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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성회는 제6회 서울여성문화축제를 통해 가족의 문제, 가족관계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거나 어려움을 통해 새로운 가족관계를 만들어나가려 노력 중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전파하고자 한다. 그 중 '女심전심' 수기공모는 여성들이 직접 자신이 맺고 있는 다양한 가족관계와 그에 의해 파생된 자기 경험과 대안을 이야기하자는 기획의도를 갖는다. 이러한 시도들이 '여성과 가족'에 대해 다양한 사고를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수기응모 글 중 선정된 5편을 공개하고자 한다. - 기자 말

 KBS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한 장면. 고부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고부협정서'를 체결하는 장면.
 KBS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한 장면. 고부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고부협정서'를 체결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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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감냐?"

아침밥 먹고 난 후면 어김없이 시어머니께서 물어보신다.

"네."

그때부터 시어머니의 손놀림이 바빠지신다. 아직 머리 감으러 들어가기 전인데도 벌써부터 테이프를 끈끈한 면이 밖으로 오도록 돌돌 말고(일명 : 찍찍이) 계신다. 

올해 여든 한 살이신 어머니는 돋보기를 끼셔야 겨우 보일 정도이신데 유독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은 기가 막히게 잘 보신다. 머리카락이 길고 잘 빠지는 나로서는 얼마나 부담인지 모른다. 욕실, 거실, 방…, 머리를 말리며 출근 준비를 하는 며느리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떨어진 머리카락을 한 올도 놓치지 않고 '찍찍이'로 수거 중이시다. 물론 거기에 빠지지 않는 한마디.

"얘는 먹는 것도 시원찮은데 머리카락은 왜 이리 굵어? 이렇게 많이 빠지는 거 보면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냐?"

어흑…. 어쩜 저 잔소리는 친정엄마와 똑같을까? 시집간 후 가장 좋았던 이유 중 하나가 엄마 잔소리에서 해방됐다는 거였는데.

시어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이 우리 애가 세 살 때니까 벌써 8년째에 접어들었다. 아이 출산 후 친정 부모님 집 근처에 살며 애를 맡겼다. 매해 1000만 원씩 오르는 전셋값과 육아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궁리 중에 시부모님께서 '없는 살림 쪼개서 사느니 합치자'고 먼저 제안하셨다. 그 김에 외아들이라 연세 많으신 부모님을 모신다는 미명 아래 맞벌이, 전셋값, 육아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며 시부모님께 얹혀 살기로 전격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찍찍이' 들고 쫓아다니는 시어머니... 그래도 '궁합'은 제대로

지금 살고 있는 집은 평수는 작지만 거실이 넓고, 화장실이 2개라서 두 가족이 살기에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친정집과 골목 하나 떨어진 곳이니 친정, 시댁 두 부모님을 보살펴드릴 수 있는, 아니 정확이 말하면 맞벌이하면서 애와 같이 두 부모님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다.

시부모님과 함께 살기로 하면서 집 문제, 육아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었다지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실 결혼하고 나서 살림은 남편과 나누어서 했고, 아이 낳고는 바로 친정엄마의 도움으로 육아와 집안일을 꾸려 나갔는데, 시부모님과 살게 됐다고 할 줄 모르는 집안일을 갑자기 잘할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집안일 중에서 밥하는 일과 설거지 등 부엌일은 결혼 후부터 쭉 남편의 몫이었다. 나는 빨래와 청소를 했다. 시어머니께서 아들이 밥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막상 그 장면을 보시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하지만 그 걱정도 닥치면 해결된다. 우선 며느리가 요리를 못할 뿐만 아니라 부엌일 하는 본새도 시어머니 마음에 안 든다. 게다가 아들이 해주는 음식이 일단 맛있다. 설거지도 며느리보다 아들이 훨씬 깔끔히 잘한다. 그리고 아들이 부엌일은 자기 일이라고 결혼 후 역할을 나누어 살았으니 더 이상 아무 말씀 말라고 못을 박았다.

