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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가 길어지는 것보다 사측의 외면이 더 참기 힘들다."

 

지난 13일 고(故) 이재민 기관사 유족과 서울도시철도공사노동조합은 이 기관사의 장례를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노조 측은 "사측이 이재민 기관사의 죽음을 개인적인 사정으로 몰아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며 "장례를 치르고 나면 고인의 명예를 회복하기가 어렵다. 공사의 책임 있는 태도와 대책이 있을 때까지 장례를 미루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 기관사는 12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수도권 지하철 5호선 왕십리역 마천 방향 스크린도어의 문을 열어 자신의 몸을 던졌다. 그가 아내에게 전한 마지막 말은 "운동하고 갈게"였다. 무엇이 그를 그의 일터인 5호선 선로로 뛰어들게 했을까.

 

어둠 속에서 보낸 10년... 그의 삶을 꺾은 '공황장애'
 

"공황장애로 인해 뛰어들 당시,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겠죠. 무엇보다 본인이 힘들었던 것을 털어낼 곳이 없어 괴로웠을 거예요. 그래서 전직이 마지막 탈출구였던 것 같은데, 결국 '병' 때문이죠.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순직'입니다."

 

15일 서울 행당동 한양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서울도시철도노조의 김창연씨는 "그가 앓던 공황장애는 운전 중에도 열차를 버리고 도망가고 싶은 충동이 들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라, 노동환경으로부터 얻은 '병'"이라며 "공황장애는 그냥 병이 아니라 노동환경이 만들어 낸 산업재해"라고 일축했다.

 

공황장애는 특별한 이유 없이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는 극단적인 불안 증상으로 심장이 터지도록 빨리 뛰거나 가슴이 답답하고 땀이 나며 때론 죽음에 이를 것 같은 감정이 들게 하는 정신질환을 말한다.

 

"우리 노선은 전 구간이 지하 터널로 이루어져 있어요. 열차가 통행하는 터널의 선로 안내등도 켜지지 않은 어두운 철도 안을 3시간 동안 혼자 운전해요. 더구나 정확한 시간에 다음 역으로 손님들을 인도해야 한다는 압박감, 사고발생에 대한 전적인 책임 등 갖가지 부담감들이 기관사들을 억누르고 있죠."

 

이와 같은 열악한 노동 환경이 그들을 공황장애의 고통으로 내몰고 있다.

 

서울도시철도 사측은 "공황장애나 기타 질환이 발생하게 되면 운행을 면제해주고, 심할 경우 치료를 통해 복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놓고 있다"며 "복귀 후에도 차량 운행에 제한이 있다고 판단되면, 전직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숨진 이 기관사는 지난해 6월 공황장애 진단을 받은 뒤 유급휴가를 모두 사용해 병을 극복하려 노력했고 이를 이유로 사측에 전직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도시철도에서 시행중인 복귀 시스템도 이미 2007년부터 문제가 제기됐다. 당시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 산업의학과에서 조사한 최종보고서에는 "복귀 프로그램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소가 담겨져 있지 않으며, 전문가의 개입과 조언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며 "자칫 요양자의 복귀가 업무 부적합자의 색출이나 심지어 강제적 복귀로 인한 심리상태 위축을 유발해 실제 업무 복귀를 못하게 될 가능성 또한 있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김씨도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기관사들은 '전직'이나 '병가'를 통해 운행 근무를 쉴 수 있으나 자신이 공황장애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공황장애로 고통을 받아 전직요청을 하려고 해도 자신이 공황장애가 있음을 밝히면 사측으로부터 낙오자로 찍히게 된다"고 말했다. "결국 이를 우려한 기관사들이 전직을 요청 할 수도 없어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가장 큰 문제"라고 우려했다.

 

공기업 성과관리 체제, 기관사는 '사면초가'

 

2003년 기관사 2명의 연이은 죽음 이후 공황장애는 산업재해로 인정받았다. 2007년 서울도시철도는 가톨릭대학교와 함께 기관사 836명을 상대로 특별건강검진을 실시했다. 조사결과 기관사의 우울증 발병률은 일반인의 2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4배, 공황장애는 7배나 높게 조사됐다.

 

김씨는 "공황장애는 작업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불안정한 교대근무, 초 단위로 쫓기는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 장기간 운행 그리고 '1인 승무원제'로 인해 모든 것을 기관사 혼자 떠안아야 하는 책임감에 대한 과중한 부담이 문제다"라고 주장했다.

 

인터뷰 내내 깊은 한숨을 내쉬던 김씨는 "그러나 조사결과 발견한 또 다른 문제는 '관계갈등'"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명박 정권의 '공기업 성과관리 체제'가 기관사들의 '고난의 행군'을 가져왔다"며 "팀별 평가, 소속별 평가를 받아 점수에 따라 성과급이 부여되고 있어, 기관사 한 명이 민원을 받아 점수가 깎이면 팀 성과에도 영향을 미치게 돼 기관사들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현재 시행 중인 '칭찬민원'이라는 것이 있어요. '이 기관사 열차를 탔는데 좋았어요'라는 민원이 들어오면 평가점수 플러스 10점을 줘요. 칭찬을 못 받으면 면담할 때 관리자들이 이런 얘기도 해요. '넌 친구도 없냐. 지하철 타서 우리 칭찬하라고 해'라면서요. 낙오자 취급하는 거죠."

 

지하철 운전 중 안내멘트 또한 기관사의 책임이다. 김씨는 "사무소 관계자들이 지하철에 타 감시하면서 운전 중인 기관사에게 안내방송 제대로 하라고 전화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개인별, 팀별로 점수를 잃지 않기 위해 비번 날에도 의무적으로 참가하는 봉사활동은 기관사들의 휴일마저 빼앗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서울도시철도 사장을 지낸 음성직 사장은 비용상의 이유로 기관사들의 노동환경을 더욱 열악하게 했다. 김씨는 "음 사장 당시 전기료 절약을 명분으로 환기 시스템을 꺼버려 이산화탄소가 실내에 꽉차 환기가 안 됐다. 심할 때는 승객차량 공기도 많이 나빴다"고 말했다.

 

이어 "터널 내부 선로 안내등도 전기료 감축을 명분으로 모두 꺼버려 운전 중인 기관사들을 더욱 어둠으로 몰아갔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사측이 사과할 때까지 버틸 것"

 

"공황장애를 겪는 기관사 대부분 내과부터 신경과까지 모든 분야를 전전하다 마지막에서야 정신과를 갑니다. 가족들도 처음에는 꾀병인 줄 알아요. 본인이 어찌할 수 없으면 병 아닙니까. 산재로 인정할 증명서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사실이 중요한 거죠."

 

이처럼 열악한 노동환경과 경쟁 상황에 처한 기관사들은 오늘도 운전대를 잡은 채 지하터널을 행진하고 있다. 삼일장이 지나도록 분향소를 지킨 조합원들은 "사측의 사과와 사후대책이 마련될 때까지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장례를 연기하며 버틸 것"이라 말했다. 김씨는 "이 기관사의 전직 요청을 거부한 당시 관리자는 아직 조문조차 하지 않고 있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서울도시철도노조 측은 '재현된 죽음을 끝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해 사측에 사과를 요구하고 있으며 서울도시철도 본사 앞에 농성천막과 분향소를 설치해 시위를 진행할 예정이다.

 

오는 17일 서울역에서는 "서울을 점령하라"라는 이름으로, 운수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공공운수노동자 투쟁선포 결의대회가 개최된다.


#서울도시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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