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17 20:31최종 업데이트 23.02.09 09:48
  • 본문듣기

산기슭에 자리를 잡은 장욱진 미술관. 2014년 '김수근 건축상'을 수상한 바 있다. ⓒ 성낙선

 
자전거를 타는 묘미 중 하나가 낯선 곳에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색다른 풍경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 풍경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본능적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서게 된다. 그때마다 자전거 안장에서 내려서서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여기는 어디지', '저건 뭐지' 하는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처음 가보는 길일수록 그런 일이 더 자주 일어난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풍경이냐고 물으면 별로 할 말이 없다. 사실 풍경이라는 게 보는 사람에 따라, 또는 그날의 감성에 따라, 느낌이 조금씩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색다른 풍경이라는 것도 누군가의 눈에는 전혀 색다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낯선 곳을 여행하다 보면, 소소한 풍경 하나도 그냥 지나치기 쉽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창릉천은 한강 지류 중에 하나다. 고양시를 지나 방화대교 부근에서 한강으로 합류한다. 10여 년 전에 내가 알던 창릉천은 개발이 덜 된 까닭에 잡풀이 무성한, 그래서 다른 하천에 비해 원시 상태에 좀 더 가까운 곳이었다. 서울에서 말끔하게 손질이 되어 있는 하천들만 보아온 터에 그때 내가 본 창릉천은 조금 의외였다. 풍경도 어수선하고 흐르는 물도 탁했지만, 그래도 한강 지류 중에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 있어 다행이다 싶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창릉천 화도교 밑으로 이어지는 자전거도로. ⓒ 성낙선


그때도 자전거도로는 있었다. 자전거도로가 방화대교 아래에서 창릉천을 타고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하지만 그 자전거도로는 5km를 채 못 가 화도교 아래서 끊겨 그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거기에서 더 올라가려면 둑 위로 난 길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 길이 거기에서 어디까지 더 이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전거도로가 끊겼다는 사실을 인지한 그 시점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창릉천은 금방 잊혔다.

그러다 최근에 창릉천을 따라 고양 시내로 꽤 길게 자전거도로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창릉천 자전거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조금 더 달리다 보면 공릉천과 석현천을 만나 북쪽으로 양주시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중랑천을 따라서 의정부시까지 가본 적은 여러 차례지만, 양주시는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창릉천을 따라서 양주시까지 가볼 수 있다니 한 번쯤 시도할 만했다.
 

천변으로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한 삼송지구. ⓒ 성낙선

 
창릉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지역 개발

그 사이 창릉천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 화도교까지 놓인 자전거도로는 이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건너편 둔치 위에 산책로가 놓이고 여느 공원에서나 볼 수 있는 조형물들이 들어서 있는 걸 보면 이곳도 사람 손을 타기 시작한 게 분명하다. 그러다 화도교에서부터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예상 밖이다. 창릉천 둑 위로 크고 높은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서울로 치면 강남에 있는 양재천쯤 되는 것 같다. 그 풍경이 낯설게 다가온다.

그동안 창릉천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아는 사람들에겐 익숙한 풍경이겠지만, 머릿속에 잡풀 무성한 천변 풍경만 남아 있던 사람에겐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하천 위로 높게 치솟은 건물은 물론이고, 자전거도로와 천변에 조성한 공원이 한강과 다를 게 없다. 한강에서 늘 보던 풍경이면서도,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마주하게 된 풍경이라 어딘가 모르게 낯설어 보이는 것이다. 고양시의 창릉천 주변에는 현재 원흥지구, 삼송지구, 지축지구 등이 들어서 있다. 창릉천이 앞으로 어떻게 얼마나 더 변할지 알 수 없다.
 

창릉천변, 고양시 흥도동의 자전거도로 터널. ⓒ 성낙선

 

창릉천변에 깔끔하게 단장된 공원 산책로. ⓒ 성낙선

 
창릉천 자전거도로는 지축지구가 있는 지축교 밑에서 끝난다. 그곳에서 깔아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게 분명한 아스팔트 위로 올라선다. 그 길을 지나 다소 긴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로 양주시다. 그런데 고개를 넘어 공릉천 자전거도로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 도로 공사 중인 구간에서 헤매다, 겨우 도로 한쪽에 서 있는 작은 자전거도로 표지판을 발견한다. 이런 구간은 내비게이션에도 표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 잘 살펴야 한다.

공릉천과 석현천의 자전거도로는 창릉천과 대조적이다. 10년 전의 창릉천과 비슷하다. 손때가 덜 묻었다. 자전거도로와 산책로가 분명하게 구분이 되어 있지 않다. 길을 가는 도중에 불쑥불쑥 '북부 자전거 순환길'이라는 표지판이 나타나는 걸 보면, 이 길을 따라서 자전거도로를 길게 연결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실체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래도 자전거도로는 끊어지는 듯 마는 듯 계속 이어진다. 여기가 끝인가 싶은데 조금 더 가다 보면, 자전거 표지판이 나오는 식이다.

