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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아시아 경영 거점이었던 싱가포르가 함락된 것은 세계사적으로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 싱가포르 전투 당시 항복교섭에 임하는 일본군-영국군 지휘부 대영제국의 아시아 경영 거점이었던 싱가포르가 함락된 것은 세계사적으로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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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2월 15일, 일본군이 영국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내고 싱가포르를 접수했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방면과 함께 태평양전쟁의 3대 축선 중 하나였던 말레이 반도는 이로써 완전히 일장기 아래 놓이게 되었으니, 개전으로부터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자전거로 보병의 기동력을 극대화시켜 영연방군의 약한 고리를 분쇄하며 쾌속진격하는 전격전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말레이전은 전술적으로 큰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 전술적 평가 이상으로, 수백년간 이어진 영국의 아시아 식민통치 구조가 붕괴되었다는 정치적 평가는 일본을 넘어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난공불락의 요새로 불리던 싱가포르는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위상을 표상하는 핵심거점 중 하나였다. 그러한 싱가포르가 당시 일본군에게 허무하게 함락된 것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한때 세계최강을 자부했던 영국 동양함대는 말레이 수비에 기여하지 못하고 일본 해군항공대에 의해 무력하게 궤멸되었으며, 싱가포르의 영국군은 일본군보다 두 배 이상의 규모를 갖추고도 식수부족의 벽을 넘지 못했다. 윈스턴 처칠 총리는 본인 회고록에 '싱가포르 함락'을 다루면서, 당시 참패를 '영국군 역사상 최악의 참사이며 최대규모의 항복'이라고 적었다고 알려져 있다.
 
제국 일본의 당시 지도부는 싱가포르 함락을 '대동아전쟁' 선전에 대대적으로 이용하며 국민적 결집을 이끌어내는 데 애썼다.
▲ 일본군의 포로가 된 싱가포르의 영국군 수비대 제국 일본의 당시 지도부는 싱가포르 함락을 '대동아전쟁' 선전에 대대적으로 이용하며 국민적 결집을 이끌어내는 데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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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함락으로 영국 사회가 충격에 빠졌다면, 일본 사회는 이로 인해 엄청난 열광에 젖어들었다. 백인 침략자들을 아시아에서 축출한다는 '대동아전쟁'을 개전논리로 표면에 내걸었던 제국 일본의 지도부에게 있어, 싱가포르 함락은 전쟁 명분을 수식해줄 좋은 선전감이었다. 총리대신 도조 히데키 대장은 직접 주관한 싱가포르 함락 축하행사에서 "충심으로 황군의 큰 전과와 행복한 대아시아의 장래를 축복"한다고 발언했다고 알려져있다.

싱가포르 함락 축하는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았다. 기념우표 발행, 특식배급,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측의 축하 메시지 등이 이어지며, 1942년 2월의 일본은 그야말로 경축과 감격의 도가니 속에서 한껏 부풀어올랐다. 예상보다 빠르게 싱가포르를 손에 넣은 일본군이 말레이방면의 병력을 필리핀으로 증파하면서 전황은 더더욱 상승세를 타게 되었다. 그리고 4월의 시점에서, 일본군은 영국군, 미군, 네덜란드군 등을 축출하고 개전 시 목표로 설정했던 지역들을 모두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들뜬 것은 일본 국내여론 뿐만이 아니었다. 백인 지배자들을 끌어내린 일본군 병력들을 현지 주민들은 '해방군'으로 대접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일장기를 흔들며 일본군 장병들에게 과일과 같은 토산품들을 건네주었고, 이러한 환대를 받은 장병들은 국가에서 선전하던 성전(聖戰: 성스러운 전쟁)론을 경험으로 체화하게 되었다.

현지 주민 약탈... 악순환 이어지는 사이 일본 군인들이 느낀 인지부조화
 
전쟁 초기, 동남아 지역 주민들은 기존의 지배층이었던 백인들을 축출한 일본군을 환영하고 협조했다.
▲ 일본군의 상륙을 환영하는 인도네시아 론복섬 주민들 전쟁 초기, 동남아 지역 주민들은 기존의 지배층이었던 백인들을 축출한 일본군을 환영하고 협조했다.
ⓒ 대본영 해군 보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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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백인 침략자 축출'이라는 대의명분 뒤에는 동남아 지역의 물자를 확보한다는 일본의 진짜 의도가 숨어있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던 상황에서 미국의 금수조치로 석유와 철강을 비롯해 전쟁수행에 필수적인 물자수급에 제동이 걸린 제국 일본의 지도부는, 서구 열강으로부터 동남아를 빼앗아 현지 물자로 전쟁을 지속해나간다는 계산으로 개전의 포문을 열었던 것이다(관련 기사: 일본이 풀어야 할 괴로운 '근본 질문').

제국 일본의 관심이 점령지의 자주적 주권회복이 아닌 물자공급에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일본군을 환영했던 지역주민들의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어갔다. 계속해서 주민들과의 우호관계 유지에 성공했던 일부 지역들을 제외하면, 상당수의 점령지에서는 일본군의 위엄을 바로 세운다는 명목으로 '힘에 의한 질서 유지'가 기본값으로 설정되었다. 싱가포르에서 자행된 '항일화교 소탕'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일본군은 통치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될 경우 주민들을 폭력으로 탄압하기도 했다(관련 기사: 개전 80년, '대동아 전쟁' 신화가 청산돼야 할 이유).

