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16 11:26최종 업데이트 22.10.16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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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주자는 살아 숨 쉬는 자인가. 존 버거는 <제7의 인간>에서 이들을 가리켜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라 했다. 오직 노동하는 몸으로 기능하기를 요구받고, 표류함이 당연시 여겨지고, 존재할 권리를 국가의 허락에 구해야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난민의 현주소이다. 체류권을 '허가'받은 이주민들조차 한국 사회의 성원권을 제대로 획득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국가는 잔혹하고, 사회는 무심하다. 그럼에도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일. 한국사회에서 살아 숨 쉬는 이주민들의 삶을 르포르타주로 담고자 한다.[[편집자말]
제주에 갈 일이 있었다. 온 김에, 제주에 사는 이에게 인터뷰를 해줄 만한 '이주민'이 없을지 물었다. 누가 있을까? 한참 대화를 하다가 깨달았다. 그는 '육지'에서 온 이주민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나는 외국에서 한국(제주)으로 온 이주민을 찾고 있었다.

그렇지. 제주는 섬이지. 바다를 건너온 것만으로 '이주'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의 무게를 지닌다.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는 일은, 같은 국적을 가진 사람에게도 다른 문화권에 들어온다는 감각을 가지게 한다. 그러니 국적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도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불현듯 깨달은 사실에 마음이 짠해지려고 한다. 그러나 멈춰 세운다. 이것은 정주민의 사치스러운 감상이다. 이주는 '낯섦'이라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인내와 결심, 그리고 막대한 노동을 필요로 한다.

2012년, 제주 입성
 

라연우(아메드 라바비디)씨 ⓒ 희정


라연우(아메드 라바비디)씨가 제주도에 처음 온 것은 2012년.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다. 제주에 머무는 외국인도 적고 난민이라는 존재는 더 낯설었던 시절. 라연우씨도 난민이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았다. 내전 중인 고국 시리아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은 계속했지만, 그 이후를 상상하진 못했다.

젊은 남성들은 군대로 끌려갔다. 군대로 가서 정부군을 위해 싸우다가 죽는 일이 자신의 미래가 되게 할 순 없었다.

"검문이 심했어요. 길에서 젊은 사람만 보면 군인들이 끌고 가는 거예요. 저도 3번을 잡혔어요."

다행히 풀려났지만, 네 번째에도 그런 행운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내전이 극심해지자 대학교도 문을 닫았다. 학업 중이라는 핑계로 징집을 피하는 일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친동생은 이미 한국에 와 있었다. 그도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처음에는 3개월짜리 임시 비자로 들어왔다. 시리아의 상황은 나아질 줄 몰랐다.

"대학 때 정부군에 반대하는 데모를 하고 그랬어요. 부모님이 여기(시리아) 오면 안 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집에 군인들이 찾아왔다고. 그때 동생이 출입국에 가서 서류를 작성하면 한국에 계속 머물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난민 체류 신청 서류였다. 그러나 난민 인정 심사는 1년이나 미뤄졌다. 제주도에 아랍어를 할 수 있는 통역관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가 제주 출입국관리소에서 난민 심사를 받은 첫 시리아인일 것이다. 결국 그는 서툰 영어로 심사에 응했다. 그리고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게 된다(인도적 체류 허가란, 난민 지위는 아니지만 생명이나 신체의 자유를 침해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임시로 국내에 머물며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일로 1년마다 체류 연장을 하게 되어 있다). 

통역사도 없을 정도로 제주는 그와 같은 문화권 사람들이 적은 지역이었다. 연우씨의 동생은 그때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왜 같이 가지 않았을까.

"저는 어릴 적부터 시리아가 답답했어요. 그 사회와 좀 안 맞는다고 해야 되나. 보수적이고 자유가 없는 면이 그렇고, 무엇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막혀 있으니까.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되면 그곳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육지'에 가면 시리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 속에서 지내게 된다고 했다. 자신이 답답하게 여겼던 문화를 유지한 공동체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시리아 사람 하나 없는 이곳 제주에 머물기로 했다.

