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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인터뷰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초췌해 보이지만 예술가의 풍모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급하게 다가왔다. '스페이스 잇다'의 주인장 정희석(43)씨다. 영종도에 있는 작업실에서 한숨도 못 자고 일을 하다 부평구 산곡동에 있는 집에 들러 대충 씻고 정신 없이 왔단다. 오는 21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전시회 준비로 한창 바쁜 정씨를 지난 11일 중구 경동에 있는 '스페이스 잇다'에서 만났다.

목(木)조형 작가, 정희석
   
 정희석 목조형 작가
 정희석 목조형 작가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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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정희석'을 검색하니, 그를 '목수'라고 칭한 글이 몇 개 있다. 작가나 예술가의 이미지보다 투박한 단어를 일부러 고른 것 같아 물었다.

"저를 지칭하는 단어가 통일되지 않았어요. 목수라고도 하고, 나무 작가 또는 우드 아티스트 등으로 다양한데, 저는 목조형 작가로 불리고 싶습니다"

목공예 작품 만드는 일을 올해로 18년째 하고 있는 그는 자신을 작업자가 아닌 '작가'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목조형'이라는 말이 여전히 생소했다.

"홍익대에 목조형가구학과가 있는데, 목조형이란 단어가 아직 보편화되지는 않았죠. 설명하는 게 쉽진 않아요. 그런데 '우드 아티스트'라고 하면 더 빠르게 이해하더라고요. 40대 후반에 연륜과 내공이 쌓이면 우드 아티스트로 불리고 싶지만, 지금은 목조형 작가입니다."

두 단어의 차이를 알 듯 말 듯하다.

경남 거창 출신인 정 작가는 어릴 때부터 골동품 등, 오래된 물건을 수집하는 걸 좋아했다. 요리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대학에선 식품영양학을 전공했다. 요리를 배우는 곳이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입학했지만 화학식을 배우는 등, 너무 복잡해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학 졸업 후 경북 김천에서 실내디자인을 배우다 가구공예를 가르치는 강사한테 반해 가구공예를 시작했다. 경기도 남양주에서 본격적으로 공예를 시작하다 1998년 IMF 국제금융위기를 맞았다. 주변에 도산하는 곳이 많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무로 가구를 조형한 지 10년째인 2008년에 첫 전시를 했다.

"가구도 하나의 조형이에요. 집안의 세간 중 나무로 만들 수 있는 게 광범위합니다. 특히 공예를 했던 사람들이 가구를 만들면, 작품이 더 풍부하죠."

나무를 예술로 승화시킨 정 작가가 오는 21일부터 참여하는 전시회 이름은 '핸드메이드 코리아 섬머(HANDMADE KOREA SUMMER)'다. 국내 최대 규모의 핸드메이드 페스티벌이며, 올해로 여섯 번째다. 그가 참여하는 코너는 'H 카페'다.

"H는, 하우스와 핸드메이드라는 뜻이 함께 있어요. 전시장 안에 카페테리아를 운영하는데 그곳을 갤러리 겸 카페로 만드는 프로젝트에 초대됐습니다."

역대 최대 규모인 이 전시회는 부스 660개에 작가 450여명이 참여해 핸드메이드 상품 3만여 종을 선보일 계획이다.

'잇다'에 오면 '있다'
   
  ‘스페이스 잇다’의 입구. 15년 전 동양서림으로 사용됐던 흔적이 현관에 남아 있다.
 ‘스페이스 잇다’의 입구. 15년 전 동양서림으로 사용됐던 흔적이 현관에 남아 있다.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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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작가는 '언젠가는 인천에서 살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어릴 때 보았던 TV 프로그램 '수사반장'이나 '사건 25시' 등에서 '이 사건은 인천 ○○동에서 일어난…'이라는 멘트를 들으면 '저 동네는 어떤 곳일까?'라는 호기심이 생겼다.

"제가 태어나 자라온 곳이 내륙이라 바닷가에 대한 로망도 있었겠죠. 좋은 내용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어쨌든 인천이 좋았어요. 부평구 산곡동에서 산 지 15년 됐습니다. 목공예를 배우면서 여러 지역을 다녔는데 살아보니까 인천이 더 좋더라고요. 집값이 싸고 제 직종에 안성맞춤이에요. 목재단지가 이곳에 다 있거든요."

사는 곳은 인천이지만 정 작가는 주로 서울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전시를 끝내거나 창작한 작품들을 모아둘 수 있는 쇼룸이나 갤러리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동구 배다리 주변을 배회하다 운명처럼 이곳을 만났다.

