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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페미니스트 주권자행동 회원들이 11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여성 의제가 실종되고 차별과 혐오, 증오선동으로 얼룩진 제20대 대선정국을 규탄하며 윤석열 정부가 성평등 사회 실현 책무를 다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2022페미니스트 주권자행동 회원들이 11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여성 의제가 실종되고 차별과 혐오, 증오선동으로 얼룩진 제20대 대선정국을 규탄하며 윤석열 정부가 성평등 사회 실현 책무를 다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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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재일동포 4대의 이야기를 다룬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던 타국살이는 여성에게 유독 더 가혹했다. 여기서 "상관없다"는 "괜찮다"의 동의어가 아니라, 역사가 내 삶을 엉망으로 만들었을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내겠다는 의미다. 2022년, 여성 유권자로 20대 대선을 지켜보는 내내 '정치가 망친 것'을 떠올리면서 절망해도 끝내 굴복하지는 않겠다는 마음으로 주문처럼 이 문장을 되뇌었다.  

이미 달라진 세상에서 정치만 후퇴했다

거센 페미니즘 물결이 도래했던 지난 몇 년 간, 우리 사회에서 여성 인권은 느리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성폭력 생존자들의 미투 운동은 가해자들을 고발했고 대규모 혜화역 시위는 견고한 디지털 성범죄 카르텔을 드러냈으며 여성의 선택권을 옭아매던 낙태죄는 폐지됐다. 

물론 정치의 영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선언하며 출마한 문재인이 19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뒤이어 열린 지방선거에서는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을 내세운 녹색당 신지예가 1.7%라는 소수 원외정당으로는 유의미한 득표율로 주목을 받았다. 21대 국회에 등장한 정의당의 류호정, 장혜영 의원은 여성 청년 정치인으로서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앞장서왔다. 또 2020년에는 남성 중심의 의회정치에 반대하며 여성의당이 창당했고,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여성의당 김진아는 20만표로 4위를 기록했다. 이들을 향한 백래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정치판에서 페미니즘은 여성 의제를 실현하고 여성 정치인의 숫자를 늘리며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이끄는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고 나름의 성과들을 거뒀다. 

그런데 이번 대선의 두 거대 양당 후보는 본격적인 대선 레이스를 시작하며 '여성'을 배제한 행보들을 거듭했다.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온갖 종류의 '허울 좋은 빈말'도 쏟아지는 선거 국면에서 여성은 철저하게 외면당한 것이다. 국민의 절반인 여성도 동일하게 한 표를 행사할 유권자라는 사실을 잊은 듯한 행태에 나는 여성 유권자로서 큰 모욕감을 느꼈고, 이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여성들이 숱하게 들어온 차별의 언어가 대통령이 될 사람에게서 나올 때, 말의 힘은 더 강력해지고 큰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윤석열 후보의 말에 나와 내 친구들이 겪은 일상의 차별은 모조리 지워졌고, 이재명 후보가 "광기의 페미니즘을 멈춰달라"는 글을 공유하자 페미니즘은 곧 광기로 취급받았다. 그들의 말 한마디에 여성 청년인 나는 '군 복무 사기를 떨어뜨리는 직장인 여성'이 되었다가 '남성 청년들의 기회를 박탈한 여자 사람 친구'가 되었다. 이미 한참 달라진 세상을 똑바로 감각하지 못한 정치는 2022년, 그렇게 후퇴했다. 

여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투표했다  

두 정당의 대선 전략이 이렇게 여성혐오로 귀결된 배경은 각각 다른 이유로 2030 여성표를 과소평가한 데 있다. 국민의힘에게는 "어차피 소수정당을 찍을 위협적이지 않은 집단"이었고 더불어민주당에겐 "국민의힘이 싫어서라도 어차피 우리를 찍을 집단"이었던 것이다. 국민의힘은 이준석 대표를 중심으로 마지막까지 이 전략을 고수했고, 그나마 민주당은 '추적단 불꽃'의 박지현씨를 영입하고 민주당의 권력형 성범죄를 사과하며 막바지에 이르러 방향을 선회했다.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20대 여성의 58%, 30대 여성의 49%가 이재명 후보를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을 고르는 기준은 저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내 삶을 좀 더 나아지게 만들거나 우리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만한 사람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2030 여성이 결집한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여가부를 폐지하고 무고죄를 강화하겠다는 윤석열 후보의 공약은 여성들의 '생존'을 실질적으로 위협했다.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할 최소한의 법적, 제도적 장치들이 사라질 수 있다 공포는 어떻게든 윤 후보의 당선을 막아야 한다는 움직임을 만들었다. 윤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직후 트위터에서 '호신용품'이 실시간 트렌드에 올랐다는 사실은 이 공포가 얼마나 현실화된 감각인가를 고스란히 증명한다. 

여성들이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여성위원회 부위원장을 중심으로 모이게 된 이유도 '생존'과 직결된다. 이들이 민주당으로 마음을 돌린 결정적인 계기는 박지현을 영입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이재명 후보의 찬조 연설 방송에 출연하며 처음으로 마스크를 벗었기 때문이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가해자들이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겠다며 본인 사진을 찾아다니는 걸 알면서도 끝내 얼굴을 공개한 그 절박한 마음이 결국 "박지현을 지키자"는 흐름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기회를 만들고 변화를 주도했다

정치는 여성을 무시하고 외면했지만, 여성들은 분노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행동을 통해 '정치적 주체'로서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리고 이는 윤석열의 승리가 결코 안티페미 세력의 승리는 아니며, 여성혐오 전략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메시지가 되었다. 

대선 직후 정치권과 언론은 새로운 현상이 갑자기 부상한 것처럼 주목했지만, 사실 2030 여성들은 지난 몇 년 간  차별과 혐오에 맞서 언제나 스스로 기회를 만들고 변화를 주도해왔다. 성폭력, 불법촬영, 텔레그램 성착취, 낙태죄 등 중요한 여성의제의 순간순간마다 이들은 거리에서 또는 온라인에서 크게 목소리를 냈고, 처벌과 대책을 적극적으로 요구했으며 결국에는 법을 바꾸고 제도를 만들어냈다. 이번 대선에서 나타난 정치적 행동도 그런 움직임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여성들은 언제나 여성혐오에 단호하게 대응해왔고 이들이 모이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정치권만 간과했을 뿐이다.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이 될 앞으로의 세상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성들은 공포가 현실이 되도록 마냥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또한 "어린 여성들이 대단하다"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살기 위해 투표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함과 대선 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하는 현실 함께 걱정해 줄 동료시민들을 더 많이 보고 싶다. 

정치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늘 그랬왔듯이 또 어떻게든 길을 찾아내어 앞으로 나아갈 테니. 

태그:#대선, #2030 여성, #박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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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변화는 우리네 일상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 파도 앞에서 조개를 줍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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