"외롭지 않았어요?" 내 물음에 그는 "외로웠죠" 한다. "많이. 그렇지만 일만 했어요. 시간이 없었어요." 그가 한국에 왔을 때 나이가 스무 살. 식당, 농장, 공사 현장을 돌며 일했다. 외로울 새 없이 적응하느라 바빴다. 휴일 없이 일했다.

진취적인 사람들이 그렇듯, 그도 가능한 한 빨리 언어를 배우고 싶었다.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말을 배웠다. 한국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는 늘 술과 고기 안주가 있었고, 돼지고기와 술을 먹어선 안 되는 나라에서 온 그에겐 새로우면서도 곤혹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래도 2년이 지나자 대화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한국어가 늘었다.

바리스타를 꿈꾸다
 

카페 직원으로 일했던 시절의 라연우씨. 한국에 와서 처음 마신 카페모카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 라연우


쉬는 날 없이 일했지만, 카페에 가는 것은 연우씨의 유일한 취미였다.

"여기 와서 커피(아메리카노)를 처음 마셔봤어요. 카페모카. 진짜 맛있는 거예요. 너무 좋아서 나 이거 만들고 싶다."

카페를 열고 싶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최저임금도 못 받는 20대 청년이 카페 사장을 꿈꾼다. 무모함을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다.

"동생이랑 친구들 만날 때, 나는 커피숍에서 일해서 커피 만드는 걸 배울 거라고 했더니, 비웃는 거예요. 무슨 난민이 커피숍이냐. 그냥 폐차장에서 일해라."

그는 카페마다 이력서를 넣었다. 연락오는 곳이 없었다. 내가 외국인이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그래서 폐차장으로 갔냐고? 아니, 그는 이력서 넣은 카페에 직접 찾아갔다.

"가서 사장님 어디 있냐고 해서, 사장님이 나왔어요. 이력서 냈는데 연락이 없다고 했더니, 바로 그 자리에서 면접을 보게 되고. 제가 운이 좋아서 그런지. 그런 사장님 아마 세상에 없을 거예요. 너무 잘해줬어요."

그곳에서 2년을 일했다. 이렇게 이주민이 바리스타가 되는 이야기를 듣나 싶었는데, 2018년 예멘 난민 500여 명이 제주도에 들어온다.

제주에서 처음 본 난민
  
"비자를 연장하러 출입국관리소에 갔는데, 사람들이 엄청 많은 거예요. 저도 처음에 놀랐어요. 제주도에 살면서 아랍어 쓰는 사람들을 처음 봤던 거라."

그가 처음 제주에 왔던 때와 다를 바 없이 아랍어 쓰는 통역관이 부족했다. 연우씨가 예멘 난민들의 통역을 맡게 된다.

"아침 7시에 나오면 밤 10시에 집에 들어와요. 그땐 진짜 감당이 안 됐어요."

예멘 난민들은 입국 심사만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먹어야 했고, 자야 했고, 생활용품이 필요했고, 병원에 가야 했다. 당시 제주 나오미센터(천주교 제주교구 이주사목센터)가 난민을 지원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기에, 그는 그 센터로 자리를 옮겨 통역 자원활동을 한다.

"제가 제주도에 처음 왔을 때 어려웠던 것을 그 사람들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들어보면 진짜 여기까지 올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사람들이 많고. 도움을 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긴장되는 일이었다. 그가 옮기는 말이 누군가의 인생을 결정짓는 정보가 되었다.

"통역을 처음 할 땐 무서웠어요. 저도 그 사람들한테 외국인이잖아요. 그리고 시리아에서도 18살까지만 자랐고. 쓰는 용어도 익숙하지 않고, 전쟁이나 정치 상황에 관한 단어들도 모르는 게 많은 거예요."

