있어 박용만씨도 찾아 뵐 겸 약 50 명 되는 동포들과 덴버행 기차를 탔다. 그를 알게 된 건 대동보국회의 기관지인 대동공보를 발간할 때 간곡한 서문을 써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초면인데도 다정하게 대해준다. 보국회 영수 장경씨와의 친분 때문인 모양이다. 그가 운영하는 숙박소에서 한 달여 동안 유숙했다.

 

공부를 하기 위해 시카고로 떠나려던 며칠 전 뜻밖에 조지수를 만났다. 평양에서 처음 같이 도망치려 했던 조지수다. 너무 뜻밖이다 보니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동안 덴버의 어느 철공장에서 착실하게 일해 돈을 좀 모았다고 한다. 시카고로 간다 하니까 노자나 하라고 50원을 준다. 50원은 자그마치 두 달 치 월급에 맞먹는 큰돈이 아닌가.  

 

 

 

사겸은 그 돈을 샌프란시스코의 중국인 약국에 보내 홍삼을 부치게 했다. 시카고로 가는 도중 중국인들이 있는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홍삼을 팔았다. 여비를 빼고도 150원을 남겼다. 당시 미주에서 인삼행상을 하던 한인들은 한국산 인삼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상투를 하고 짚신을 신었다. 몇 안 되는 중국 식당들을 두고 서로 부딪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상투를 붙잡고 노상에서 싸우기도 했다.  

 

시카고에서는 학교에 가기 전 중국식당에서 쿡으로 일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사겸의 학습능력이 중학교 2학년 수준이어서 나이가 서른이 다 되가는데도 대학 예비반 중학과에 다녔다.

 

원래 그의 부모는 어곽전과 돈변놀이를 하는 평양의 알려진 부호였다. 자식들이 많아 5세까지는 양육을 유모에게 맡겼다. 6세가 되자 서당에 입학했다. 청일전쟁 때문에 한 4년 동안 시골에 피난을 가 있다 보니 사겸은 서당 교육도 착실히 받지 못했다. 학교 공부가 쉽지 않아 반 학기만 다니고 다시 중국 식당에서 쿡으로 돈을 벌었다.

시카고로 이주한 보국회 회장 장경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므로 몇 년 돈벌이를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둘은 인삼장수를 하기로 했다. 사겸은 먼저 쿠바로 건너갔고 장경 선생은 까마득하게 먼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났다. 쿠바에는 중국에서 온 노동자들이 수만 명 있었다. 여기저기서 너도나도 사겠다는 바람에 인삼을 몇 달 팔고 나니 경비 제한 후 4천 불이라는 큰 돈을 쥐게 됐다. 자메이카도 건너가 봤는데 재미를 못보고 뉴욕을 경유해서 시카고로 돌아왔다.

 

중국인 노동자들이 있는 곳이면 불원천리하고 찾아나서는 것이 인삼장수의 행보였다. 1910년 멕시코 동부 유카탄 반도로 갔던 인삼장수는 많은 한인들이 그곳 에네켄(선박용 밧줄의 원료)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반 노예상태로 혹사당하고 있는 참상이었다. 1905년 약 1천여 명의 한인들이 멕시코로 이민했는데 인삼장수가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에 그 참상을 전함으로서 본국에까지 알려지게 됐다.

 

하루는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 있는 고성태씨로부터 사겸에게 연락이 왔다. 운영하는 식당이 잘 안되니 도와달라는 거였다. 오마하에 내려가 식당일에 매달리다 보니 시간을 잘 낼 수 없었지만 그리 멀지 않은 링컨 시와 헤이스팅스 시를 방문했다. 링컨 시는 기차로 약 1시간 반, 헤이스팅스 시는 약 3시간 반 걸리는 거리다.

 

헤이스팅스 대학에서 박용만은 여름마다 소년병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사겸도 훈련생으로 참가했다. 알고 보니 박용만은 29세로 그와 나이가 같았다. 소년병학교에서 다시 만난 사람은 이노익이었다. 밴쿠버의 입국자 구치소에서 만난 지 6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그는 웨즐리언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 역시 여름방학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 교장 박용만은 그 보다 세 살 어렸다. 

 

 

미국 본토에 당시 약 150 명의 한인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중 60여 명이 네브래스카 주에 몰려 있었다. 네브래스카의 한인 수 분포를 보면 오마하에 24명, 링컨 시에 15명, 커니 시에 15명, 헤이스팅스 시에 20명이었다. 링컨 시에는 네브래스카 주립대학과 웨즐리언 대학이 있다. 이노익은 1914년 웨즐리언 대학을 36세의 나이로 졸업했다.

 

그는 본국에서 임준호(나중 하와이에서 목사가 됨)와 함께 배재학당을 다녔다. 둘이 함께 하와이에 도착한 게 1904년 1월. 1년 후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농장일을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박용만을 찾아간 건 1906년 9월. 그의 도움으로 웨즐리언 대학 예비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15년 귀국한 이노익은 연희전문에서 화학을 가르쳤다. 1927년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와이의 임준호 목사는 "이노익은 독한 약 공부를 해가지고 요긴한 데 뿌려서 모두 결단을 낼 결심을 하고 평양 쪽에 가서 뭘 좀 하다가 잡혀 죽었습니다"고 회고했다.

 

소년병학교 출신으로 귀국해서 연희전문과 평양의 숭실대학에서 가르치던 4 명의 교수들(이중에는 26 살 나이로 초등학교 2학년에 들어갔던 리용규도 포함)은 1927년 이후 일제히 교단에서 쫓겨났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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