"지난해 3월 무렵이었어요. 여러 군데를 다녔는데 마음에 드는 곳이 없어서 포기할까, 생각했죠. 전봇대에서 담배를 피우다 무심코 골목 안에 옆면이 보이는 이 건물을 발견했는데 정말 예뻤어요. 공간 내부를 보고 바로 결정했죠."

계약하자마자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의욕이 앞서 시작한 일이지만 시간과 돈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 자신감이 줄었다. 그때 서울 평창동에 있는 금보성아트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금보성 관장이 정 작가를 도와줬다.

"관장님이 페이스북에 소셜 펀딩(Social Funding)으로 '정희성 작가 짓다'라는 이름으로 한 구좌에 10만 원씩 모금한다고 홍보하셨어요. 일주일도 안 됐는데 1000만 원이 모이면서 일이 커지더라고요. 그 힘으로 시작했고, 그 때 '이 공간은 나만의 공간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지 후원금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 작가는 이 공간이 주는 감성이 좋아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리모델링하는 5개월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먼지가 쌓였고, 쓰레기를 1톤 트럭으로 열다섯 번이나 치울 정도였다.

"청소하면서 내가 이 건물을 돌봐줬다고 생각했는데, 이 건물이 나를 돌봐줬어요. 안정시키고 근대 역사를 공부시켜주고 옛 것의 소중함을 알려줬으니까요. 작품세계를 살찌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 건물은 1930년대 지어진 것으로 당시 일본무역상의 소금창고로 사용됐다고 한다. 그 후에는 여성전용 한증막으로 사용하다 책방으로도 사용했다. '동양서림 책방' 간판이 지금도 남아있다.

"공사를 하는데 동네 어르신들이 들러 건물의 역사를 얘기해줬어요. 책방을 끝으로 15년 정도 비워뒀다가 '스페이스 잇다'가 바통터치를 한 거죠. 이 공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공간'이라는 뜻의 '스페이스'라고 짓고 사람과 사람을, 자연과 자연, 자연과 사람, 문화와 사람, 문화와 문화가 이어진다는 뜻의 '잇다'라고 지었습니다. 실험적인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어요. '잇다'에 오면 뭐든지 있습니다."

다양한 예술장르와 협업 시도
   
  ‘스페이스 잇다’에는 다양한 목조형 가구들이 전시돼 있다.
 ‘스페이스 잇다’에는 다양한 목조형 가구들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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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물 내부를 원형 그대로 살리고자 애썼다.
 건물 내부를 원형 그대로 살리고자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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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잇다'는 7월 마지막주 중 하루 '모발나눔콘서트(줄여서 모나콘)'를 열 예정이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인디밴드 '라모'가 공연하는데, 입장료는 1만원이다. 콘서트 날짜에 맞춰 화가 한명일의 작품 전시회도 열어 공연 수입과 그림 판매수익금 전액을 소아암협회에 기부할 예정이다. 가발 하나를 제작하는데 100만 원 정도 드는데, 가발을 만들어 소아암 환자들에게 전달할 거란다.

"공간이 아무리 좋아봤자 의미가 없어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여기에 식(食)문화가 있어야 합니다. 더 즐겨야 하는데 배고프면 들렀다가는 곳밖에 안 되거든요. 사람도 중요하지만 식문화도 중요합니다."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요리에 관심이 많은 정 작가는 '공간이 주는 힘이 있는 이곳에서 계속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셰프들과 협업도 기획하고 있고, 런칭 쇼도 구상하고 있다. 콘서트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모나콘'으로 현실이 됐다.

"최근에 와인파티를 했어요. 사람이 많으면 감당을 못 할 거 같아 몇 시간 전에야 페이스북으로 게릴라식 홍보를 했는데도 많은 사람이 왔어요. 이 공간은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창작인들이 와서 노는 곳이죠. 서울 근교에 이런 감수성이 있는 곳이 없어요. 예술가는 문화의 저변을 넓혀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풍족하진 않지만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작품 활동 하고 전시하느냐고요? 생활이 모두 전시예요. 뭔가 일부러 보여주려고 하니까 힘들지, 생활을 자연스레 보여주는 게 전시라 일부러 보여줄 필요가 없어요."

* 소셜 펀딩(Social Funding) : 소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창의적 아이디어나 프로젝트를 홍보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게 개인들에게 소액의 후원을 받는 소셜 웹 커뮤니티.

덧붙이는 글 | <시사인천>에 실림



#스페이스 잇다#정희석#목조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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