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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편집자말]
"근데, 그렇게 사진 찍어서 뭘 하긴 해?"

남편이 만든 돼지갈비찜에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고 있는 내게 하는 말이다. 모양이 뭉그러지지 않도록 감자와 무, 당근의 조리 시간을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고만. 파슬리까지 톡톡 얹어 '그냥 먹으면 섭하다'는 티를 그렇게 내놓고는 내숭이다. 사진 찍지 않으면 속으로 엄청 서운해 할 거라는 거 내가 다 아는데.

우리 집 주말 요리사인 남편의 요리 실력은 내가 따라 하기를 포기한 지 오래다. 좀처럼 사람 많은 곳에 가기를 꺼리는 극 I형 인간이 먹는 데는 진심인데, 아내는 그런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자가 발전한 경우랄까.

고기 요리에 진심인 남편이 얼마 전부터 '수비드'라는 요리 기구를 사달라고 보챘다. 용어 자체를 처음 들어봤다. 대체 그것이 무엇에 쓰는 기구인고, 알 턱이 없으니 내 대답은 당연히 "No!"였다.

일단 마음이 꽂힌 일에 뒷걸음질이 없는 남편은 예의 두 번째 작전에 돌입했다. 내가 "Yes!" 할 때까지 설득하는 작업이었다. 관심도 없는 내게 우선 수비드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용어 설명에서부터 시작해 그것을 사용해 고기 요리를 했을 때 얼마나 풍미 가득한 고기 요리를 먹을 수 있을지까지. 

게다가 값이 비싸지도 않다며 열을 올렸다. 이쯤 되면 관심이 없었어도 남편이 안 보는 곳에서 핸드폰 검색창을 열어 보게 된다. 검색 용어는 당연히, '수비드'. 남편의 말이 과장은 아닌 듯했지만, 이제 우리 집도 고기 요리 좀 줄여 보자고 말한 게 불과 2주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기 요리를 위한 기구를 들인다면 또 얼마나 가열차게 고기를 소비할 것인가.

수비드 장비를 사달라, 꼬치를 사달라

이번엔 남편이 후속 작전을 이어가도 안 된다,라고 마음 먹고 있을 즈음, 집 앞에 택배 하나가 떡 하니 배송되었다. 복잡한 이름을 띠고 있었지만 정체는 '수비드'. 내가 사 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남편은 회사 복지 차원에서 직원에게 지급되는 카드 포인트로 주문한 것이었다. 큰 머리를 작은 일에 쓰시느라 열일하시는 남편의 꼼수 최적화 뇌 구조에 또 한 번 허를 찔렸다.

응당 때에 맞춰 당도한 돼지고기 양은 자그마치 5kg. 수비드라는 아이템을 득템한 남편은 이 거대한 고깃덩이 앞에서 흡사 장팔사모를 휘두르는 장비가 된 듯 신나 보였다. 남편은 찜통에 물을 담아 수비드를 꽂고 지퍼백에 담은 고기를 12시간 이상 담가 놓았다. 그러면 고기 내부의 단백질이 고르게 익고 손상이 덜 가서 최상의 고기 맛을 보존할 수 있다나 뭐라나.
 
5kg에 육박하는 돼지고기. 여느 가정에선 보시긴 힘드실 거예요.
 5kg에 육박하는 돼지고기. 여느 가정에선 보시긴 힘드실 거예요.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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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오랜 시간 숙성시킨 고기를 꺼내 바로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소금, 후추, 머스터드 등으로 시즈닝 한 후 프라이팬에 다시 한참 굽는다. 그 지난한 작업을 기꺼이 해내다니. 일찍이 남편의 요리 따라잡기를 포기한 나를 새삼스레 칭찬할 수밖에. 덕분에 육즙이 잘 보존된 고기 요리를 먹을 수 있다니 감사하긴 한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

두 달여의 방학 동안 내가 바빠 변변한 가족 여행 한 번 다녀오지 못한 게 미안해서 지난 주말 갑작스럽게 1박 2일의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처음엔 고즈넉한 휴양림에서 숙소 하나 잡고 조용히 휴식을 취할 계획이었으나 예약이 어려워 결국 택한 것이 글램핑이었다.

글램핑이라면 아이들 어렸을 때 두어 번 가 본 게 다다. 아이들 어렸을 때 남들 다 가는 캠핑 좀 가보자고 했다가 "(캠핑 장비) 감당할 수 있겠냐?"는 남편의 말에 놀라 얼른 접고 택한 게 글램핑이었다. 숙소 가격은 좀 비쌌지만, 장비 없이도 하룻밤 캠핑의 낭만을 즐기기에 좋았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다시 찾아보니 그새 글램핑 속소들이 많아졌고 시설 또한 우리 아이들 어렸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공급량이 늘어나니 합리적인 가격에 괜찮은 글램핑 숙소를 잡을 수 있었다.

