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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 발언으로 판사 자격 논란을 부른 캐나다의 로빈 캠프.
 여성혐오 발언으로 판사 자격 논란을 부른 캐나다의 로빈 캠프.
ⓒ 캐나다연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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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 바닥에 하체를 붙이고 버티면 성폭행이 불가능한 거 아닌가요?"

2014년 6월, 캐나다 앨버타주 지방법원에서 판사가 물었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19세 여성이었다. 그는 파티에 갔다가 목욕탕에서 한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신고했고, 그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왜 무릎을 계속 오므리지 못했나요?"

질문이 이어졌다. 이윽고 62세 남성 판사는 이렇게 물었다.

"골반을 비틀면 삽입이 불가능한 것 아닌가요?"

이후 재판 내용이 공개됐고, 캐나다는 물론 전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앨버타 상소법원은 캠프 판사가 '동의와 관련한 법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며 재판을 다시 하라고 명했다. 문제의 판사가 "이미 오래전 폐기된 성적 고정관념과 고정관념적 신화에 기대 재판을 진행한 게 아닌가 의심된다"는 것이다. 재판은 다른 판사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앨버타의 법대교수 4명이 캐나다 사법위원회(Canadian Judicial Council)에 캠프의 행태를 엄정 조사하도록 요구했고, 다른 30여 단체와 개인 또한 캠프 판사의 자격을 문제삼는 민원을 제기했다. 여성혐오적 태도와 가해자 편향의 강간 신화를 체화한 판사에게 성폭력 재판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캐나다사법위원회는 즉시 조사위원회를 꾸렸고, 청문회 절차가 완료되기까지 캠프 판사가 어떤 성범죄 재판도 맡을 수 없도록 배제시켰다. 3명의 판사와 2명의 변호사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는 캠프 판사는 물론, 재판중 판사 질문을 받은 원고를 불러 증언을 들었다.

"그런 질문으로 무슨 답을 얻으려 했던 것일까요?"

성폭행 고발자는 재판에서 느낀 혼란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판사로 인해 '뭔가 더 하지 않았던' 자신을 혐오하게 되었고, 성폭행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생각돼 삶의 의욕까지 잃었다는 것이다.

"자꾸 구역질이 나고 어지러워서, 차라리 정신을 잃고 쓰러졌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기절하면 판사가 그런 질문을 계속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는 '재판 내내 혼란스러웠다'며, 판사의 발언이 공개되면 성폭행 생존자들이 고발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우려스럽다고 했다. 이에 대해 캠프 판사는 자신의 "무례하고 천박한 발언"을 깊이 뉘우친다고 사과했다. 자신이 그런 언행을 하게 된 까닭은 무의식적 편견 때문이며, 전문가의 상담과 페미니즘 교육을 통해 성폭행에 대한 자신의 그릇된 사고를 바로잡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무례하고 천박한 발언" 사과, 페미니즘 교육 약속한 판사

실제로 캠프 판사는 페미니스트 학자인 토톤토대학교의 브렌다 코스만 법대 교수를 자신의 교사로 영입했다. 그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자신의 무지한 발언이 드러낸 성적 고정관념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하지만 발언은 사과할 수 있다 쳐도, 그 발언을 가능케 한 사고구조는 쉽게 고쳐지지 않는 법이다. 예컨대 캠프는 조사 과정에서도 발언에 상처받은 여성이 "예민한 성격(fragile personality)"이라며 책임을 전가하기도 했다.

청문회를 마친 조사위원회는 결론을 내렸다. "캠프의 행동은 사법부의 공정성, 성실성, 독립성을 너무나 명백하고 심각히 훼손하기에, 당신에게 이 역할을 맡기는 것은 대중들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위원들은 5-0의 만장일치로 캠프 판사를 해고할 것을 권고했다.

2017년 3월, 조사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든 든 캐나다 사법위원회는 캠프 판사의 자격유지 여부를 표결에 부쳤다. 결과는 19대 4로 '자격 박탈'이었다. 자신의 언행에 대해 거듭 사과하고, 교육을 통해 자신의 여성혐오적 사고를 바로잡겠다고 한 판사를 용서없이 해고한 것이다. 

사실 캠프의 판사자격 박탈은 예견된 일이었다. 반세기 역사의 캐나다 사법위원회에서 청문회가 열린 것은 모두 11번에 지나지 않으며, 여기서 '해고' 제안이 나온 것은 단 두 차례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캐나다 사법부가 법조인의 성평등 의식과 감수성을 얼마나 심각히 여기는지를 보여준다.

또 다른 판사 역시 성적 편견을 드러낸 혐의로 재판에서 배제되었다. 노바스코샤에서 여성이 술에 취해 택시 뒷자리에 의식을 잃고 누워 있다가 성폭행을 당했다며 고발한 사건이었다. 판사는 재판 중에 '분명히, 취한 상태에서도 성행위 동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범인을 무죄 석방했다.

