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군 삽교읍 수촌문해교실 전수자 강사가 그림일기장 두 권을 들고 지난 2월 중순 기자를 찾았다. "혼자 보고 말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갖고 왔다"면서. 문해교실 어르신들의 반전 글 솜씨는 여러 사례가 있었기에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큰 기대 없이 한 장 한 장 일기장을 넘기다 보니 전 강사의 얘기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정말 혼자 보고 말 일이 아니었다. 지난 2월 28일 주인공인 이영분(74, 충남 예산군 삽교읍) 할머니를 만나 인터뷰를 했다.... 기자말
이영분 어머니는 밤늦은 시간까지 일기를 쓴다. 어떤 날에는 그림까지 그리다 새벽 한 시가 돼서야 잠자리에 든다. 2015년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장은 벌써 10권, 그림 일기장은 2권째다.
대부분 "일기를 쓰라"면 "오늘 특별한 일이 없었다"거나 "쓸 이야기가 없다"는 불평부터 하건만 어머니는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 걸까? 더구나 스물셋에 결혼해 50년째 한 마을에서 매일 비슷한 일상을 살고 있지 않은가?
어머니의 일기에는 밭을 매다 만난 방아깨비, 도로를 건너던 지렁이에 대한 걱정, 청개구리 울음소리, 거실문에 붙어 있던 나비 한 마리, 문해교실 수업, 사위들과 함께 한 뜬모, 눈온 날 풍경, 딸이 선물한 공책, 밤나무 아래 꿩 한쌍…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특별하게 담겨있다.
그림은 또 어떤가. 한 번도 미술교육을 받은 적 없는 어머니가 표현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은 참으로 생생하다. 꽃과 새, 곤충, 바다와 산들도 모두 생물인 듯 살아 움직인다. 사인펜과 색연필로만 표현하는 색채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
어머니의 그림일기 속 세상은 평화롭고 따스하다. 그런데 어머니가 꾸준히 그림일기를 쓰는 동력은 뜻밖에도 '슬픔'이다.
"내가 위로 여섯을 유산하고 서른에 큰딸을 낳았어. 그리구 내리 딸 넷을 낳고 아들을 얻어 벼슬을 땄는디, 우리 아들이 수능 끝나고 나갔다가…. 아들 잃구 나서는 맘을 잡을 수 없고 하염없는 눈물만 나와. 구름만 봐도, 시냇물 흘러가는 것만 봐도…. 마침 학교가 있기 땜이 다른 맘 안먹었지. 낮에는 일하다가도 밤 되면 잠이 안 오고 아들이 보고 싶구. 그러면 글 읽구, 일기 쓰구, 그림 그리구 그러다가 잠이 들어. 그림일기는 세 시간도 네 시간도 아무 생각이 없이 지나가거든. 처음엔 허리 꼬부려 부치고 늙게 학교 다닌다구 흉볼까 움츠러들었는데, 일기 쓰며 당당한 마음이 됐어."어머니의 인터뷰 소식을 듣고 응원하러 달려 온 막내딸(37, 대전 거주)은 "자식들이 모이면 늘 엄마 일기를 본다. 큰 언니가 소리내어 읽으면 서로 내 얘기가 적다, 많다 하며 더 분발하자 그런다"면서 "나도 자식 키우지만 우리 엄마 인성교육은 따라갈 수가 없다. 어렵게 지내시면서도 늘 콩 한 쪽도 나눠먹으라고 교육하셨다. 엄하실 때는 엄하셨지만 매를 단 한 번도 대지 않으셨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현명하고 지혜로우시다"고 자랑했다.
어머니는 "모든 부모는 다 잘돼라고 가르치지. 그렇다구 자식들이 다 실천하나. 즈덜이 잘 배워나갔으니 고맙지"라며 "딸들이 나 학교 다니는 거 좋아혀. 연필이랑 공책이랑 다 군에서 주는데 또 사다 주구. 나를 다 키워주신 거는 전수자 선생님이구, 자식들두 좋아하구 칭찬해주니 힘이나"라고 화답했다.
한편 어머니가 꼬박꼬박 '학교'라고 부르며, 삶의 기쁨으로 여기는 수촌문해교실은 올해까지 6년 과정을 마무리하고 내년부터는 문을 닫는다.
☞ 이영분 할머니 그림일기 모두보기http://www.yesm.kr/news/articleList.html?sc_serial_code=SRN101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와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