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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포켓몬빵의 인기는 식을 줄 몰라서, 여전히 하루 10명은 "포켓몬 빵 있어요?" 하고 묻는다. 빵을 구하지 못해 실망한 사람 중 일부는 호빵 기계를 보고 반색하며 꿩 대신 닭으로 호빵을 사간다.

호빵을 꺼내 주다 보니 나도 먹고 싶어져서 한 개를 사 들고 퇴근했다. 맛있게 먹고 남은 호빵 종이에는 '삼립'이라는 글자가 무늬처럼 이어져 있었다. '아, 그렇지...' 지난 15일 경기 평택시에 위치한 SPC그룹 계열사 SPL 제빵공장에서 23세 노동자 A씨가 샌드위치 소스를 만드는 기계에 끼여 사망한 소식이 떠올랐다. 갑자기 마음이 서늘해졌다.

그러고 보니 포켓몬빵도 SPC 계열사에서 만든다. 계열사들을 잘 파악해서 불매운동에 동참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한편 그것만으로는 씻어지지 않는 안타까움이 묵직하게 남았다.

무사히 퇴근해 주는 '행운'
 
지난 17일 경기 평택시 SPL 평택공장에서 한 직원이 사고 기계 옆 같은 기종의 소스 교반기를 살펴보고 있다.
▲ 20대 근무자 사망사고 발생한 SPL 평택공장 내부 모습 지난 17일 경기 평택시 SPL 평택공장에서 한 직원이 사고 기계 옆 같은 기종의 소스 교반기를 살펴보고 있다.
ⓒ 연합뉴스=독자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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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동거인과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식품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밤샘근무가 힘들어 그만둔 뒤에는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했다. 다리 여기저기 멍이 들고 손을 다쳐서 오는 일도 잦았다. 전국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산재사고 소식을 들으며 점차 남 일이 아니라는 실감이 들었고, 아침마다 건네는 인사말이 달라졌다. "조심해." 하지만 스스로 조심한다고 모든 사고를 피할 수는 없을 테니, 저녁마다 무사히 돌아와 주는 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세상을 떠난 제빵 노동자 A씨는 사고 당일에도 남자친구에게 높은 업무 강도를 호소했다고 한다. 지난 18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강규형 화섬식품노조 SPL 지회장은 A씨가 사고 당일 남자친구와 나눈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공개했다.

"내일 롤치킨 (만들 거) 대비해서 데리야키 치킨 500봉을 깔 예정. 난 이제 죽었다. 이렇게 해도 내일 300봉은 더 까야 하는 게 서럽다."
"일 나 혼자 다 하는 거 들킬까 봐 오빠 야간 (근무로) 오지 말라고 했다. 사실 (이건) 일상이야."


내 주변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졌다. 집에 돌아와 힘들다는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던 동거인 그리고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추락해 다리가 부러졌던 아버지의 모습.

작업 환경 점검 미비, 과도한 업무 강도 등 기업의 잘못으로 사람이 죽으면 대표가 나와서 사과 성명을 발표한다. 그러나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를 아무리 외쳐도 비슷한 사고는 반복된다. 올해만 해도 1월부터 9월까지 총 77명이 끼임 사고로 사망했다(관련 기사: SPC 제빵노동자 끼임사... 그렇게 죽은 77명의 사연을 공개합니다 http://omn.kr/218y1 ).

사고가 반복되는 것은 기업이 노동자의 안전을 생산성·효율성과 맞바꿈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고도 사업주가 "분쇄기·파쇄기·마쇄기·미분기·혼합기 및 혼화기 등을 가동하거나 원료가 흩날리거나 하여 근로자가 위험해질 우려가 있는 경우 해당 부위에 덮개를 설치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는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87조 8항을 지켰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그럼에도 고용노동부는 올해 1월에야 시행되기 시작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을 개정하려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 전부터 중대재해처벌법의 조항이 모호하고 과도한 처벌과 기업 활동 방해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언론에 따르면 현재 정부는 대표이사가 아닌 안전보건최고책임자를 '경영책임자'로 보고 중대재해의 징벌적 손해배상 조항을 삭제해야 하며 10개가 넘는 안전·보건 관계 법령을 6개로 축소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선의를 가진 경영자가 억울한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한다는 취지를 그대로 믿는다고 해도, 그 피해를 예방하는 일이 과연 한 해 산재사고 사망자 800여 명의 목숨을 지키는 일보다 중요할지 의문이다.

불매운동이 번지면서 포켓몬빵도 남는 경우가 생긴다고 한다. 불매운동은 무관한 사람들의 피해를 만들어내는 만큼, 무의미한 불매운동에 그치지 않길 바란다. SPC그룹과 그 계열사들이 재발 방지를 위해 현실적 개선책을 내놓고, 앞으로도 중대재해처벌법을 일관성 있게 시행·적용해 국내 기업의 안전 문화가 바뀔 수 있게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보태면 좋겠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근무환경, 사실 이게 상식이다
 
청년하다, 평화나비네트워크, 진보대학생넷, 청년정의당, 청년진보당 등 33개 대학생, 청년단체 회원들이 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SPC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평택 SPL 제빵공장 청년노동자의 산재사고에 대해 책임자 처벌과 윤석열 대통령의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개정 시도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청년하다, 평화나비네트워크, 진보대학생넷, 청년정의당, 청년진보당 등 33개 대학생, 청년단체 회원들이 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SPC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평택 SPL 제빵공장 청년노동자의 산재사고에 대해 책임자 처벌과 윤석열 대통령의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개정 시도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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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의 사망사고 하루 뒤, 사고 현장에서 동료 노동자들은 평소처럼 작업을 해야 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공장에서는 사고 현장에 흰 천만 덮어두고, 심지어 같은 유형의 소스 배합기를 써서 일을 하게 하고 있었다. 새로운 안전 지침도 내려오지 않은 상태였다. 하루 전 동료가 죽은 현장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일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 장소에서 자신은 '부품'이라는 실감이 깊게 들지 않았을까. 

노동자는 곧 소비자다. 그리고 소비자가 있어야 기업 운영이 지속된다. 사람을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 되찾을 수 없는 '생명'이 아니라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대하는 것이 기업의 자유를 보장하는 일이라면, 그 자유가 기업의 이익으로 이어지는 데는 한계가 찾아올 것이다. 물건과 달리, 사람들은 비슷한 경험과 공감대로 이어져 있으며 힘을 모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일하는 편의점은 손님이 많아 물 마실 틈도 없이 일해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유니콘' 같은 사장님을 만났다. 손님이 많아도 문 잠그고 화장실에 다녀오며 쉬엄쉬엄 일하라고 말하는, 주휴수당을 주기 위해 근무 시간을 늘려주는 사장님이다. 정말 신기하고 다행스럽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는 근무 환경이 이렇게 귀하고 운 좋은 일로 생각된다는 것, 어딘지 좀 이상하다.

태그:#SPC산재사고, #삼립불매운동, #중대재해법, #산업재해, #포켓몬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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