이후 비판 여론이 빗발쳤고, 해당 판사가 성적 동의에 관한 법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캠프 판사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성적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한 상태에서 재판에 임했다는 비판도 쏟아졌다. 그 후 성범죄를 다루는 연방판사들은 해당 교육과정을 이수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뿐만 아니라, 의식이 없는 여성은 성적 동의를 할 수 없다고 아예 연방 법으로 못 박았다. 다시 말해, 술이나 약물로 인해 정신을 잃은 상대와의 성행위는 어느 경우든 '동의하지 않은 성행위,' 즉 강간이 된다.

일 년 넘게 지속된 조사를 통해 해당 판사의 발언이 비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결론이 내려졌으나, 조사위원회는 판사의 발언에 분명히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섬세하지 못한 발언으로 사법기관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가 맡았던 성폭행 사건은 새 재판부에 재배당되었다.

캠프 판사의 해고 이후 캐나다 사회의 성범죄 재판이 한층 더 엄격히 진행되고 있다. 예컨대 핼리팩스 검찰은 무죄로 풀려난 택시 성폭행 무죄 판결에 항소하기로 했다. 다음 날에는 세인트존스 검찰이 강간 무죄 판결에 항소하겠다고 발표했다. 한 여성이 술에 취한 채 순찰차를 얻어탄 뒤 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건이었다. 

이런 캐나다의 상황은 자연스레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캐나다 노바스코샤의 법원 앞에서 판사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다. 팻말에 "(여성이) 술 마시는 게 죄가 아니라, 강간하는 것이 범죄다"라는 팻말과 "집에 데려다 달라는 것이 성관계 합의를 의미하지 않는다"라는 글귀가 보인다.
 캐나다 노바스코샤의 법원 앞에서 판사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다. 팻말에 "(여성이) 술 마시는 게 죄가 아니라, 강간하는 것이 범죄다"라는 팻말과 "집에 데려다 달라는 것이 성관계 합의를 의미하지 않는다"라는 글귀가 보인다.
ⓒ 더글로브앤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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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가 "허리 비틀면 성관계 막을 수 있지 않냐"고 말하는 나라

미투가 한국사회를 휩쓸고 있다. 힘들게 침묵을 깨고 변화를 외침이 반갑기는 하나, 그 뒤에는 제 역할을 못 해 온 무능한 경찰, 검찰, 법원이 있다. 법과 정의가 공정히 집행되어 왔다면 피해자들이 직접 나서 외쳐야 할 필요도 없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허리를 돌려 비틀면 성관계를 막을 수 있지 않나요?"

유명 연예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소했다가 무고죄로 맞고소 당한 여성의 재판에서 검찰이 던진 질문이다. 캠프 판사의 질문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하지만 이 질문을 둘러싼 사회적 대응에는 별로 닮은 점이 없다.

앞의 몰상식한 질문을 던졌던 캐나다 판사는 수없이 사과하고 성의식 개선 교육을 받겠다고 약속하고도 해고됐지만, 한국의 검사는 사과도 하지 않았고, 교육을 받겠다는 약속 없이도 멀쩡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쩌면 그 검사는 지금 이 시간에도 비슷한 류의 질문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 그가 재판에서 한 발언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박OO을 좋아했나요?"
"그런 곳(좁은 화장실)에서 성관계가 가능한가요?"
"성폭행 이후 피해자가 보이는 양태와 판이하게 달라 의심이 됩니다."

전혀 관련 없는 질문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성폭행해도 된단 말인가), 성폭행으로 고소한 피해자 앞에서 검사는 그가 강요당했다는 행위를 '성관계'라고 불렀다. 성폭행 이후 피해자는 어떤 '양태'를 보여야 할까? 심적 고통을 남성 검사가 의심하지 않을 방식으로 표출해야 한단 말인가?

'성관계'와 '성폭행'을 구분하지 못하는 집단 내에 성범죄가 만연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집단이 외부의 문제의 해결할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사법부는 철저한 반성을 통해 변화하는 것으로 응답해야 한다. 미투 선언을 마지못해 따라가는 식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변화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스스로 변화하느냐, 변화 당하느냐의 두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다음 글에서 경찰, 검찰, 법원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강간의 기준을 '항거'에서 '동의'로 바꿔야 하는 이유]
① '꽃뱀론'으로 성폭력을 지지하는 당신에게
② 담뱃불 협박당하고, 싫다고 말해도 '강간'이 아니라고?
③ 성범죄 18~50%가 '꽃뱀 자작극'이라고?
④ 성폭행 피해자에게 "왜 저항 안했나" 묻는 사회
⑤ "섹스 전에 허락받는 게 말이 되냐"는 남자들에게
⑥ 법무장관 외모 칭찬한 대통령이 '사죄'한 이유
⑦ 데이트폭력 살인범도, 찜질방 추행범도 풀어준 법원


태그:#미투, #명시적 동의, #캠프, #박유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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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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