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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이 풀어내는 인생 이야기를 전합니다[기자말]
'먹고사는' 본업이 따로 있는데 '작가' 직함을 가진 이들을 보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취미를 넘어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사람들. 작가라는 직함을 얻기까지는 단순히 취미 이상의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그들에게는 어떤 힘이 있는 걸까. 나는 그 '힘'이 궁금했다.

전주시 '문화공간 향교길68'에서 열린 '담장 너머' 전시회에 참여한 두 명의 작가. 정은숙 작가의 본캐(온라인 게임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자신이 주로 사용하는 캐릭터를 의미하는 신조어)는 약사, 김광숙 작가의 본캐는 문화 관광해설사다.

두 사람은 '화가'라는 부캐(본래의 캐릭터와 별도로 새롭게 형성한 캐릭터을 이르는 신조어)를 가지고 있다. 본캐와 부캐를 넘나들지만 때로는 '화가'라는 '부캐'가 더 압도하기도 한다.
 
본업이 약사인 정은숙 작가. 본캐는 약사이고, 부캐가 화가이지만, 때로는 바뀌기도 한다
 본업이 약사인 정은숙 작가. 본캐는 약사이고, 부캐가 화가이지만, 때로는 바뀌기도 한다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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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정은숙 작가의 꿈은 패션 디자이너였다. 하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약대를 지망했고 지금은 약사로 일한다.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지만 정은숙 작가에게는 늘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그 열정으로 마음 한구석이 늘 덜컹거렸다. 40세에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하다 보니 '평생 하고 싶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연 염색, 홈 패션, 퀼트도 배웠지만 결국 그림에 안착했다.

"늘 나를 발현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물론 약사 일도 재미있고 손님 대하는 일도 의미 있지만 자아실현의 길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 이상의 욕구가 있었던 것 같아요."

본업이 아니라서 더욱 자유롭다

단순한 취미 이상으로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남들은 단순히 즐거워서 하는 거냐고 물을 때마다 정은숙 작가는 '의무'로 한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데 '의무'가 따라야 한다? 좀 의아하다.

하지만 단순히 좋다는 경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시간을 할애해서 투자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예전에 만난 어느 가야금 명인이 그랬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잘 하려면 열심히 해야 한다고. 단, 그때의 열심히는 어떤 결과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다.

정은숙 작가도 온전히 하루를 그림에 올인한다. 일주일 중 비번인 하루를 온전히 비워둔다. 그날은 오로지 '작가 정은숙'을 위한 시간이다. 물론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는 건 아니다. 산책도 하고 차도 마시면서 자신 안에서 그림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 기다림 역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첫 전시회부터 지금까지 십여 차례 전시회를 하는 동안, 긴장하거나 두려운 적은 없었다. 오히려 전업 작가가 아니라서 더 자유롭다고 느낀다. 현재의 있는 그대로를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기 때문에 부담이 없다.

"흔적 없이 살다 가고 싶다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는 제가 살아낸 순간들을 남기고 싶습니다. 아름다웠고 슬펐고 기뻤고 쓸쓸했고 다정했고 고통스럽고 행복했던 삶의 순간들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 작가노트 중
 
정은숙 작가의 작품들
 정은숙 작가의 작품들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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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내서 그리고, 새벽에도 그리고

김광숙 작가는 서울 태생이다. 남편과 결혼하며 30대 초반의 나이에 전북에 내려오게 됐다. 대학에서 의상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졸업 후에도 전공과 관련된 분야로는 풀리지 않았다. 개포동에서 수학학원 강사로 잘 나가기도 했다. 결혼 후에는 전업주부 생활을 하다 우연히 문화해설사 교육을 받고 2006년부터 지금까지 활동을 하게 됐다.
 
전주한옥마을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는 김광숙 작가
 전주한옥마을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는 김광숙 작가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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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전공을 다 살려서 일하라는 법은 없지만, 의상 디자이너를 지망했다 수학강사로 그리고 문화해설사의 궤적은 롤러코스터 같다. 삶의 기회는 우리가 모르는 모퉁이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는 걸까.

문화 관광해설사로 일하다가 아는 교수님의 추천으로 2016년에 전주대학교 글로컬(글로벌+컬처가 합쳐진 말) 창의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과제로 제출했던 시화집을 보고 담당교수가 제안했다. "다른 것 하지 말고 당장 그림을 그리세요"라고.

"그림에 손 떼다시피 살았는데, 그 말을 듣고 내 그림이 특이하긴 특이한 걸까 생각했어요. 저는 남편이 잠든 후 새벽 12시나 1시부터 작업을 시작해요. 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마구 솟아나고, 다른 창의력이 샘솟아요. 그림이 안 그려질 때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려요. 누군가 제 작품을 보고 '치성'이 느껴진다고 하던데, 그런 게 통하나 봐요."

대학 졸업 후 처음 잡아본 색연필. 낯설었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했다. 대학 4년 동안, 미술 동아리에서 늘 붙어살다시피 하며 쌓았던 드로잉 실력이 다시 살아난 걸까.

이번 전시회에 전시된 김광숙 작가의 작품에는 부엉이가 등장한다. 지혜의 상징. 부엉이는 유로이 전주한옥마을, 마이산, 부안 채석강을 유람한다. 수많은 동그라미가 회오리치듯 문양을 완성해가는 화풍이 독특하다. 김광숙 작가 브랜드다.

"문화 관광해설사로 일하는 경험이 제 그림에 많은 영향을 미친 거 같아요. 풍경이 이미 제 안에 있거든요. 경기전의 홍매화가 이미 내 안에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제 일과 그림이 함께 시너지 효과를 가져온다고 믿어요."

대학 졸업 후 원했던 취업을 하지 못하고 수학강사로, 문화해설사로 다소 이색적인 이력을 걸어온 김광숙 작가. 하지만 그 시간들이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의 '작가 김광숙'을 만든 밑거름이 되었다.
  
김광숙 작가의 작품들.
 김광숙 작가의 작품들.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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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일에 자신을 던진다는 것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며 김광숙 작가는 자신의 SNS에 처음으로 '화가 김광숙'이라는 해시태그를 달았다. 내가 나를 인정한 것이기에 의미 있다. 작가로서 새로운 인생을 여는 김광숙 작가.

하지만 그것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지난 겨울을 이겨내고 움을 틔운 꽃잎처럼 지난 세월을 충실히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대학 시절 무수히 드로잉을 하며 자신 안에 잠들었던 올빼미가 다시 살아난 것인지도.

생계를 이어가며 또 다른 일에 자신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은 삶의 여유이기도 하며, 도전이기도 하다. '작가'라는 타이틀을 통해 무엇을 이루겠다는 마음 없이 자신에게 그저 집중하는 모습, 그 원동력은 결국 '몰두하는 순수한 기쁨' 아니었을까.

태그:#문화공간향교길68, #본업있는 작가들, #정은숙, #김광숙, #전주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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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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