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길 위에서' 포스터

▲ 길 위에서 '길 위에서' 포스터 ⓒ (주) 비트윈 픽쳐스

스물여덟 살 여름 어느 날. 나는 길 위에 있었다. 장성 백양사에서 담양의 산속 작은 절집까지 점심 때 즈음에 시작한 걸음은 저녁이 되어서야 끝났다. 혼자 걸어가는 젊은 여자를, 지나가던 버스는 정류장이 아닌데도 멈춰서 태워주려고 했고, 누군가의 신고를 받은 경찰차가 와서 신분확인을 한 후 조심해서 가라는 걱정을 해 주기도 했다.

그 때는 백양사에서 담양 산 속 절에 가는 길이 유명한 길인 줄 몰랐다. 단지 메타쉐콰이어가 줄지어 늘어선 그 길이 고단함과 피곤함을 모두 씻어주는 것 같고, 소나무와 대나무가 가득했던 그 산과 바람소리가 좋아서 자주 걸어 다녔었다.

결혼을 앞두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서 한 달 정도를 그 절에서 머물렀다. 노트 가득 글을 쓰며 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밥벌이를 떠나고 현실에서 벗어나 있었던 순간들이다.

공양주 보살님의 어린 아이와 함께 놀았고, 비 온 후 아침 점심이 다르게 죽순이 올라오던 대나무숲을 놀라며 관찰하기도 하였다. 신발 밑창이 닳아지도록 걸은 후에 서울에 올라올 날짜를 정하지 않았던 나는 짐을 싸서 올라 와, 새 직장을 구했고, 두 달 후에 결혼을 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배 위의 대화 선우스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스님들

▲ 배 위의 대화 선우스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스님들 ⓒ (주) 비트윈 픽쳐스


금요일 오후 남편과 함께 본 '길 위에서'는 잊고 있었던 그 날의 기억을 떠 올리게 했고, '그 동안 나는 어떻게 살고 있었나?','지금 내가 고민할 것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영화를 보며 슬쩍슬쩍 눈물이 났다.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작은 것들에 밀려 정작 중요한 것들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밥 한 그릇은 피 한 그릇과 같다며, 시주를 받아 수행을 하는 수행자는 밥값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영운 스님의 말씀을 듣다가 또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그 말이 어찌 수행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이겠는가?

상욱 스님 명문대 졸업, 미 유학파, 젠 센터의 경험으로 출가한 상욱 스님

▲ 상욱 스님 명문대 졸업, 미 유학파, 젠 센터의 경험으로 출가한 상욱 스님 ⓒ (주) 비트윈 픽쳐스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떠나 교수임용면접을 앞두고 귀국하여 출가한 상욱 행자. 얼굴이 해 맑아 동자승같이 보이는 어린 시절 절에 버려져 동진출가를 한 선우 스님. 인터넷으로 카톨릭 개신교 불교에 대해 검색하다가 출가하여, 긴 머리 찰랑거린 모습보다 한 올 남김없이 머리를 민 모습이 더 아름다운 민재 행자. 나직한 음성으로 조단조단 말씀하시는, 속가어머님이 영웅으로 부른다는 영운 스님.

외부인 출입 금지 수행도량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이 걸렸다

▲ 외부인 출입 금지 수행도량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이 걸렸다 ⓒ (주) 비트윈 픽쳐스


일 년에 단 두 번만 문이 열리는 비구니 수행도량 '백흥암'. 이창재 감독은 금남의 지역인 그 곳에서 300일 동안의 템플스테이를 공개한다. 부모와도 인연을 끊고 들어와 수행하는데 왜 감독님과 인연을 맺어야 하냐며 촬영거부를 하는 스님들 덕분에 네 번이나 문 밖으로 나가야 했던 사연치고는 104분 동안 영화는 물 흐르듯이 지루한 줄 모르고 흘러간다. 스님들처럼 이창재 감독도 목숨 걸고 찍었을까?

큰 스님 "무엇이 보고 싶으냐?"고 물으시는 큰스님

▲ 큰 스님 "무엇이 보고 싶으냐?"고 물으시는 큰스님 ⓒ (주) 비트윈 픽쳐스


새벽 세 시에 일어나 스님들과 똑같이 수행을 하고 9시에 잠들어야 했던 이 감독은 언제 촬영을 한 것일까? 수행하는 스님들의 맑은 기운 덕분인지 감독의 목소리와 화면 분위기도 수행자 분위기가 난다. 화면 속에 담긴 사람, 화면 속 풍경, 화면 속 말소리. 사람들 사이의 말소리가 저렇게 편안하던가? 거친 말과 센 말들 속에서 오랜만에 사람다운 말소리를 들은 것처럼 편안했고,  스님들도 5일제 근무하면 안 되냐는 참신한 의견에 웃음이 나왔다.

사제지간의 웃음 길 위에서 환하게 웃는 스님들

▲ 사제지간의 웃음 길 위에서 환하게 웃는 스님들 ⓒ (주) 비트윈 픽쳐스


사람들이 출가를 결심하고 삭발을 한 후 나타나는 모습 또한 여러 가지인데, 어른 스님들이 그 어린 스님들을 대할 때 근기에 맞게 대하는 것을 보았다. 부처님 역시 제자들을 그렇게 대했을 것 같다. 똑똑하거나 어리석거나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여자거나 남자거나 상관없이 불법을 깨달아 성불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고 도와주는 스승님들.

길 위에서 길 위에서 만행 중인 세 스님

▲ 길 위에서 길 위에서 만행 중인 세 스님 ⓒ (주) 비트윈 픽쳐스


부처님 오신 날 연등회에서 받은 포스터 종이 한 장이 극장으로 이끌어 백흥암 템플스테이를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이십대 후반 길 위에서 붙잡았던 화두를 다시 잡는다. 이제 조금 더 살면 반백년의 세월이다.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도록 이 화두가 내게 나침반처럼 길안내를 해 줄 것이다.


길 위에서 백흥암 이창재 감독 비구니 스님 (주) 비트윈 픽쳐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치과위생사 . 구강건강교육 하는 치과위생사. 이웃들 이야기와 아이들 학교 교육, 책, 영화 좋아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