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21 20:04최종 업데이트 22.09.23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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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SF를 친밀하게 느끼도록, 은밀하게 접근해 진입장벽을 슬그머니 무너뜨립니다. 이를 위해 SF 읽는 모습을 생활밀착형으로 전달합니다. [편집자말]
현재 한국 SF 소설은 국내에 출간되는 SF 소설 중 절반 가량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신기할 정도로 놀랍고 빠른 성장이다. 이전에는 영미권 소설이 약 80%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 SF가 급격히 비중이 늘어나면서 전체 SF 소설 중 영미권 소설이 차지하는 비율은 2020년에는 34.8%, 2021년에는 39.2%로 감소했다(구환회, "2019년 SF 시장에 무슨 일이 있었나?", <출판문화>, 2022. 8., 통권 679호). 그만큼 SF의 출간 종수가 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다렸던 SF 소설의 등장

이에 관해 할 말은 많지만, 이번에는 한국 SF에서 시선을 돌려 영미권 SF를 보려고 한다. 국내에 출간되는 영미권 SF의 한 흐름은, N. K. 제미신의 <우리는 도시가 된다>처럼 재미가 보장된 신작을 거의 실시간으로 따라잡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그해의 단편을 모은 <에스에프널(SFnal) 2022>도 마찬가지다.


꾸준히 이어지는 다른 흐름은 이름난 작가의 고전을 내는 것이다. SF 역사를 훑다 보면 '이거 제발! 번역 출간!' 하게 되는 목록이 생긴다. 나는 소원이 많이 이루어진 편이다. 어느 출판사에서 미국의 여성 SF 작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1915~1987) 책이 안 나오나 외쳐댔던 시간이 무색하게, 최근 그의 단편집 <집으로부터 일만 광년>이 출간되었다. <체체파리의 비법>과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에 이어 세 번째 단편집이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소원은 조애나 러스의 소설을 비롯한 아더와이즈 상(구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상) 수상작의 번역 출간인데, 기원을 담아 열심히 외치고 다니는 중이다.

'솔직히 한국에서는 잘 안 되겠지만 나오면 좋겠다'고 바라는 목록도 있다. 새뮤얼 딜레이니의 <트리톤>과 그의 SF 평론집이 예시다. 잘 안 되리라고 걱정하는 이유는, 읽기에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오면 좋겠다고 바라는 이유는, 잘 쓰기로 유명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새뮤얼 딜레이니의 <노바>가 출간되었다. 출간 예정작인데 예정일 한참 지나도록 소식이 없길래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짠' 하고 출간된 것이다.

딜레이니는 부유한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나 19살에 첫 소설을 출간했다. 이후 영미문학의 수혜를 듬뿍 담아낸 SF 소설을 다수 썼다. 그의 소설은 시대적으로도 당시 흐름에 잘 맞았다. 영미 SF가 과거의 '하드 SF' 기조에서 벗어나 보다 환상적이고 문학적인 '뉴웨이브'로 흘러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딜레이니는 로저 젤라즈니 등과 함께 대표적인 뉴웨이브 기수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딜레이니의 소설을 고대한 이유는, 그가 흑인 인권운동으로 유명한 가문에서 자란 흑인이면서, 매년 퀴어 퍼레이드에 나가는 게이이기 때문이다. 딜레이니의 <트리톤>은 혼란스러운 성정체성의 문제를 SF로 승화시킨 소설이다. 그의 소설은 인종과 성정체성에 관한 통찰이 묻어난다.

영미문학의 전통을 계승한 SF
 

책 <노바> ⓒ 폴라북스

 
지난 5월 국내에 출간된 <노바>는 '전설적인 편집장'이라 일컫는 미국 존 W. 캠벨에게 잡지 게재를 거절당한 작품이다. 캠벨은 1940년대와 1950년대의 '과학적인' SF를 지휘한 인물이지만, 성차별 및 인종차별적이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당대 백인 남성 중심의 미국 SF계에서 흑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과 주인공의 배경을 납득하지 못해서 <노바>(1968)를 거절했다.

하지만 딜레이니는 이 소설로 휴고상(미국 SF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오늘날 SF계가 꼽는 명실상부한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덕분에 나는 <노바>가 어떤 소설인지 꼭 보고 싶어졌고, 올해 그 소원을 이뤘다. 우주선 선장 '로크'를 비롯한 승무원들이 제각각의 목적을 갖고 '신성(nova)'으로 향하는 32세기 이야기는 기대만큼 독특한 작품이었다.