여행지가 글램핑장으로 바뀌니 또 남편의 장비 허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모든 게 갖춰져 몸만 가면 야외 캠핑을 즐길 수 있을 곳에 무슨 장비가 필요한가 싶겠지만, 이번에 남편이 욕심낸 장비는 스텐인리스로 만들어진 바베큐용 쇠꼬챙이였다. 야외에서 고기만 구워 먹어도 맛있을 텐데 굳이 또 저런 장비를? 매우 마땅치는 않았지만 오랜만의 가족 여행 앞에 마음을 좀 너그럽게 가지기로 했다.
 
처음만 이 모양이었어요. 5분 뒤 각 재료들은 다 해체일로...ㅠ
 처음만 이 모양이었어요. 5분 뒤 각 재료들은 다 해체일로...ㅠ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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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쇠꼬챙이에 가지런히 꽂힌 고기와 과일, 야채들은 보기에 굉장히 그럴싸했으나 불판에 익히기 시작하니 각 재료들의 익는 온도와 시간이 다 달랐다. 남들은 이걸 어떻게 제대로 해먹는 건지 당최 알 길이 없었다. 결국 아름다운 자태의 꼬치는 사진상으로만 남았을 뿐, 각 재료는 이내 다 해체되어 불판 위에서 따로 놀았다. 공들여 재료를 잘라 보기 좋게 꼬챙이에 꽂느라 들인 시간과 애씀은 무로 돌아갈 판이었다.

허세만은 아닐지도

숙소 내에 구비된 식기류 중 작은 도기 술잔이 있었다. 술잔 안쪽 바닥에 다홍빛 물고기 모양이 입체적으로 각인된 예쁜 술잔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술잔 하나의 테두리에 살짝 이가 나가 있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미리 알려드리려고 불판을 준비해 주러 오신 사장님께 말씀드렸다.

"사장님, 술잔 하나에 이가 나갔더라고요."
"그래요? 그게... 다른 술잔에 비해 좀 가격이 나가요."


선한 표정의 사장님 얼굴에 아쉬움이 살짝 어렸다. 아무나 쓰는 식기니 좀 싼 걸 쓰시지 그러셨냐고 하니 해맑게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예쁘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 많은 글램핑 숙소 중 이 숙소를 선택한 이유가 다녀간 손님들의 수많은 칭찬 댓글 때문이었다. 야외 캠핑장이고 불특정 다수가 다녀가는 곳이다 보니, 아이들 어렸을 때 다녔던 글램핑 숙소들은 늘 침구가 눅눅하거나 쾌적하진 않았다. 야외 숙소라 그러려니, 생각했었는데 이 숙소는 침구류도, 수건도 뽀송뽀송했다.

숙소를 다녀간 이들이 편안하게 묵어가기를 바라는 사장님의 진심이 느껴졌다. 작은 술잔 하나도 예쁨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숙소 사장님의 마음은 허세가 아닌 진심일 것이다.   

어쩌면, 최상의 고기 요리를 만들고 싶어 수비드를 사고 몇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캠핑에 바베큐용 쇠꼬챙이를 준비하는 남편의 마음도 허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육즙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기를 베어 물었을 때 입 안 가득 퍼지는 고기의 풍미. 핸드폰을 보는 장소만 바뀔 뿐일 수도 있었을 사춘기 딸, 아들과 캠핑장 숙소에서 열심히 꼬치를 함께 끼우던 모습. 남편의 장비 허세가 가져다준 소중한 행복의 순간이었다.

어쩌면, 허세를 부릴 때 남편은 젊은 시절의 호기가 되살아 나는 듯하다. 객기도 깡도 옅어진 반백의 남편이 가족 앞이 아니라면 이제 어디 가서 허세라도 부려볼 것인가. 매번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허세 속에 담긴 진심을 더 읽고 고마워해야겠다. 허세와 진심은 '한 끗' 차이라고 생각하며.

*수비드(SOUS VIDE)는 밀폐된 비닐봉지에 담긴 음식물을 미지근한 물속에 오랫동안 데우는 조리법이랍니다(저처럼 모르시는 분이 계실까 봐...^^;).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함께 게시될 글입니다.


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
태그:#수비드, #남편의허세, #글램핑, #남편의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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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은 공립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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