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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천 겹, 산 만 겹(해수중 산만첩 海千重 山萬疊).'

고려 말 안축(1287-1348)이 관동의 절경을 두고 한 말이다. 이 말에 제일 어울리는 고을은 양양. 설악을 시작으로 만 겹의 산이 서로 향하고 천 겹 바다는 동으로 뻗었다. 이름 말마따나 양양(襄陽)은 해(陽)가 솟는(襄) 고을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커먼 바다는 해를 출산(出産)하고 '박속같이 뽀얀 양수(羊水)'는 끊임없이 몰려와 낙산사 의상대 바위를 강타한다.
  
천 겹 바다를 시원스레 내려다볼 수 있는 바위벼랑에 서있다. 의상이 좌선하였던 곳으로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도 언급되고 있다. 1926년 만해가 세운 의상대는 폭풍우로 무너지고 1975년 다시 지어져 지금에 이른다.
▲ 의상대 정경 천 겹 바다를 시원스레 내려다볼 수 있는 바위벼랑에 서있다. 의상이 좌선하였던 곳으로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도 언급되고 있다. 1926년 만해가 세운 의상대는 폭풍우로 무너지고 1975년 다시 지어져 지금에 이른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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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하기에 앞서 장엄하고 엄숙하다. 누구나 한번쯤 가고 싶어 꿈에 그리던 곳이다. 정선(1676-1759)과 김홍도(1745-?)는 낙산사 일출을 그렸고 고려 때 김극기와 안축이, 조선에 이르러 정철(1536-1593)과 여류시인 금원김씨(1817-?)는 낙산사를 노래했다. 숙종은 관동팔경을 얘기하며 1군 1경의 기준을 마련하고 양양의 주인공은 오봉산 낙산사라 못 박았다.
  
1778년 김홍도가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여행하면서 그린 낙산사와 일출 그림으로 <금강사군첩-낙산사>에 전한다.
▲ 김홍도 낙산사도 1778년 김홍도가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여행하면서 그린 낙산사와 일출 그림으로 <금강사군첩-낙산사>에 전한다.
ⓒ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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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이 동해 변방으로 간 까닭은?

삼국통일 직후 671년(문무왕11년)에 의상(625-702)은 낙산사를 세운다. 낙산사 창건에 관련된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의상이 화엄사상을 공부하고 당나라에서 돌아왔을 때,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이 동해 해변의 굴에 산다는 말을 듣고 양양의 해안 굴을 찾아온다.
  
의상대 북쪽 벼랑 바위 위에 있다. 의상대사가 석굴 앞 바위에서 기도를 하다가 붉은 연꽃 속에서 나타난 관음보살을 보고 그곳에 세운 암자라 한다.
▲ 홍련암 정경 의상대 북쪽 벼랑 바위 위에 있다. 의상대사가 석굴 앞 바위에서 기도를 하다가 붉은 연꽃 속에서 나타난 관음보살을 보고 그곳에 세운 암자라 한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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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보살을 친견 하기위해 7일 동안 기도를 해도 이루어지지 않자 앉은 자리(좌구 座具)를 물 위로 띄웠더니 팔부신중이 나타나 굴속으로 안내하더라. 다시 굴속에서 7일 동안 예를 올려 기도를 하고나니 관음의 진용을 보았고 관음이 일러준 대로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금당을 짓고 절 이름을 낙산사라 했다.

13세기 전반에 활동한 석익장의 <낙산사기>에는 약간 다르게 나온다. 14일 동안 정성을 다해 기도를 하였으나 관음진신을 친견할 수 없게 되자 의상이 바다에 몸을 던져 구도를 했다는 것이다. 신라 진골귀족 출신으로 뭇사람들로부터 기대를 한몸에 받은 진중한 의상이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여 바다에 몸을 던져 구도하였으니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삼국유사>의 설화보다 더 극적이어서 구도자가 깨달음을 얻는 가장 완벽한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의상은 왜 동해변방인 양양에 낙산사를 세운 걸까? 통일 직후 신라는 불법의 힘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화합하려했다. 의상이 당나라에서 배워온 화엄학은 통일된 신라에 적합한 당대 최고, 최신의 불교였다.

의상은 통일을 했지만 중앙지배가 미치지 못한 접경지역에 사찰을 세워 화엄교학을 펼치고 전쟁으로 인해 상처 입은 백성을 위로하는 한편 사회통합을 꾀하려 했다. 낙산사 창건은 의상이 귀국한 후 신라불교의 중심인 경주를 벗어나 변방으로 향한 첫발이었다.

관음의 아바타에 수모를 겪은 원효

의상의 창건 이야기로 부족했는지 의상의 창건 설화에 매사 털털하고 때로는 경박하게 보일 정도로 경쾌한 원효(617-686)의 기사를 보태었다. 의상이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고 낙산사를 지었다는 소문을 듣고 원효가 예불을 하려고 낙산사를 찾는다.

