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의 한 장면.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의 한 장면. ⓒ JTBC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소설 <오, 윌리엄>을 읽고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책은 이혼한 부부의 지나간 갈등을 전처의 시점에서 돌아보는 이야기다. 전처 루시가 전남편 윌리엄과의 사랑과 결혼에 실패한 까닭이 결국 인간 윌리엄을 잘 알지 못했던 탓으로 돌리고 마는 좀 허무한 이야기다. 나는 루시의 좌절이 결국 계급 때문이었다고 판단했지만, 다른 이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라 생각했다. 서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던 불통이 절반의 사실이지만, 바로 그 불통의 근저에 극복할 수 없는 계급이 도사리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회의 영향을 벗어난 독생자 개인은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는 남녀 사이 계급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남녀 사이에 가로놓인 많은 난관들이 진정한 사랑으로 극복된다는, 누구나 알고 있는 거짓말을 답습하는 대신, 사실은 이게 정말 문제였던 게 아니냐고 묻고 있다. 관계에서의 계급 갈등은 사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얘기지만, 지금껏 로맨스 드라마가 취해온 형태와는 사뭇 다르다. 신선하다.
 
사랑의 갈등, 금성 여자-화성 남자가 전부는 아니다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의 한 장면.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의 한 장면. ⓒ JTBC

 
아름다운 도시로 유명한 통영 출신인 수영(문가영)은 특출한 외모를 빼면, 지방 출신, 고졸, 가난이라는 어찌 보면 결혼 상대로는 썩 달갑지 않은 조건을 가진 젊은 여자다. 그녀의 빼어난 미모는 '영포점 여신'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했지만, "와이프 스펙이 인생 스펙 된다"고 믿는 남자들에게 그녀의 매력은, 연애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결혼의 대상으로는 머뭇거려지는 뜨거운 감자 같다. 이런 세간의 생각을 수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언제부턴가 배우자를 고르는 기준이 된 계급은 우선 이들이 일하는 일터인 은행에서부터 철저히 분리되고 있다. 은행의 계급 구조는 크게 외주 하청 직원인 비정규직 청원경찰-계약직 창구 직원-정규직 직원으로 분리된다. IMF 이전엔 그저 은행 직원이던 노동자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기 시작한 이후, 입출금 창구 직원은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대체되었다.
 
지금은 서른이 넘은 조카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취업한 곳이 은행이었는데, 입사 후 자신이 딱 10개월짜리 비정규직 직원이라는 것을 알고 낙담했다. 이후 입출금 창구 직원이나 청원 경찰을 보면 마음이 착잡해지곤 했다. 10개월 단위로 사람을 쓰고 버리는 그곳, "공평해 보이지만 교묘한 차별이 있는" 일터에 확립된 엄연한 계급의 법칙을 비정규직 수영이 모를 리 없다.
 
"처음부터 좋았"던 상수(유연석)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망설임의 근저에도 이 계급의 벽이 단단히 버티고 있다. 촘촘히 구분되는 차이는 소비에서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차이를 만들어내고, 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넘사벽'이 된다. 2022까지 '영끌' 광풍이 분 집 사기 열풍에 2030이 전폭 가세했다지만, 이 광기에 가담할 수 없는 압도적 2030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드라마 속 외주업체 청원경찰인 가난한 종현(정가람)은 아직은 계급의 법칙에 순응하고 싶지 않다. 자신이 기거하는 옥탑방에서 고층 아파트를 바라보며 언젠가 저런 집에서 살 수 있다고 희망한다. "근사해질 거예요, 행복해질 거예요" 다짐하고 자위하는 가난한 청년 종현의 무한 긍정에, 시청자는 언젠가 배반 당할 미래에 벌써부터 마음이 아파지고 만다.
 
종현은 수영을 좋아하고, 엇비슷한 처지의 둘은 서로를 잘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가난은 사랑을 번번이 시험한다. 서로의 가난을 증오하지 않지만, 가난 때문에 더 가난해지는 마음은 서로의 곤경을 위로하고 격려할 힘을 조금씩 잃게 만든다.

상수와 수영은 용기낼 수 있을까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의 한 장면.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의 한 장면. ⓒ JTBC

 
상수와 미경(금새록)의 연애 전선에서도 계급의 차이는 미세한 균열을 낸다. '금수저' 미경은 과소비가 자연스럽고, 자신의 입장에서 줄 수 있는 고가의 선물을 받지 않는 상수가 서운하다. 그의 소비가 좀 놀랍긴 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일 년에 한 번 좋은 날에나 큰맘 먹고 할 만한 값비싼 식사를 매번 즐기고, 고가의 호텔 룸을 빌려 친구모임을 한다. 오백만 원짜리 명품 재킷 정도는 가벼운 선물이고, 일억을 호가하는 외제 차는 좀 신경 쓴 선물인 지경이다. 이 정도면 결코 가난하지 않은 강남 도련님 상수에게도 부담스런 소비다. 줄 수 있기에 주는 가진 자의 선의에 갚을 수 없는 상대의 속 사정은 고려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경이 막돼먹은 '금수저'는 아니다. 상속받은 부에서 나오는 온화함과 배려심은 그녀가 '금수저'라는 이유로 미워할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만든다. '있는 애들이 성격 좋다'는 속설을 증명하듯, 그는 직장에서도 지갑을 선뜻 열어 금수저에 대한 거부감을 부러움으로 상쇄시킨다. 하지만 관계는 부를 제공하는 것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그렇게 유지되는 관계는 갑을 관계에서나 가능하다. 하물며 연애관계는 어떨까. 돈을 밑밥으로 쌓아 올린 관계는 늘 붕괴의 아슬아슬함을 안고 있다. 부가 만든 감정 자본이 연애라는 친밀함의 영역에서도 언제나 통용되는 패스포트는 아니기 때문이다.
 
드라마 <사랑의 이해>는 근래 보았던 로맨스 중 가장 세밀한 방식으로 사랑의 감정이 어긋나고 비껴가게 되는 지점을 포착한다. 부자와 빈자라는 계급을 극단으로 대비시키지 않으면서도, 계급 내에서 분화되고 괴리되는 차이가 빚어내는 상황들을 긴밀하게 좇아간다. 이제 종반으로 향하는 드라마의 로맨스는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까.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걸 싫어하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도 책임이 따른다"고 믿는 애정 신중론자 상수는 수영과의 만남에서 망설임으로 어긋났던 지점들을 복기하고 극복하게 될까. 상수에게 만나자는 전화를 받고 종현에게서 받은 반지를 성급히 빼려는 자신에게서 상수를 향한 마음을 알아챈 수영은 상수를 향한 사랑에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나는 로맨스 해피엔딩 추종자는 아니지만, 상수와 수영이 한 번쯤 용기 내보기를 바란다. 계급 따위 별문제 아니라고 으스대는 치기 어린 감정이 아니라면, 그 어려움과 차이를 딛고 서로를 믿으며 최선의 사랑에 이르는 것은 값진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 둘에게 들이닥친 첫눈에 반한다는 감정은 귀한 것이다. 흔히 위험한 본능으로 치부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첫눈에 누군가를 점지하는 작용엔, 그간 살아오면서 체득한 지식과 감정의 총체가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순간적 판단을 내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도의 촉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총체가 집약되어 있다. 조건에 부합해 연애하고 결혼한다고 행복에 당첨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사랑의 이해> 연애 결혼 계급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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