나는 <노바>의 추천사에 이런 문장을 썼다. "이 소설은 과학을 후광처럼 두르고 문학적 컨텍스트를 뜨개질하며 SF를 서구 문학의 후예로 자리매김한다." 분량을 줄여야 한다는 문제가 없었다면 여러 문장으로 풀어서 글을 썼을 것이다.

소설은 정말로 과학을 두르고 영미문학의 전통을 계승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SF가 서구 문학의 적통이리라는 가능성을 증명한다. 등장인물의 이름 등 고유명사에는 노골적으로 고대 서사시부터 20세기 대표작까지 문학사의 흔적이 드러난다.

예를 들면 그리스 신화에서 이아손이 아르고노트 호를 타고 황금 양털을 찾아 원정을 떠나듯, 소설 주인공들은 노바(nova, 신성)를 찾아 우주로 떠난다. 소설에는 성배 탐색에 관한 농담이 여러 번 등장한다.

작중 '노바'는 성배 탐색자들이 찾아 헤매는 성배 혹은 프로메테우스의 불이다. 차마 범접할 수 없게끔 신성한 빛으로 사람의 눈을 불태워버리는 곳이면서, 우주 항해에 필수적인 자원인 '일리리움'을 채굴할 '노다지'다. 노바의 일리리움 매장량은 인류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 만큼 풍부하다.

노바의 빛에 대비해 감각 입력기를 끄고 항해하는 모습은 세이렌을 맞이하는 오디세우스의 선원들과 닮았다. 이외에도 <보물섬>에서 해적 이야기를 풀어놓는 화자인 늙은 뱃사람, <모비 딕> 속 에이허브 선장과 거대한 고래 모비 딕의 사투, 영국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시 속 '알바트로스' 등을 연상시키는 표현이 군데군데 등장한다.

더군다나 <노바>에서 한 챕터의 끝은 자꾸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채 열려 있고, 다른 챕터와 이어진다. 종횡무진하는 서술 속에 세 화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독백을 남긴다. 주인공 격인 로크는 해적 선장을 자칭하며 얼굴에 남은 흉터를 분노의 연료로 쓰는 검은 피부의 남자다. 그는 숙명적인 대적자에 맞서는 영웅이면서, 성배 탐색을 이끄는 기사다. 노바의 일리리움을 손에 넣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길 염원한다.

반면 마우스는 두려움, 현실감각, 생존본능을 곤두세운 집시 소년으로, 가장 차별에 민감하다. 케이든은 소설이 사라진 시대에 작가를 지망하는 어설픈 기록자로, 인간을 관조하는 역할을 맡는다. 언뜻 장황하게 이어지는 이들의 목소리는 혼란스럽고 복합적인 방식으로 서사를 두텁게 만든다.

SF 소설의 고전이 된 작가와 작품

게다가 딜레이니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32세기를 묘사하면서, 그 시대다운 방식으로 유지될 차별과 빈부격차를 이야기한다. 이곳은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팔에 소켓을 심은 사이보그가 된다. 소켓을 이용해 노동이나 교육을 해결한다. 기계에 직접 접속하면 되기 때문이다.

집시는 대체로 소켓을 심지 않은 떠돌이이고 극심한 린치를 당한다. 기업 간의 경쟁으로 인한 전쟁, 식민지 지배, 계급 투쟁 등이 우주적 규모로 펼쳐진다. 로크는 어느 재벌의 적통 자녀이고, 십 대 때 이미 애가 셋이었다. 일하는 자들의 마을에 내려가 아무 여자나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을 거침없이 쓰는 부분이 딜레이니답다.

가장 자극적인 부분은 현란한 색채, 소리, 냄새의 묘사다. 마우스는 '시링크스'라는 악기를 연주해 다채로운 환상을 자아낸다. 혹은 바위틈에서 캐낸 금가루를 마시면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환상이 보인다. 산호색과 겨자색은 물론 에메랄드에서 자주색으로 변하는 색채, 강철색과 진주색, 황금과 은과 루비와 다이아몬드, 구리와 철과 유황의 색이 곳곳에 등장한다.

<노바>는 감각적인 표현과 고전의 필치로 한껏 멋을 부린 소설이며,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만큼 어엿한 SF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도 고전으로 자리를 잡았다. 누구나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작품이 되었다는 뜻이다.


노바

새뮤얼 딜레이니 (지은이), 공보경 (옮긴이), 폴라북스(현대문학)(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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