낙산사 남쪽에 이르자 흰옷(관음보살의 상징)을 입은 여자가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는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그 벼를 달라고 하자, 여자도 장난삼아 벼가 익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벼가 이미 여물어서 베고 있는데 말이다.
  
낙산꼭대기에 서있는 관음상은 머리에서 발까지 백의를 걸쳐 유난히 뽀얗게 보인다. 백의는 관음보살의 상징으로 관음보살을 백의보살이라고 한다.
▲ 해수관음상 낙산꼭대기에 서있는 관음상은 머리에서 발까지 백의를 걸쳐 유난히 뽀얗게 보인다. 백의는 관음보살의 상징으로 관음보살을 백의보살이라고 한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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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하여 길을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자 한 여인이 월경대를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이번에는 원효가 물 한 모금을 청하자 여인은 굳이 월경대를 헹군 물을 떠서 올렸다. 헌데 원효는 그 물이 더럽다며 쏟아버리고 다른 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소나무 위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파랑새 한 마리가 "제호를 마다한 화상(休醍醐和尙)아!"라 하며 지저귀더니 푸드덕 날아가 버렸는데 그 자리에 신발 한 짝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제호란 우유에 갈분을 섞어 만든 죽을 말하는데 관음과의 인연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윽고 원효가 낙산에 도착해보니 관음상 밑에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발견하였다. 그제야 원효는 앞서 만났던 두 여인과 파랑새 모두 관음보살이 변장하고 나타난 아바타(화신)임을 깨달았다. 서둘러 원효는 의상이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얻었던 관음굴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풍랑이 크게 일어 끝내 들어가지 못했다.

두 설화를 두고 왜 의상은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고 원효는 관음의 화신(化身)에 수모를 당했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의상은 호국신앙에 적합한 정치적 인물이라면 원효는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며 스스로 깨달음을 실천한 대중성이 강한 인물이었다. 위정자들은 정치적인 면에서 원효보다는 의상을 더 필요로 했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다.

그러나 불법을 통해 접경지역을 교화하고 견제와 통합을 시도할 목적이었다면 낙산사 창건에 얽힌 의상 설화에 거침이 없고 대중적이며 백성에 더 다가서있는 원효의 스토리가 덧붙여진다면 대중교화에 더 큰 힘을 발휘하지 않았겠는가.

파랑새와 두 여인에게 망신을 당한 원효는 신라 대중에게 더 인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동정심을 얻었을 것이다.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관음보살의 아바타인 친숙하고 평범한 신라인과의 만남을 통해 대중교화를 수행한 원효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돌과 흙은 불에 타지 않는다

3000여개의 사찰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낙산사만큼 화재와 전란의 수난을 겪은 절이 또 있을까, 창건 이래 몽고란, 임란과 호란, 한국전쟁까지 모든 전쟁의 수난을 다 겪은 절이다. 전쟁 사이에는 산불로 피해는 막대하였다.

이런 수난에도 불구하고 폐사가 된 양양의 진전사와 선림원과 달리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낙산사는 의상의 창건 설화와 함께 관음신앙의 본산으로 명성이 꾸준히 이어져 왔으며, 이성계의 할아버지, 도조(度祖)를 잉태한 사찰로 이성계도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원통보전 경내는 사방이 별꽃무늬 담으로 둘러쳐 있다. 관음보살을 모신 전각을 원통보전과 칠층석탑이 있다. 이 탑 안에 의상이 관음보살을 친견할 때 얻었다는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를 봉안하였다 전해진다.
▲ 원통보전 경내 원통보전 경내는 사방이 별꽃무늬 담으로 둘러쳐 있다. 관음보살을 모신 전각을 원통보전과 칠층석탑이 있다. 이 탑 안에 의상이 관음보살을 친견할 때 얻었다는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를 봉안하였다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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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의 공력인가, 2005년 산불에도 용케 살아났다. 어수선하고 어딘지 모르게 휑한 낙산사 가운데 사천왕문에 이르는 짧은 길에서 찰나의 안온감을 받는다.
▲ 사천왕문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의 공력인가, 2005년 산불에도 용케 살아났다. 어수선하고 어딘지 모르게 휑한 낙산사 가운데 사천왕문에 이르는 짧은 길에서 찰나의 안온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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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3년 범일이 낙산사를 중건한 이래 1466년 세조에 의해 본격적으로 중창불사가 이루어진다. 세조는 예종의 원찰로 중창한다. 칠층석탑과 홍예문, 동종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어 예종과 성종은 전지(田地)와 노비, 소금 등을 낙산사에 하사하고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5년 산불은 낙산사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한국전쟁이후 복원된 원통보전을 비롯한 거의 모든 전각은 불타고 동종은 녹아 내렸다. 돌과 흙은 타지 않는 것인가, 남은 것은 원통보전 담장과 석탑 뿐. 현재 우리 눈으로 보는 낙산사는 <금강사군첩>에 전하는 김홍도의 낙산사도에 근거하여 복원된 것이다.