이러한 상황은, 전황의 악화로 일본군의 보급 능력이 바닥을 기게 되면서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다. 기아에 내몰린 일본군 병력들은 현지 주민들을 약탈했다. 일본군의 약탈이 거듭되고 주민들의 분노가 고조되는 가운데, 연합군은 주민들에게 무기와 교관을 제공하며 항일게릴라 조직에 착수했다. 현지 주민들에 의한 항일투쟁이 개시되자 일본군은 무자비한 토벌전으로 보복했다. 바야흐로, 일본군과 현지 주민들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원한의 악순환이 피어나게 된 것이다(관련 기사: 범죄로 얼룩진 '결전'... 교수형 전 대장의 자책).
  
한때 영국군 축출과 일본군 입성을 환영했던 현지 주민들의 태도는 전쟁을 거치며 180도로 변화하게 되었다.
▲ 일본 항복 이후, 영국군의 귀환을 환영하는 싱가포르 시민들  한때 영국군 축출과 일본군 입성을 환영했던 현지 주민들의 태도는 전쟁을 거치며 180도로 변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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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선전에 따라 스스로도 백인 침략자 축출의 대의를 믿었고, 한때는 주민들에게 해방군으로 환영받았던 많은 일본군 장병들은 이와 같은 사태에 일종의 인지부조화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요시미 요시아시는 저서 <풀뿌리 파시즘-일본민중의 전쟁체험>에서 토벌전 수행에 번뇌하던 한 군인의 일화를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필리핀 루손섬 타를라크에서 경비 임무에 종사했던 육군군조(현대 한국군의 중사에 해당, 1945년 4월 전사 시 계급) 이토 마사이치는 전쟁 말기의 대게릴라전에서 자신의 반장과 전우 4명이 전사했을 때의 심정을 아내에게 남긴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토민(필리핀인), 이 토민의 얼굴을 보는 것도 싫다. 어제까지 그토록 친밀하고 또 사랑했던 그들에게 혐오의 감정이 든다... 하지만 점차 그런 의식도 희미해진다. 이 사실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일본인은 일지사변(중일전쟁)에서 많은 지나인(중국인)을, 그것도 양민을 죽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같은 혈족인 지나인들은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아버지를, 형을, 남편을 잃은 자식, 동생, 아내는 일본인을 증오하고 있지 않을까. 일본은 정의로운 전쟁을 이어왔다. 그러나 그 전쟁은 이와 같은 희생을 낳았다. 필리핀 토민도 필리핀 전선에서 그 골육을 무수히 잃고 있다. 토민이 이에 대해 무심할 리 없다.」

그는 필리핀 민중의 입장에 서서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전쟁에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일본은 동아의 맹주로서 정치경제적으로 그들에게 안정과 행복을 안겨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신념이 있었고, 더욱이 전선에 참가하면서 '일본과 일본인이 동양에 갖는 사명을 통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일본인은 아시아인을 구원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살해하고 있었다.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생각해낸 유일한 방책은, 그리스도와 같이 '진정으로 그들(필리핀인)들에게 봉사하는 피의 희생적 사랑', '속죄의 마음'을 전 일본인들이 깨닫는 것이었다.

-吉見義明、2022,   《草の根のファシズム》岩波現代文庫、107-108p

제대로 규명·평가되지 못한 전쟁기 일본-아시아 문제
  
아시아 해방을 위해 싸운다는 사명감과 현실에서의 범죄적 행위들, 그리고 그 모순된 현실로부터 초래된 인지부조화는 하루 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개전 당시의 프로파간다, 서구 열강의 군대를 상대로 한 승리, 현지 주민들의 환영 등 구체적인 전쟁체험 속에서 견고하게 구축된 '성전론'은, '아시아인을 구원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살해'하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큰 내적 동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전후의 도쿄재판에서 미군과 영국군 등 '백인 연합군'에 대한 전쟁범죄 단죄에 재판부의 역량이 치중되는 사이 아시아 민중의 피해가 외면되면서, 전쟁기 일본-아시아 관계의 문제는 제대로 규명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더욱이, 일본군이 현지에서 조직했던 보조병력들이 전후의 독립전쟁에 도움이 되거나, 일본군 패잔병들이 귀국하지 않고 현지 독립군에 합류했던 사례들, 그리고 신생독립국들이 부흥에 성공한 일본과의 경제협력에 절실한 입장이 되면서 동남아 지역 일본군에 대한 각국의 평가 또한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채 엇갈리게 되었다.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각국의 여러분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며 사과 성명을 발표하였다. 계승 여부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이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국 정부의 공식입장으로 유지돼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역사문제와 일본 사회의 아시아관이 거듭 화두로 오르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깊은 씁쓸함을 남긴다. 화해와 평화는 거시적 단위의 통계 아래에서 조명받지 못했던 복잡한 전쟁체험들을 들여다보고 그 실타래를 해명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태그:#싱가포르, #일본군, #영국군, #태평양전쟁, #동남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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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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