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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책가방 속에는 인터넷 강의를 듣기 위한 태블릿 피시와 두툼한 국영수 수험 서적만 가득했다.
 아이들의 책가방 속에는 인터넷 강의를 듣기 위한 태블릿 피시와 두툼한 국영수 수험 서적만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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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to 11'의 방학 

준경(가명)이는 아침 7시에 일어난다. 아침을 챙겨 먹고 등교하면 8시 반. 반별 출석 점검이 끝나면, 방학 전에 신청한 방과 후 수업을 듣기 위해 교과 교실로 이동한다. 8시 50분에 시작돼 4시간 동안의 수업이 마무리되면, 어느새 12시 40분. 점심시간이다.

5교시부터는 자율학습 시간이다. 평일 오후 1시 40분부터 5시 30분까지 도서관에 모여 공부한 뒤 하교한다. 해가 짧은 겨울이라 5시만 돼도 밖은 어두컴컴해진다. 학교가 파한다는 말일 뿐, 곧장 집으로 가는 건 아니다. 대충 간식을 사 먹고 영수 보습학원에 가야 한다.

학원 수업이 끝나면 얼추 밤 9시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은 집에 가지만, 웬만하면 스터디 카페에 가서 그날 공부했던 내용을 복습하며 하루를 정리한다. 24시간 운영되는 곳이긴 해도, 다음날 등교해야 하므로 가급적 11시는 넘지 않도록 조절한다.

방학 중 방과 후 수업을 신청하지 않은 정훈(가명)이도 아침 7시면 잠을 깬다. 준경이와 달리 일과를 스터디 카페에서 시작한다. 정훈이는 스터디 카페를 '방학 중의 베이스캠프'라고 부른다. 오전엔 그곳에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면서 보낸다. 시설 면에서 학교와는 비교가 안 된다.

함께 다니는 몇몇 친구들과 점심을 사 먹고 이내 영수 보습학원으로 향한다. 대개 등록한 학원이 같아서 하루 대부분을 그들과 함께 보내게 된다. 학원 수업이 끝나면 스터디 카페로 돌아와 그날 배운 내용을 복습한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저녁도 친구들과 같이 먹는다.

정훈이가 스터디 카페를 나와 집에 가는 시간도 밤 11시께다. 방과 후 수업을 신청하지 않은 이유를 물으니, 공간만 다를 뿐 함께하는 친구도, 공부하는 과목도, 다니는 학원도 별반 차이가 없다며 심드렁하게 답한다. 돈은 들어도 학교보다 쾌적해 집중이 잘 된다고 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준경이와 정훈이 둘의 일상만 비슷한 게 아니다. 아이들의 학기 중 일과와 방학 중 일과 또한 데칼코마니다. 잠시 학업을 쉰다는 방학 때조차 '7 to 11'이라는 일과표가 그대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들 말마따나, 고등학생이 방학을 누린다는 건 사치다.

숨 쉴 틈조차 없는 일과인데도, 준경이와 정훈이의 표정은 어둡지 않다. 방학 중인데도 종일 책상에만 앉아 있는 게 힘들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그들의 답변에 질문이 무색해진다. 또래 친구들 모두 겪는 일인 데다가 자신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단다.

자신들은 원체 잠이 많아 11시에 집에 가지만, 새벽 1시 넘어서 스터디 카페를 나서는 친구들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다음날 가장 먼저 등교하거나 자리를 잡는 이도 그들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들의 부지런함에 자극을 받아 조금 더 열심히 하게 되니 되레 고맙단다.

"학기 중엔 그나마 체육과 음악, 미술 수업이라도 있어 여유를 부릴 수 있지만, 방학 땐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요. 고등학생에겐 방학 때가 더 바쁘다는 걸 설마 모르시진 않겠죠?"
 

학기 중에 겨를이 없어 하지 못했던 취미 생활이나 체력 단련을 위해 운동 하나쯤은 해도 좋겠다는 말에 대한 대답이다. 관련 학과로 진학할 게 아니라면, 누가 한가하게 예체능에 신경을 쓰겠느냐고 되물었다. 수능과 내신 대비하는 데만도 하루 24시간이 짧다는 거다.

'인생 역전을 위한 다섯 번의 기회'. 고등학생들이 말하는 방학에 대한 정의다. 무조건 남보다 앞서야 하는 상대평가 체제에서 방학 때 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구동성 말했다. 뒤집거나 뒤집히거나, 결론은 둘 중 하나라면서 방학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있다는 거다.

그나마 기회가 다섯 번이나 주어지기에 다행이라고도 했다. 다섯 번이란 1, 2학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그리고 3학년 여름방학을 가리킨다. 다만, 2학년 겨울방학과 3학년 여름방학은 기회로서의 효용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늦어도 그때쯤이면 '현타'가 오기 때문이란다.