공릉천에서 단속적으로 이어지던 자전거도로는 얼마 못 가 삼상교에서 다시 석현천으로 이어진다. 석현천 자전거도로는 장흥관광지 부근에 도달하면서 끊긴다. 장흥교 밑을 지나 일반도로로 올라선다. 그런데 이곳의 도로는 자전거를 타는 데 적합하지 않다. 2차선 도로가 자동차만 겨우 오갈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다. 지방도로에서 흔히 접하는 일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인도마저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비좁다. 할 수 없이 중간중간 자전거에서 내려서 장욱진 미술관까지 천천히 걸어 오른다. 그나마 미술관이 코앞이라 다행이다.
 

자전거도로인 듯 아닌 듯, 양주시 석현천의 자전거도로. ⓒ 성낙선

 

양주시 장흥면의 한 버스정류장. 예술가들의 손을 거친 결과, 이런 정류장이 탄생했다. ⓒ 성낙선

 
'가족 사랑'을 되새기게 해준 장욱진 미술관

미술관까지 올라가는 길이 좁기는 해도 상당히 깔끔하게 단장된 걸 볼 수 있다. 그 길 위에서 이색적인 풍경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버스 정류장이 예사롭지 않다.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버스 정류장들이 지역 특성에 맞게 조금씩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걸 보게 되는데 이곳의 버스 정류장들은 그보다 좀 더 독특한 구석이 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정류장이라는 기존의 이미지에 일정하게 변화를 준 것만으로도 꽤 의미가 있어 보인다.

정류장 한 편에 이곳의 버스 정류장들이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놓은 표지판이 있다. 시에서 일단의 예술가들과 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한 결과, 이곳의 위험하고 복잡한 도로 환경을 주민들이 친숙하게 여길 수 있는 공간으로 개선하기 위해 버스 정류장을 교체했다는 설명이다. 그러고 보니, 도로도 좁고 인도마저 좁은 것에 비해 주변 풍경이 그리 삭막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에는 이런 노력이 있었다.
 

장욱진 미술관으로 들어서기 전, 조각공원에서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작품명 '돈키호테(신상호 작)'. ⓒ 성낙선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내 조각공원. 늘푸른 소나무. ⓒ 성낙선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개명산 산기슭, 석현천이 휘돌아 나가는 물가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장욱진의 작품을 전시하고, 한국현대미술의 미래를 이끌 후대 작가들을 지원할 목적으로 2014년에 개관했다. 미술관 건물 입구를 들어서면 너른 마당에 조성된 조각공원이 먼저 시선을 끈다. 양주 출신인 민복진 작가 등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그 뒤로 석현천 너머 언덕에 서 있는 하얀 건물이 장욱진 미술관이다.

장욱진은 주로 '가족'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그 당시 우리 아버지들이 그랬듯이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그림으로 표현했다.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푸근하고 인자한 아버지역을 맡았던 최불암이 화가 장욱진을 모델로 연기를 했다는 말이 있다. 드라마 속 아버지와 현실 속 화가 장욱진을 연결하는 일이 쉽지 않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보고 나면 그의 가족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지 조금은 손에 잡히는 듯하다.

그가 사랑한 가족에는 그의 처자식들뿐만 아니라, 그 집 마당을 뛰놀던 개와 새들도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개와 새들을 보고 있으면, 그가 가족만큼이나 동물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그림은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단순하다. 그래서 '동심의 화가'로도 불린다. 마치 동화를 쓰듯이 그림을 그렸다.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간의 순진무구한 정서를 놓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변함없이 순수한 마음을 잊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사람들이 장욱진을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욱진 미술관 전시를 소개하는 안내서 내용 일부. ⓒ 성낙선


장욱진 미술관을 나오면 바로 앞에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이 보인다. 장욱진 미술관 입장권으로 민복진 미술관까지 관람할 수 있다. 만약에 차를 가지고 온다면, 민복진 미술관 앞에 주차하면 된다. 미술관에서 가까운 거리에 가나아트파크, 돌고개유원지 등 함께 둘러볼 만한 곳이 많다. 장흥관광지에서 예전에 각종 유흥 시설로 시끌벅적했던 장흥유원지를 떠올리면 안 된다. 거리는 물론, 계곡 안까지 말끔하게 정비돼 있다. 지금은 이 일대가 '장흥문화예술체험특구'로 지정돼 있다.

미술관을 나와 의정부시까지 가는 도로 위에서 뜻밖의 자전거 길을 보게 된다. 갓길에 노란 선이 그어져 있다. 지방도로에서 이렇듯 선명하게 자전거도로임을 표시한 길을 보는 일이 흔치 않다. 굴곡이 심한 구간에는 차도와 자전거도로 사이에 펜스까지 설치했다. 자전거도로 표시는 곧 사라지지만, 지자체가 이렇게나마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감동적이다. 지방도로에는 자전거도로는 물론이고 인도조차 없는 길이 허다하다. 세상의 변화가 강과 하천 주변에서만 일어나지 말고, 전국의 도로에서도 함께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양주시에서 의정부시로 가는 길. 지방도로 갓길에 그어져 있는 자전거도로 표시. 지방도로에서 이런 길을 찾아보는 일이 쉽지 않다. ⓒ 성낙선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