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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고전읽기 백일장 대회? 한가로운 오후, 인터넷 서점에서 딸려온 팸플릿에 장식한 이 글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방학을 맞아 집에서 뒹굴뒹굴 놀고만 있던 딸아이가 마음에 걸리던 차, 나는 이거다 싶어 딸에게 팸플릿을 건넸다. 하지만 딸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고전이 뭔데... 책들도 다 재미없어 보여."
"아니야, 잘 봐봐. 옛날 책이라고 다 재미 없는 거 아니야. 콩쥐팥쥐, 흥부놀부도 아주 옛날에 지은 책인데 재미있잖아. 게다가 뽑히면 대통령한테 상까지 받을 수 있대."
"진짜? 대통령?"


아이가 슬쩍 관심을 보이자 나는 더욱 고삐를 당겼다.

"우리 이거 해보자. 방학인데 시간도 많잖아. 대신 엄마도 같이 할게."
"정말? 약속이다. 엄마도 꼭 해야해!"


이렇게 나는 아이에게 책 한 권 더 읽히고 글쓰기 한 번 시키겠다는 일념 하에 초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백일장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내가 읽고 싶었던 책이 금방 눈에 띄었다는 점이다. 바로 <열하일기>.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이 평소 '세계 최고의 여행기'라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열하일기>의 남다른 깊이

호기심을 갖고 펼친 <열하일기>는 말 그대로 일기 형식의 기행문이었다. 초등학생의 그림일기처럼 날짜와 그 날의 날씨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의 깊이와 밀도는 남달랐다. 신세 한탄과 자기고백의 언어로 얼룩진 내 일기와는 달리, 200여 년 전 한 인간의 세밀한 감정, 통찰력, 깨달음까지 시대를 아우르는 방대한 이야기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1780년, 박지원의 팔촌 형 박정원은 청나라 황제의 칠순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사행단을 이끌고 길을 떠난다. 박지원은 팔촌 형 덕분에 특별한 임무 없이 이 유랑길에 동행할 수 있었다. 압록강을 건너 북경까지, 북경에서 다시 열하까지. 결코 적지 않은 나이의 중년 남성이 죽을 고생과 고비를 마다 않고 여행길에 오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그에게는 이 고생길이 선진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실사구시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두 눈으로 확인시켜줄 꽃길로 느껴졌을 것이다.

실학자로서 평소 청의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열하로 가는 여정에 조우하는 사람들, 자연 풍광, 갖가지 문물 하나도 허투루 지나칠 수 없었다. 한데서 잠을 자고 제대로 먹지 못하고, 9번이나 강을 건너야만 도달할 수 있는 그 곳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열정은 결국 그에게 열하일기라는 역작을 남겨주었다.

하지만 그의 무거운 여정에 비해 그의 여행기는 전혀 무겁지 않다. 오히려 그와 동행하고 여행길에 만났던 많은 인물들, 그리고 그들과의 끊임없는 에피소드를 통해 나에게 키득키득 웃음이 나오게 하는 적이 많았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유머와 해학으로 넘기고 다시 나아갈 수 있는 능력, 이는 이 시대가 바라는 인재상이 아닌가?

그래서 열하일기를 읽으며 나는 문득 사회적 인간 박지원에 집중하기도 했다.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내 아이들만큼은 심신이 건강하고 어디서나 사랑받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는 욕심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 터. 내 생활의 모든 초점은 아이들이었고, 어떻게 해야 아이를 잘 키울지에 대해 늘 골몰하지만 항상 휘청대는 이 시대의 '보통 엄마'로서 박지원을 바라본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 나갈수록 재미있고 무해하고 엉뚱한 인간적인 모습의 박지원에 스며들게 되었다. 당대 이름난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부와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는 모습.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과 깊은 우정을 쌓으며 충만했던 그의 삶. 이는 보는 자체로 힐링이었다.

밤마다 들려주는 박지원의 모험 이야기

삶의 방향에는 여러 갈래가 있다. 현대 사회가 지향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엄마의 욕심은 아닐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웃음을 주고 싶다. 박지원을 통해 그것이 나 자신과 아이가 함께 행복해지는 지름길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그래서 난 요즘 밤마다 침대에 누워 아이들에게 박지원이 청나라에서 겪은 갖가지 모험담을 들려주고 있다. 중국말을 잘 못하는 한국인과 한국말을 잘 못하는 중국인이 우스꽝스러운 말로 피터지게 싸우는 모습, 칠흑 같은 밤, 말을 타고 목까지 찬 강물을 유유히 건너는 모습. 엄마가 '오버'하며 말하는 것이 재미있는지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큭큭거린다.

이야기가 다 끝나면 잠을 청하며 생각해본다. 앞으로 내 아이와 내가 마주칠 인연과의 여행이 열하일기처럼 충만하기를, 넘어진 여행길에서도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기를.

태그:#연암 박지원, #열하일기, #육아, #여행,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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