이전 학기의 교과 성적을 받아들고, 방학 동안 벌충한 뒤 다음 학기에 성적을 받고, 또 다음 방학 동안 열심히 벌충하는 일련의 과정이 고등학생의 숙명인 셈이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 속에 적성을 살린 취미 활동이나 독서와 사색 같은 여유는 끼어들 틈이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준경이와 정훈이 둘 다 이번 방학 때 읽은 책이 없다고 했다. 책 읽기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읽을 시간이 없었단다. 그들의 책가방 속에는 인터넷 강의를 듣기 위한 태블릿PC와 두툼한 국영수 수험 서적만 가득했다. 오로지 목표는 2년 뒤에 있을 수능이다.
 
2021년 11월 9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서 학생들이 오가고 있다.
 2021년 11월 9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서 학생들이 오가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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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부종합전형, 이상과 현실 

아이들의 겨울방학 일상에 관해 대화를 나누다 갑자기 교사인 나의 일상을 들여다보게 된다. 주말과 연휴를 제외하곤 방학 때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하고 있다. 수업은 없지만, 해야 할 일은 많다. 그중에도 당장 코앞에 닥친 건 아이들의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를 작성하는 일이다.

성적을 산출해 등급을 매기는 일이야 컴퓨터가 다 알아서 하지만, 학생부에 항목별로 내용을 기재하는 건 담임교사의 몫이다. 자율활동과 동아리 활동, 진로활동, 교과 세부능력 특기사항, 행동 특성과 종합의견 등을 학년말 겨울방학 때 정리해 개별적으로 입력해야 한다.

지난 한 해 동안 아이들과 면담하고 관찰한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일인데, 막상 쓰려니 영 마뜩잖다. 대학별 학생부종합전형에서 중요하게 활용될 자료이니만큼 대충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정작 아이들은 학기 중이든 방학 중이든 교과 공부에만 올인하고 있다.

방학을 활용해 동아리 활동과 봉사활동을 하고,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질 법도 하건만, 그런 비교과 활동에 관심을 두는 아이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하다못해 악기를 배우고 싶다거나 여행을 꿈꾸는 아이도 없다. 그런 경험을 쌓으라고 방학이 있는 건데 말이다. 아이들은 대입에 보탬이 안 된다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학교는 연초 교육과정을 짤 때 다양한 비교과 활동을 개설한다. 거칠게 말해서, 교육적 효과를 염두에 두기는커녕 오로지 학생부에 기록할 거리를 만들기 위해서다. 교육과정에 적시된 활동명은 '근거 자료'일 뿐, 정작 중요한 건 '기록'이라는 걸 아이들도 모르지 않는다.

아이들은 영악하다. 단지 '기록'을 위해 참여한 '활동'에 진정성이 담길 리 만무하다. 각자 활동한 내용을 간략히 써서 제출하면, 담임교사는 검토한 후 학생부 기재 요령에 맞게 정리해 기록한다. 아이들이 대충 적었다고, 교사마저 대충 기록할 순 없다. 이 과정에서 '마사지'가 일어난다.

교사들도 영악해진다. '마사지'에도 자연스럽게 등급이 나뉘게 된다. 학생부종합전형을 준비하는 상위권 아이들의 기록과 별 쓸모가 없는 하위권의 그것은 내용은커녕 글자 수부터 천양지차다. 그래선지 애초 하위권 아이들은 활동 내용을 제출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단 내신 성적이 뒷받침돼야 교과 세부능력 특기사항과 비교과 활동 기록이 의미가 있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내신 성적과 학생부 기록이 정비례할 수밖에 없다. 공부 잘하는 아이의 학생부 기록이 풍성하고 알차다는 의미다.

담임교사에게 학생부를 작성하는 일은 '울며 겨자 먹기'다. 자기 기록에 무관심한 하위권 아이들의 학생부에선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고', 당장 내신 등급 경쟁에 여념이 없는 상위권 아이들에겐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학생부를 선물해야 한다. 학생부종합전형이 보편화하면서, 얄궂게도 학생부의 질로 학교와 교사의 수준을 평가하는 시대가 됐다.

준경이와 정훈이를 비롯한 아이들이 학기와 방학 가리지 않고 오로지 교과 공부에만 올인하고 있는 건 '합리적 선택'인지도 모른다. 설령 비교과 활동에 소홀했다고 해서 내신 1등급 아이의 학생부를 '방치할' 간 큰 교사는 없다. '모교를 빛낼 인재'를 그렇게 대우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학생부종합전형이 수업 혁신과 공교육 정상화를 이끌 것이라 했지만, 학교 안팎에서의 아이들의 일상은 더욱 고단해졌다. 내신 등급을 올리기 위해 교과 공부에 목매단 아이들과 그들에게 좋은 학생부를 선물하기 위해 애면글면하는 교사들. 학생부종합전형이 꿈꾸던 학교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풍경이다.

태그:#학생부종합전형, #비교과 활동, #내신 성적, #공교육 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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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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