낙산사 별꽃무늬 꽃담

원통보전을 감싼 방형의 원장(垣墻), 별무늬 꽃담은 갸륵하게도 전쟁과 화마를 견뎠다. 그렇지 않아도 볼 유물이 없는 낙산사의 위안거리다. 안내판이나 여러 문헌에 원통보전 담장(원장)은 1468년 세조 때 처음 쌓은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2012년 임승남 문화재연구원은 낙산사 복원불사에 관한 연구에서 최소한 13세기 중엽 이전부터 존재한 것으로 밝혔다.
  
까만 밤 별들이 들어와 알알이 박혔다. 무질서, 자유분방함, 서민적 정감은 없다.
▲ 별꽃무늬 꽃담Ⅰ 까만 밤 별들이 들어와 알알이 박혔다. 무질서, 자유분방함, 서민적 정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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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탁한 세상과 신성한 공간을 나누려한 듯 두텁게 쌓았다. 기와로 층을 나누고 각 층마다 잡석으로 쌓아 귀족적이고 질서정연한 내벽과 다른 분위기가 난다.
▲ 원통보전 바깥담  혼탁한 세상과 신성한 공간을 나누려한 듯 두텁게 쌓았다. 기와로 층을 나누고 각 층마다 잡석으로 쌓아 귀족적이고 질서정연한 내벽과 다른 분위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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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탁한 세상으로부터 발가벗겨진 속살을 보호하려는 듯 담장은 둘러쳐 있다. 온갖 현란한 꽃들로 장식된 꽃담보다 더없이 감동적이다. 능원을 둘러싼 곡장(曲墻)에서나 볼법한 별무늬 담장을 동해변 변방에서 보았으니 더욱 감동적일 수밖에 없다.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강회와 진흙, 암키와를 차례로 다져 줄무늬를 내어 까만 밤하늘을 표현하고 사이사이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고 청명한 둥근 화강석(성석 星石)을 박아 낭랑한 별을 수놓았다. 담장은 별이 가득하다.
  
고고한 별꽃무늬 담장은 혼탁한 세상과는 단절을 고하고 담장 안의 공간은 신성한 세계임을 알린다.
▲ 별꽃무늬 담Ⅱ  고고한 별꽃무늬 담장은 혼탁한 세상과는 단절을 고하고 담장 안의 공간은 신성한 세계임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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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도 타지 않는 돌과 흙으로 만든 담은 영원불멸의 대상에 대한 동경, 갈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엄숙하고 규범적인 질서정연한 우주의 세계다. 변형 왜곡도 없다. 자연을 담고 닮으려 했다. 매일 떠오르는 해를 모티브로 장엄한 장면을 연출하려한 것이다. 해는 아침에 뜨는 또 다른 별, 해묵은 해는 별이 되어 담벼락에 박혔다.

잡것들이 감히 범하지 못하는 신성의 세계를 꾸미려한 것이다. 자율성을 기반을 한 따스한 정감, 서민적 미는 없다. 대중에 다가서려는 마음은 없다. 투박하거나 소박하고 어리숙하지도 않다. 긴장감 있고 정교하며 세련된 것이다. 그래서 심심하고 지루하다. 메마르고 까칠해 불편하지만 이는 무의식적이기보다는 다분히 의식적이다.
  
별꽃무늬 담장을 꾸민 사람은 여러 가지 무늬 중에 하필 별꽃무늬를 생각해 냈을까? 자연을 담고 닮으려는 게 사람의 미적 심성이다. 매일 아침에 뜨는 해를 모티브로 하지 않았나 싶다.
▲ 별꽃무늬 담Ⅲ 별꽃무늬 담장을 꾸민 사람은 여러 가지 무늬 중에 하필 별꽃무늬를 생각해 냈을까? 자연을 담고 닮으려는 게 사람의 미적 심성이다. 매일 아침에 뜨는 해를 모티브로 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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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굴 위에 지어진 홍련암과 의상이 참선했다는 의상대로 낙산사에서 의상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지만 원효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담장을 만든 사람마저 원효를 버리고 의상으로 기운 것인가. 담은 거침없고 경쾌하며 명랑하여 대중친화적인 원효와 어울리지 않는다. 진중하다 못해 답답하고 세심하여 빈틈이 없어 보이는 의상, 담은 의상을 닮았다.

태그:#별꽃무늬 꽃담, #낙산사, #양양, #의상대, #홍련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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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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