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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은 앞으로 50년 더 살기가 어렵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 당신의 운명과 함께해서는 안 된다. 해례본을 공개하고 전문가들에게 맡겨 후손들을 위해 잘 보존될 수 있도록 해달라." - 2013.01.18 <한겨레>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갑갑한 운명'

지난해 9월 7일 대구고법 형사1부(재판장 이진만)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훔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배아무개(50)씨에게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하면서 한 말이다. 언론들은 상주본 가치를 1조 원라고 했다. 1조 원이라면 돈으로 매기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라는 말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가치는 1조 원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 창제 원리를 풀이한 한문으로 된 해설서로 훈민정음 창제 3년 뒤인 1446년(세종 28년) 편찬됐다. 서울 간송미술관에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국보 70호)과 같은 판본이다. 학자들은 상주본이 간송본보다 보존 상태가 좋고 학자의 어문학적 견해가 많아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고 <한겨레>는 같은 기사에서 보도했다.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2011년 방영)에서 이도(세종대왕)는 광평대군을 잃어면서까지 해례인 소이를 지켜 한글을 반포한다. 광평만 아니라 집현전 학사들이 죽어갔다. 심지어 금기 중 금기였던 시신해부까지 했다. <뿌리깊은 나무>만 아니라 우리는 한글날만 되면 한글이 얼마나 위대한 글자인지 자랑한다. 방송들도 한글창제를 한 세종을 칭송하며 우리는 감격한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아오톡에서 줄임 글자가 등장하고, 한글 파괴 현장이 나타나자 지하에서 세종대왕이 운다는 말도 들린다.

상주본 가치가 1조 원, 뿌리깊은 나무에서 이도 모습, SNS시대의 한글 파괴현상에 대한 분노의 공통점은 한글은 위대하며, 이 위대한 글자를 만든 분은 세종대왕이라는 점이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하지 않고 원균이 구했다는 것만큼 불경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항상 불경에 도전하는 이는 있기 마련이다. 한글날 556돌인 지난해 10월, <박연과 훈민정음>(박희민 지음, 휴먼앤북스 펴냄)은 훈민정음 창제자가 세종이 아니라 난계 박연(1378~1458)이라고 주장했다.

훈민정음 창제자가 세종이 아닌 박연?

 <박연과 훈민정음>
 <박연과 훈민정음>
ⓒ 휴먼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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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은 박연이 만들어 세종 25년(1443)에 임금의 이름을 발표하였다.  지금은 비록 하늘이 허공에 맞서는 기분이지만 언제가는 반드시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는 정설이 될 것이다."(6쪽)

뭐 이런 '개풀 뜯어 먹는 소리'가 어디 있느냐고 분노하겠지만, 밀양박씨 난계파 후손인 박희민씨는 <난계유고>(蘭溪遺稿),<세종실록> 따위 기록을 통해 나름대로 훈민정음 박연 창제설을 주장한다.

<난계유고>는 박연 시문집으로 16세손인 경하(景夏)가 1822년(순조 22) 초간했다. 김조순(金祖淳)과 김노경(金魯敬)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중간본은 1903년에 박심학(朴心學)에 의해서 간행되었고, 시 9수, 소(疏) 39편, 조하의절(朝賀儀節)과 가훈십칠칙(家訓十七則) 등 잡저 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은이가 박연 창제설을 주장하는 근거를 보자. <세종실록>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었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만은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세종실록>(세종 25년 12월 30일)

박연이 훈민정음 창제한 3가지 이유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50일 후인 세종 26년 2월 20일 "중국에라도 흘러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라는 논리를 들어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을 올린다. 그러자 세종은 다음과같이 반박한다.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중략) '삼강행실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중략),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 <세종실록> 26년 2월 20일 재인용 178쪽

즉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사람의 세 가지 요건으로 "'운서를 아는 사람',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인지 아는 사람', '백성에게 훈민정음으로 된 삼강행실을 반포하자고 주장한 사람'"이라고 주장했고, 여기에 합당한 사람이 박연이라는 것이 지은이 논리다.

그럼 박연은 '운서를 아는 사람일까?' <세종실록>에서 '운서'는, 세종 20년(1438) 1월 예조와 관련한 것에서 시작해 세종 32년(1450) 윤1월까지 총 7번 나온다. 운서란 <홍무정운>(洪武正韻)을 말하는 것으로 1375년 명나라 태조때 악소봉 등이 칙명으로 편찬한 것으로 한시를 지을 때 필요한 최신 이론서였다.

한글창제에 반대했던 최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집현전 학자들도 운서를 잘 몰랐기 때문에 "집현전의 그 누구도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훈민정음 창제 발표 이전에 <운서>를 몰랐다. 따라서 집현전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이 없다"면서 운서를 잘 아는 이는 박연이므로 한글창제는 박연이라는 것이 그 첫 번째 근거라고 박희민은 주장한다.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인지 아는 사람'

다음으로 '사성칠음'이다. 사성은 중국어 한자음을 그 성조에 따라 평성(平聲), 상성(上聲), 거성(去聲), 입성(入聲)을 말한다.  박연은 세종 8년(1426) 4월 25일 "옛날에 사문(師門])이 거문고를 탈 적에, 봄을 당하여 상현을 타면, 서늘한 바람이 뒤따라 이르고, 여름을 당하여 우현을 타면 눈과 서리가 번갈아 내리고, 가을을 당하여 각현을 타면 따뜻한 바람이 천천히 돌고, 겨울을 당하여 치현을 타면 햇볕이 뜨거웠으며, 사성을 총합하면 상서로운 바람과 상서로운 구름이 잠시 동안 모였다 하였으나, 이것은 오성의 감소된 것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세종실록> 재인용)는 상소를 올렸다. 즉, 박연이 사성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칠음은 궁(宮), 상(商), 반상(半商), 각(角), 치(徵), 반치(半徵), 우(羽)다. 누가 뭐래도 박연이 가장 잘 아는 아악의 칠음계다. <운서>에서 칠음은 아음(牙音), 설음(舌音), 순음(脣音), 치음(齒音), 후음(喉音), 반설음(半舌音), 반치음(半齒音)이다. 아악별좌를 지낸 박연은 사성과 칠음 곧, 28자를 창제했다고 말한다.