그래도 며느리가 하는 집안일 중에 마음에 드는 것도 있으시단다. 우선 정리정돈을 잘해서 화장실, 거실을 청소하면 깨끗하다고 만족해하신다. 다만 그런 일이 한 달에 두세 번뿐이라 그것이 불만이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신다. 2대가 같이 모여사는데 당연히 어려움이 없을 순 없고 서로에 대한 불만도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가족 중에서 시어머니와 궁합이 제일 잘 맞는 건 바로 나다. 성질이 급하고, 할 말이 있으면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다 말해 버려야 하고, 일 밀리는 거 절대 볼 수 없고, 약속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남한테 절대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바로 우리 시어머니 성격이시다.

나는 그에 비하면 반대 성향이라고나 할까? 행동이 좀 느리고, 일이 안 될 때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라 여기고, 남한테 싫은 소리 절대 못하고. 남편도 가만히 보면 시어머니의 성격을 많이 닮았다. 그래서 시어머니와 남편은 사소한 일에 의견대립이 종종 있다. "너랑은 대화가 잘 되는데, 내가 배 아파 낳은 애비하고는 왜 말이 안 통하는지 모르겠다" 하는 말씀을 종종 하시는 걸 보면 시어머니와 나의 성격궁합 하나는 제대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여성'으로 똘똘 뭉칠 수 있다!

사실 성격궁합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다. 8년 전, 시부모님이 사시던 집을 팔고 새로운 집을 사게 되었을 때, 집의 명의는 당연히 시아버지의 명의로 할 거라 다들 생각했지만 나의 의견은 좀 달랐다. 사실 지금까지 가계의 경제는 시어머니께서 이끌어 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뜨개질 솜씨가 좋아서 한평생 바느질로 이 공장 저 공장을 전전하시며 모은 돈으로 생계를 꾸리고 집까지 장만하셨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평생을 일하시고도 당신 명의로 된 통장 하나 없었던 시어머니. 남편과 상의 후에 "어머니, 이 집 명의 어머니 이름으로 해요!"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해도 되니? 내 이름으로 해도 되는 거야?"하고 반색을 하시며 눈물까지 글썽이시던 시어머니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럼요, 어머니. 어머니 그럴 자격 충분히 있으세요. 이 집은 이젠 어머니 집이에요!"

시어머니께서는 용돈을 아껴서 <사랑의 리퀘스트>에 매주 2통의 전화로 기부를 하신다. "아직도 없는 사람, 어려운 사람이 이렇게 많으냐"며 눈물을 훔치시다가 작은 액수지만 도움이 되었으며 하는 마음에 잊지 않고 꼭 하신다.

한 번은 아프리카 신생아에게 모자를 떠주는 기부활동을 어디서 보셨는지 "뜨개질이라면 내가 할 수 있지 않겠냐"고 알아봐 달라고 하셨다. 인터넷을 통해 알아보니 뜨개실과 바늘을 구입하여 그것을 짜서 보내는 거였다. 시어머니께서 평소에 하시던 뜨개질이라는 재능 나눔으로 기부하면 좋겠는데, 재료 구입에 돈이 많이 들어가는 것에 부담을 느끼셨다.

나는 시어머니께서 가지고 계신 재능을 살려 작게라도 기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했다. 그때 마침 항균 수세미가 눈에 들어왔다. 항균 뜨개실로 떠서 거품이 잘 나고 음식물 찌꺼기가 잘 닦이는 수세미를 만들어, 그것을 사무실이나 주변에 판매해서 그 수익금으로 시어머니께서 하시고 싶은 기부를 더 많이 하시게 하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너무나 만족해 하신다. 당신의 온전한 노동으로 작지만 의미 있는 기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평생 당신의 노동이 사회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은 경험이 없으셨던 시어머니. 여성의 '돌봄노동'의 가치를 시어머니와 공유하고 싶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야말로 그 어떤 관계보다도 '여성 연대의식'으로 똘똘 뭉칠 수 있다는 것을.


#서울#가족#성평등#축제#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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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성회는 서울 여성들의 자기성장, 성평등한 마을 만들기, 폭력과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활동하는 생활인 여성들의 공동체입니다. 2007년 7월에 창립하여 서울여성문화축제, 서울여성아카데미, 지역아동센터 성교육 및 부모교육, 지속 가능한 생태 지킴이 활동과 식량주권운동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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