한 손에 번역기를 들고 몇 시간을 통역에 매달렸다. 근무하던 카페도 그만뒀다. 시간이 없었다. 이전부터 한국사와 한국어를 공부하느라 시간을 쪼개어 쓰고 있던 참이었다. 귀화 신청을 한 것이다. 출입국관리소를 자주 찾는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그때쯤에 제가 많이 안정되어 있다고 느꼈어요. 제 주변에 다 한국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이 저를 특별하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제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까먹을 정도? 새로운 꿈을 갖게 됐고, 귀화를 알아보게 됐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귀화하여 2020년 한국 국적을 갖게 됐다. 지금은 나오미센터에서 일하며, 제주 지역 난민 지원 사업을 맡고 있다.

그가 만든 집

인터뷰를 하기 전 라연우씨가 나온 기사 몇 개를 보고 간 참이었다. 인터뷰마다 한국인이 되어 너무 좋다는 내용이 있었다. 귀화하며 느낀 안도감과 기쁨을 물어봐야지 생각하면서도, 그의 기쁨에 마음껏 동조할 수는 없었다. 외국인마저 '대한외국인'이길 바라는 한국 정서를 향한 나의 반감이었다.

하지만 연우씨는 내게 "집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10년은 그가 자신이 머물 곳을 찾아 애쓴 여정이었다.

"소속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전에는 약간 제가 없는 거예요. 나라가 존재하지만 없는 거랑 마찬가지였고. 저는 귀화하기 전까진 귀화밖에 계획이 없었어요. 나 이거 진짜 안 되면, 그럼 나는 못 사는 거지. 계속 난민으로 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소속된 곳 없이, 그의 표현대로라면 '집 없이' 사는 시간이 버거웠다. 그러고 보니 외국인이건 대한외국인이건 우리(정주민)에게 외국인은 떠날 사람이다. 외국인을 대하는 다정함은 관광객이나 유학생처럼 떠날 것이 명확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환대다. 하지만 이곳에 머물겠다고, 자리 한 칸을 달라고 오는 이에겐 달라진다.

난민에겐 환대를 빠르게 철수시킨다. 인도적 체류 허가 같은 방식으로 머물게 해도,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그들에게 주어진 권리는 취업 허가 정도이고 사회보장 지원은 없다). 머물 곳을 쉬이 내주지 않는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의 분투가 있다. 그 애씀의 결과가 연우씨에게는 한국 국적 획득이었다.

머묾과 이주
 

나오미센터 곳곳을 손수 페인트 칠하고 있는 라연우씨. 그만큼 애정을 지닌 공간이다. ⓒ 라연우


받은 환대도 적지 않았다. 면접 보자마자 선뜻 직원으로 채용해준 카페 사장도, 머물 곳이 없다고 하니까 게스트하우스를 몇 년이나 내준 사람(지금은 가족처럼 지낸다)도 있었다. 지역민들의 이런 선의가 연우씨를 버틸 수 있게 했다. 엄살 부리지 않는 성격이라 바빠서 외로울 시간도 없다고 말했지만, 몸은 더 솔직했다.

"몇 개월 동안 가족들도 연락이 안 된 때가 있어요. 공습이 심해져서. 살아있는지도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이제 나는 정말 갈 데가 없구나. 스트레스가 크고, 몸은 힘들고. 크론병(만성 염증성 질환)에 걸리게 된 거예요. 대장에 염증이 생겨서 피가 계속 나오고, 수혈도 받아야 했어요. 농담으로 그런 말 해요. 내 몸에 한국인 피가 있다고. 수혈 많이 받아서."

그런데 건강보험조차 없었다. 인도적 체류 허가자에겐 일용직 일자리(단순노무직) 정도밖에 허락되지 않을 때라,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데 치료비를 지원해준다는 곳이 있었다. 난민인권센터, 난센이라는 인권단체였다.

"너무 고마운 거예요. 그렇지만 그때는 왜 저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나? 했어요"

그로부터 몇 년 후, 건강을 회복한 연우씨는 자신에게 도움을 준 인권단체 사람들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자신에게 이것은 큰 변화이자 성장이었다. "사람들이 왜 연우씨를 도와주었는지 이제 알 것 같으세요?" 물었다.