'백성에게 훈민정음으로 된 삼강행실을 반포하자고 주장한 사람'

훈민정음 창제 세번 째 조건인 '백성에게 훈민정음으로 된 삼강행실을 반포하자고 주장한 사람'이다. <난계유고> 1번 소(疏) '널리 가례와 소학, 삼강행실을 가르치고, 오음정성으로 풍속을 바로잡자는 상소'에 있다.

"백성에게는 삼강행실을 가르쳐 미풍양속을 이루게 할 것이며, 그뿐만 아니라 오음의 바른 소리를 가르쳐 민풍을 바로잡도록 하시기 바랍니다."<난계유고> 재인용, 184쪽)

따라서 "이 세 가지 요건을 갖춘 박연이야말로 훈민정음의 진정한 창제자"라며 "15세기 조선 최고 학자였던 박연은 조선의 음악을 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 서적에 전문적 지식으로 천, 지, 인의 바람소리·물소리·목소리를 아우르는 훈민정음을 탄생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럼 세종은 무엇을 했을까?

훈민정음의 정착을 위해서 임금이란 강력한 힘이 필요했기에 박연이 문자를 창제했지만 세종의 이름으로 반포했다는 것이다. 그럼 세종은 한글창제에 무슨 역할을 했을까? 신하의 업적을 가로챈 것있을까?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발표는 세종의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세종은 중국과 외교문제 등 '훈민정음 창제'로 빚어질 수 있는 국내외 온갖 어려운 문제를 혼자서 감당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건강히 악화된 세종 25년의 연말을 훈민정음 창제 발표시기로 잡은 것이다. 훈민정음을 만들려는 박연을 격려하여 이 일을 이루게 하고, 훈민정음을 임금의 이름으로 발표하여 강력하게 추진한 것이 세종의 역할이었다."(187쪽)

세종은 든든한 후원자라는 말이다. 한글을 누가 창제했는지 다양한 주장이 있다. 박연 창제설도 이들 중 한 이론일 수 있다. 한글창제는 세종대왕 단독창제설, 후일 문종이 되는 세자와 수양대군 등 '왕좌주도설, 또 세종대왕과 문종도 아닌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설', 그리고 세종대왕 둘째 딸인 '정의공주 도움설' 등이 다양하게 제기되었다. 그 중 정의공주 도움설 근거가 되는 죽산안씨대동보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세종이 우리말이 문자로 (중국과) 상통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 훈민정음을 제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음을 바꾸어 토를 다는 것에 대해 아직 연구가 끝나지 못해 여러 대군(大君)을 시켜 (이 문제를) 풀게 했으나 모두 미치지 못하고 공주에게 내려 보냈다. 공주가 즉시 이를 해결해 바치니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특별히 노비 수백 명을 내려 주었다."(죽산 안씨 족보인 '죽산안씨대동보' 중)

어떤 사람들은 이들도 아니라 신미대사(세종~예종, 생몰년 모름)가 창제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누가 한글창제를 했는지 다양한 이론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한글창제가 세종대왕 단독설, 문종을 비롯한 왕자 그리고 정의공주설, 집현전 학자설, 신미대사 그리고 <박연과 훈민정음>이 주장한 박연설 모두 세종대왕이 없었다면 한글창제는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세종대왕 없는 한글창제는 불가능

훈민정음 반포 후 최만리를 비롯한 조정대신은 거세게 저항했다. 설혹 박연이 창제해도, 세종이 없었다면 한글을 반포할 수 있었을까? 박연이 아무리 천재적인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세종이 적극 지지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 반포와 배급도 마찬가지다. 주자소가 없었다면 한글을 제대로 배급할 수 있었을까? 주자소를 만들기 위해 세종이 힘을 보태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 집현전 학자도 마찬가지다. 세종은 집현전에 인재를 모았다. 서얼 출신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썼다. 집현전 학문 중심은 세종이었다. 문종을 비롯한 대군들과 정의공주 그리고 신미대사도 마찬가지다.

한 마디로 세종대왕은 '문화혁명'을 일으킨 위대한 군주였다. 박연 창제설도 문종과 왕자들, 정의공주, 집현전 학자, 신미대사 창제설처럼 또 다른 주장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세종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한글이 아니라 다른 문자로 말하고, 읽고, 쓰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훈민정음 창제자는 세종대왕이라는 주장은 흔들림이 없다. 

덧붙이는 글 | <박연과 훈민정음> 박희민 지음 ㅣ 휴먼북스 펴냄 380쪽, 2만원



박연과 훈민정음

박희민 지음, 휴먼앤북스(Human&Books)(2012)


#훈민정음#세종대왕#박연#난계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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