"그때 저를 안 도와줬으면, 치료를 받을 수 없었겠죠. 그런데 안 도와준다고 나가는 게 아니에요.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들이에요. 어차피 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장소(성원권)를 내주지 않는다고 떠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며 살아간다. 예민 난민들이 온 지도 4년이 지났다.

"요사이 센터로 도움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어요. (예멘) 사람들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도움 없이도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었나보다 생각해요."

물론 일자리를 찾아 제주를 떠난 사람도 많다. 제주에 온 예멘인들 중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것은 2명. 400여 명은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았다. 이들은 예멘의 상황이 나아지면(체류할 사유가 종료되면) 한국을 떠나야 한다. 고국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이들도 많겠지만, 연우씨 눈에 밟히는 것은 부모를 따라온 어린아이들이다.

"두세 살 때 여기에 왔어요. 아예 예멘에서 살아본 적 없는 아이들도 있어요. 그 애들은 얼굴 보지 않으면, 아예 한국인이에요. 사고방식도 한국인이고, 감정 표현도 한국어가 더 편해요. 예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그 아이들이 돌아가 겪을 혼란을 염려한다. 자신이 시리아를 떠나 한국에 와서 겪은 것과 같은 감정을 아이들도 느끼는 것이 아닐까 걱정한다. 집 없이, 소속감 없이, 앞날을 계획할 수 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대화를 돌려 그에게 묻는다. 머물 자리가 생긴 지금은, 앞날을 계획하고 있느냐고.

"귀화 전에는 귀화만 생각했어요. 이젠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육지에서도 한번 살아보고 싶고. 배울 수 있는 것이 더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육지엔 아는 사람도 없고, 여기 있는 가족 같은 사람들 놔두고 가는 것이 쉽지 않고."

지역 청년들 고민과 너무 비슷하다. 그의 나이 갓 서른. 제주에 비슷한 나이대 친구들이 있다. 안 그래도 그 청년들과 서로 자기를 버리고 서울로 가지 말라고 농담 삼아 말한다고 했다. 그만큼 이주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겠지. 이주. 바다를 건너가는 것만으로 큰 용기가 필요로 한다. 하지만 떠날 이유가 있기에 떠나고자 한다.

중간자이자 한국인
 

제주 나오미센터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라연우씨 ⓒ 희정


예멘 난민들이 온 시기, 연우씨는 자신은 중간자적 위치였다고 말한다. 난민에 대한 공포와 불편함을 드러내는 한국 정주민을 이해하면서도, 이곳으로 온 난민들의 사정에 공감하는 마음을 동시에 가지는 위치였다. 이쪽도 저쪽도 다 이해한다고요? 대인배 같다는 농담으로 넘겼지만, 그가 가진 위치가 모든 것을 이해하게 만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이질적인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에선 그 이질적인 존재가 이해의 폭을 넓힐 수밖에 없다. 이해하지 않고, 인내하지 않고, 긍정하지 않으면 낯선 땅에서 버틸 수 없다. 낯선 곳에서 자리 한 칸을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없다.

나는 미국과 유럽 중심의 서구권 사람들에겐 관대하면서 그 외 문화권엔 편견을 드러내는 한국 사회가 싫다. 이런 말을 자유로이 꺼낼 수 있는 것은, 내가 날 때부터 한국 국적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정주민인 나는 이해의 폭을 덜 넓혀도 되는 권리를 가졌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머물 자리를 가진 사람이 할 일은 이런 품평이 아닐 것이다. 연우씨가 자신이 선택한 나라와 지역(제주)에서 머물 수 있기까진, 개별적인 환대가 있었다. 이 환대를 제도와 법으로 안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어떻게? 연우씨와 나는 대화를 하다가 '어떻게' 부분에서 잠시 멈췄다. 당장 그 답을 할 순 없으나, 연우씨의 말로 마무리하려 한다.

"불쌍해서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옳지 않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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